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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호 “우리는 배신감을 안고 있는 세대”

『바나나 그 다음,』
가장 경계하는 건 나를 규정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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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은 여행 작가로 살게 되었지만 글만 쓰고 살 거라고 확신하지도 않고요.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 잘할 수 있는 것을 뭐든 찾아서 할 생각이에요. (2017.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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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수석 졸업’은 그 자체로 명함이 될 수 있을 터였다. 그 자신도 그런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치동에서 다섯 개씩 학원을 다니며 대학의 꿈을 키우던 ‘대치동 키즈’ 박성호는 자신의 최종 목표, 카이스트에 합격했으나 “꿈을 이룬 게 아니라 꿈을 잃은 것 같았”다고 고백한다. 그곳에서의 그는 더 이상 성취할 것이 없었고, 주변 사람들은 불행했다. 대학만 가면 행복할 거라는 말을 믿었지만 앞으로 무엇을 해야 행복할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벼랑 끝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여행이었다.


박성호는 호주로 떠났다. ‘지옥’이라고 불리는 바나나 농장에서 딱 천만 원을 모으기로 결심했다. 그는 온갖 벌레가 우글거리는 컨테이너 한쪽 벽에 세계지도를 붙여두고 돈이 생길 때마다 비행기표를 샀다. 그리고 떠났다. 1년 동안 전 세계 90개 도시를 일주하고 돌아온 박성호의 이야기를 담은 『바나나 그 다음,』은 보장된 것보다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삶의 의미’를 찾는 한 사람의 솔직한 이야기다.


박성호는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준다면 ‘카이스트’ 타이틀도 얼마든지 이용하고 싶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바로 그 자신이 꼭 필요로 했던 말들을 전하기 위해서다. 좀 더 일찍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행복을 정의하기 위해 고민했더라면 그가 겪은 아픔은 덜해도 됐을 종류의 아픔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자기 생각을 갖지 못하고 살던 아이가 큰 경험을 겪은 후 달라진 세상을 살게 되는 이야기”, 이것이 박성호가 세상에 처음 내놓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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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고 싶은 건 ‘그 다음’


“인생도 결국 여행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라는 구절이 있어요. 이별에 대한 감상을 적은 글인데요. 여행으로부터 배운 것이 많이 담긴 책이에요. 여행 전에는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의외의 면이 있었는지 더 듣고 싶었어요.

 

군대에서 여행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요. 군대 가니까 좋더라고요. 그전까지 계속 학원만 다녔으니까요. 생각할 시간이 있다는 게 좋았어요. 군대에서 책을 많이 읽었는데 알랭 드 보통의 『불안』에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현실에서 문제를 겪고 있을 때 좋은 치료법이 될 수 있는 것은 더 큰 세상을 보는 일’이라는 말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거죠. 여행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저는 그 말을 세렝게티에서 이해했어요. 사파리를 하는데 그게 진짜 여행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전에는 새로운 곳을 돌아다니는 게 여행인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스와힐리어를 사용하는 아프리카 사람들한테는 동물들을 보는 게 여행인 거잖아요. 결국 내가 알고 있던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를 보는 것이 여행이더라고요. 거기에서 여행의 의미를 깨달았어요.

 

사실 ‘사파리’는 짐승들을 관찰하는 행위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아프리카 언어인 스와힐리어로 ‘여행’이라는 뜻이다. 왜 아프리카 사람들은 사바나를 돌아다니며 짐승들을 바라보는 행위를 여행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중략) 그들에게 여행은 인간의 질서가 아닌 대자연의 질서 속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와 세계가 무엇인지 탐구하는 시간이 아니었을까.(188-189쪽)

 

더 큰 세상, 다른 세계를 보는 일의 의미를 깨닫게 된 거군요.


사파리를 하면서 느낀 게 사람이 되게 작다는 거였어요. 그 사실이 저 자신을 초라하게 만든 게 아니고요.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여행을 하면서 느껴야 하는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천동설을 믿고 있다가 지동설을 믿게 된 느낌이었죠. 우주를 더 크게 보고, 인간 존재를 작게 볼 수 있는 시선을 여행을 통해 얻게 된 것 같아요. 그러면서 내가 뭐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역설적으로 든 거죠. 아무리 인간 사회에 대단한 사람도 많고 하지만 어차피 우리는 같은 존재고,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을까, 이 사실을 여행에서 느꼈어요. 또 사는 게 여행이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졌어요. 혼자 떠나는 여행을 하면 사실 외롭고 힘든 순간이 더 많거든요. 그런데 여행이 끝나면 그게 아름다웠다고 느껴요. 힘든 기억도 좋은 기억으로 남고요. 삶이 딱 그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름다운 순간 몇 개면 결국 삶 전체가 아름다워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야기를 들으니까 저자의 여행 이전의 삶이 더욱 궁금해져요.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해야 할 일들로 가득했던 생활이었잖아요. 그래서 여행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오기도 했을 테고요.


크게 영향 받은 작품이 몇 개 있어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수레바퀴 아래서』, 그리고 『돈키호테』예요. 특히 <죽은 시인의 사회>『수레바퀴 아래서』는 비슷하죠. 규정되고 억압된 교육 체계 안에서 인간의 자유 의지나 창의성을 억압 받는 내용인데요. 그 책을 보면서 여행을 많이 했어요. 제 삶과 비슷하게 느껴졌거든요. 아쉬운 건, 세 작품 모두 슬픈 결말이에요.(웃음) 감정 이입을 하고 작품들을 보니까 나도 이렇게 가다간 슬픈 결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나의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언급한 작품들과 달리, 억압을 받지만 새롭게 시작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죠.

 

제목에 ‘그 다음’이 들어간 이유가 거기에 있군요?


네, ‘바나나’가 그 이전의 이야기라면 제가 말하고 싶은 건 ‘그 다음’ 내가 그것을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하는 것이었어요. 사실은 그걸 더 쓰고 싶었어요.

 

이 여행을 끝내고,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한 후에 대한 확신이 책에는 없죠. 구체적인 계획이 담겨있지도 않고요. 결국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조금 다른 데에 있었네요.


20대에 세계일주 하는 이야기는 흔하죠. 제가 궁금했던 건 일주를 다녀온 사람들의 이후 이야기였어요. 어찌하다 보니 세계일주 한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는데요. 의외로 달라진 사람이 별로 없는 거예요. 오히려 세계일주 후에 체념을 한 사람도 많고요. 이상에 있다가 현실에 온 느낌인 거죠. 마치 돈키호테처럼요. 지금까지 꿈에 있다가 현실로 돌아왔는데 적응을 못하는 거예요. 저는 돈키호테처럼 되기 싫었어요. 세계일주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을 갖지 못하고 살던 아이가 큰 경험을 겪은 후 달라진 세상을 살게 되는 이야기를 쓰려고 했어요. 

 

그나저나, 군대에서 좋았다고요?


군대가 사실은 일정이 없는 시간이 되게 많아요. 그런 시간이 이전에는 없었던 거죠. 바쁘게 살았던 것 같아요. 일정이 많았다는 게 아니고요. 일정이 없어도 바빴어요. 일정이 없으면 다음 일정을 생각하며 살았죠. 대학교에서 학점 관리를 하고 그럴 때는 시험이 끝나도 다음 시험을 걱정했고요. 그 시험이 끝나도 취직을 고민했는데요. 군대에서는 다음 일정을 고민하지 않잖아요.(웃음) 앞으로 다가올 일을 고민하기보다 지나온 시간, 살아온 시간을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그런 시간을 군대에서 처음 가져본 것 같아요. 제대하고도 이전의 삶을 반복하기가 싫었고요. 그래서 제대 후에 더 공부를 열심히 했던 거예요.

 

이전의 삶을 반복하기 싫어서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는 말이 흥미롭습니다.


제대하자마자 생각이 바뀌었다고 공부를 포기하는 건 현실도피잖아요. 오히려 공부하는 모든 게 다 도움이 된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전까지는 진짜 성적을 받기 위해 공부한다는 생각이었는데요. 스스로 고민을 하고 나니까 오히려 공부를 더 하고 싶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최대한 공부를 열심히 했죠.(웃음)

 

퍼스트 펭귄이 되려면


저자의 글에서 눈에 띄는 건 무엇보다 솔직함 같아요. ‘고생 경쟁’ 같은 글이 그렇죠. 일부러 더 솔직하게 쓴 것 같기도 하거든요.


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사람들은 특히 학생들이었어요. 대학교에 막 입학한 사람들이 해당할 텐데요. 저는 중학생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었어요. 어려운 생각도 최대한 쉽게 풀고, 솔직하게 쓰는 게 제가 원하는 방향과 더 맞을 것 같았고요. 전하고 싶은 말도 그런 것이었어요. 자기 철학이 없는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최대한 솔직하고 쉽게 썼어요.

 

그런 말을 나도 그 시절에 들었으면 더 좋았겠다, 하는 아쉬움도 있었던 거죠?


그렇죠,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공부를 잘하면 다 잘될 줄 알았어요. 저만 그런지도 모르겠는데요. 친구가 저번 시험에 몇 점을 받았는지 다 외우고 다녔어요. 친구를 사귈 때도 부모님이 뭐하시는지, 어디 사는지는 궁금해도 다른 것에 대해 궁금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 면을 더 보게 만드는 사회 속에서 학생들이 자라니까 자기 인생이나 행복에 대한 생각을 쉽게 갖지 못하죠. 제가 작가가 되기로 한 것도 그런 이유인데요. 이런 이야기를 저 같은 비슷한 세대가 하면 더 와 닿을 것 같아요. 제 세대는 배신감을 안고 있는 세대라고 생각하거든요.

 

배신감이요?


어른들은 성장하는 사회에 살았죠. 기회도 많았고요.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아이들에게도 심어줬어요. 그런 교육을 받은 85-95년생 아이들이 막상 성인이 되고 보니, 아니에요. 배신감을 느끼는 거죠. 제 나이 또래는 기본적으로 어른들이 하는 말을 100% 수용하지 못하는 면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제 또래의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퍼스트 펭귄 효과’를 생각했죠. 먼저 뛰어드는 사람이 있어야 다른 사람도 따라온다는 거잖아요. 저는 살면서 사회로부터 혜택도 많이 받았어요. 카이스트에서는 등록금도 안 내고 다녔으니까요. 그렇게 혜택 받은 사람이 자기가 가진 걸 조금 포기하고 뛰어들어야 다른 사람도 변화에 동참할 것 같아요.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으셨을 것 같거든요. 선택지가 많았으니까요. 그럴수록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하는 게 더 어려울 수도 있는 거잖아요.


확실히 제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이유 중에 ‘카이스트 수석’이 가장 크죠. 만약 고등학교 졸업하고 이런 이야기를 했으면 세상이 들어줄 리 없잖아요.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저의 말에 효과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고민을 많이 했죠. 불과 다섯 달 전만 해도 치의학전문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걸 포기하기가 힘들었어요. 특히 부모님 세대는 공부나 꿈에 대한 한이 많으신 것 같은데요. 경제성장 속에서 많은 걸 포기하셨고, 그걸 자식에게서 대신 이루고자 하는 소망도 있으시죠. 저희 부모님도 그러셨고요. 그래서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어요. 그럼에도 이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여행을 통해 이런저런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이에요. 내가 배운 것이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거든요. 제가 공부한 산업디자인과 지금 하는 글쓰기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잘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안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신의 삶과 삶의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큰 거군요.


가장 경계하는 건 저를 규정하는 거예요. 전에는 카이스트 학생으로 살았고, 그 전에는 대치동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살았죠. 하지만 그 프레임에 제 스스로가 가능성을 낮췄던 것 같아요. 세렝게티에서 다양한 동물을 보고, 인간이 작다는 걸 느끼면서 나의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았는데요. 그걸 보기 전에는 내가 학생으로 할 수 있는 것, 내가 카이스트 학생으로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했어요. 제가 지금은 여행 작가로 살게 되었지만 글만 쓰고 살 거라고 확신하지도 않고요.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 잘할 수 있는 것을 뭐든 찾아서 할 생각이에요. 지금은 특히 한 가지 직업이 아닌 사람들이 워낙 많잖아요. 그때그때 잘할 수 있는 걸 찾아갈 것 같아요. 물론 평생 글쓰기는 계속할 것 같지만요.

 

글쓰기에 매력을 느낀 건 언제부터예요?


쓰기 시작한 게 여행하면서부터예요. 혼자 여행을 다니니까 블로그에 일기처럼 남기기 시작했어요. 글쓰기라는 게 기록을 위한 것만이 아니잖아요. 글을 쓰게 되면 기본적으로 자기의 생각을 대표하는 말들을 계속 고르게 돼요. 그러면서 내 생각을 정확하게 정립해주는 면이 있기 때문에요. 글 쓰는 건 작가뿐 아니라 사실은 모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점점 사회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세계로 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죠. 억압하고 규제해서 못하게 하는 게 아니고 단순한 행복을 줘요. 지금이 그런 것 같아요. 당장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재미있는 게 너무 많고요. 긴 글은 점점 안 읽게 되고, 점점 자기 생각이 없어지게 돼요. 글쓰기는 그런 우리 세대한테 꼭 필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자기 말을 할 수 있는 것, 생각을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죠.

 

공부하던 시절에도 그런 자각이 있으셨나요? 사실 저자의 경우 비교적 엘리트 집단에 속해 있었잖아요.


카이스트에서도 비슷했던 것 같아요. 무언가를 하고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은 진짜 손에 꼽을 정도였고,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어요. 가장 심했던 건 카이스트 자살 사건 때였어요. 그건 저희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사회가 점점 자기 아픔을 숨기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요. 자살률이 계속해서 OECD 국가 중 1위를 기록하고 있는데 우울증을 치료하는 세로토닌 약물 처방률이 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래요.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데 고치려고 하는 사람은 제일 적다는 얘기죠. 진짜 복지국가나 행복지수가 높은 국가들은 오히려 우울증 처방률이 높거든요. 아스피린을 먹듯, 정신에 조금만 문제가 있어도 고치려고 하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경쟁사회다보니까 아픔을 드러낸다는 게 나한테 약점이 있다는 얘기가 돼요. 그러니까 아픔을 말하기를 꺼려하죠. 모든 사람들이 같은 아픔을 갖고 있으면서도 인내하고 살게 되는 거예요.

 

자신의 아픔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요.


그러면 사회는 점점 병들어요. 제가 그 아픔을 치료하지는 못하겠지만요. 저는 우리 사회가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아픈 친구들을 주변에서 많이 봐왔고, 그 아픔을 겪었던 사람이니까요. 실은 저 역시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무서웠어요. 죄책감도 있고요. 복합적인 감정이 있었어요.

 

무섭고, 죄책감도 있었던, 그 마음은 어떤 것이었는지 더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죽음이나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 게다가 친구들 이야기니까요. 그 아픔을 갖고 계시는 친구들의 부모님도 보시는 거고요.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저 역시도 좋아보이지는 않았는데요. 점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픔을 숨기려고만 하면 절대 바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세월호도 똑같잖아요. 결국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앞장서서 이야기하면 사회가 바뀌잖아요. 저도 큰 의미에서는 제 이야기가 그렇게 전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글을 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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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모하죠


호주의 바나나 농장에서 너무 고생을 많이 했잖아요. 엄두가 안 날 정도로 고된 시간들인데요. 그곳에서의 각오는 어떤 것이었나요?


사실 바나나 농장에서도 힘들긴 했는데, 힘들지 않았어요. 육체적으로는 당연히 힘들었지만요. 정신적인 고통을 전혀 받을 일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계속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신적으로 워낙 맑은 상태였기 때문에요. 살면서 제일 행복했던 기간이었어요.

 

“다시 꼭 올 곳이 많이 큰일이다”라는 대목이 있거든요. 몇 군데 인상적인 장소를 보여주기도 했는데요. 꼭 다시 간다면 어디를 가고 싶으세요?


사실 혼자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은 아니고요. 제가 봤던 곳을 가까운 사람한테 보여주고 싶어요. 페루의 안데스 산맥 고지에 간 적이 있어요. 빙하로 덮여 있었는데 정말 예뻤어요. 그런 곳은 가까운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죠. 개인적으로 가고 싶은 곳은 따로 있어요. 제일 먼저 가야겠다고 생각한 곳은 킬리만자로 설산인데요. 그게 6년 안에 다 녹는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가서 보면 인류 전체에서 마지막으로 킬리만자로의 눈을 본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꼭 가보고 싶어요.

 

한편 위험한 순간도 많았는데요. 아프리카에서는 강도를 만나기도 했고요.


그때는 무모했던 것 같아요. 바나나 농장에 있을 때나 강도를 당했을 때는 혹시 내가 어떻게 된다 해도 두렵지가 않았어요. 삶에 큰 의미가 안 느껴졌어요. 공허하다는 느낌이 많았죠. 너무 어릴 때 친구의 죽음을 목격했잖아요. 친구의 장례식장을 가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슬프지가 않았어요. 무엇을 이뤄도 감동도 없고요. 그러다보니까 많이 무모했던 것 같아요. 힘들지 않았다기보다는 이러다가 사고 당해도 어쩔 수 없는 거지,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요. 무모하게 돌아다녔던 것 같아요. 이제는 그렇게 돌아다닐 생각은 없어요. 그때는 다리 밑에서도 자고, 막 돌아다녔는데요. 그 상태로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모하죠.

 

아찔하네요.


진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면서 카이스트가 인생의 거의 최종 목표였거든요. 운이 좋게 딱 카이스트를 들어가게 됐잖아요. 그런데 꿈을 이룬 게 아니라 꿈을 잃은 것 같았어요. 꿈을 이뤘는데 더 이상 성취할 게 없는 거예요. 막상 카이스트에 왔더니 주변 애들은 불행하고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행복할지 아무것도 모르겠고 말이에요. 생각해보면 여행을 하고 싶어서 떠났다기보다 여행이 꼭 필요했던 것 같아요.

 

불안해도 불행하지는 않아요


후반부에는 여전히 불안하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잖아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불안이란 어쩌면 인생의 조건일지도 모르고요. 다만 불안을 대하는 태도는 좀 다를 것 같아요. 어떤가요?


불안하죠. 많이 불안한데요. 특히 밤에 불안해요.(웃음) 잠이 안 오니까 또 불안하고요. 그럴 때 이런 생각을 많이 해요. 사람은 진짜 약하잖아요. 진짜 대단해 보이는 사람도 하나의 생명체로만 본다면 너무 약해요. 사람이 강해질 수 있는 건 생각과 신념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생각과 신념이 강해지면 당장 불안해도 견딜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계속 고민을 하면서 신념을 쌓아나가다 보니까 불안해도 불행하지는 않아요. 불안해도 견디느냐 견디지 못하느냐는 자신이 믿고 있는 게 있느냐 없느냐인 것 같아요. 불안한데 믿고 있는 것도 없이 막막하면 그게 불행으로 이어져요. 불안해도 꼭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있다면 버틸 수 있어요.

 

책 전반에서 퍼져 있는 감각은 자유로움이었어요. 해방감뿐 아니라 어떤 선택도 할 수 있다는, 어떤 삶도 가능하다는 넓은 의미의 자유로움이었는데요.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유를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세요?


단기적으로는 쉽지 않겠죠. 수십 년에 걸쳐 한국 사회가 이렇게 되어 온 거잖아요. 솔직히 말하면 십 년 안에 이런 세태가 바뀔 것 같지 않아요. 그런데요, 제시해주는 사람이 생기면 언젠가 바뀔 것 같아요. 우리사회는 한 길만 옳다고 제시하잖아요. 교육에서부터 그렇죠. 그러면 서열이 생겨요. 사람이 같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는 게 아닌데 길은 하나니까요. 사회가 길이 여러 개 있다고 제시해주면 언젠가는 그 길이 모두 인정받는 길이 될 것 같아요.

 

제시하는 역할을 하고 싶은,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인가요?


네, 아까 말씀드렸듯이 제 이야기마저 슬픈 결말이 되면 안 될 것 같아요. 말하자면 카이스트에서 퍼스트 펭귄으로 바깥에 뛰어들었는데 퍼스트 펭귄이 잘 되지 않으면 누가 계속 뛰어들려고 하겠어요. 제가 잘 되어야죠.(웃음)

 

슬픈 결말을 방지하기 위해서 지금 많이 하는 고민은 뭐예요?


신념은 잡았고, 지향하는 방향도 있는데 스스로 아직 부족한 게 너무 많아요. 작가로 살기 시작했지만 아직 스스로를 작가라고 말할 순 없는 것 같아요.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요. 스스로를 훈련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직 어려운 글을 쓰는 건 아니긴 한데요. 계속 이 일을 하고 싶으면 많은 공부가 필요할 것 같아요. 지금은 그게 제일 두려워요. 사람들은 늘 단편적인 것을 보고 전체를 판단하잖아요. 제가 이걸 하고 싶어도 당장 글을 그렇게 잘 쓰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의지를 꺾으려는 경우도 많이 나타나겠죠. 제가 그걸 맞설 순 없지만요. 스스로 실력을 키우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해요.

 

작가로서 앞으로 쓰고 싶은 글은 어떤 것인가요?


많은 삶의 경우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삶의 다양한 모습을 보면 내 삶의 걸림돌들이 작게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많은 삶의 경우를 보여주는 글을 쓰고 싶어요. 이번에는 그냥 저의 이야기였는데요. 다음에는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지금 한국 사회가 규정한 행복이나 성공만을 따르지 않게 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하고 싶어요.

 

 



 

 

바나나 그 다음,박성호 저 | 북하우스
지금까지의 삶이 옳은 것이라고 믿으며 모두가 부러워하던 길을 가고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마음속에는 깊은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과감히 떠났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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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신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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