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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단정짓기 전에 돌아보아야 할 이유

영화 <아이 캔 스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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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는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공유된다. 뭔가 말을 보태는 게 구차해 보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자꾸 진주댁이 떠오른다. (2017.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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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흔한 ‘가맥’과는 확실히 다르다. 편의점 앞 파라솔 아래에서 맥주 마시는 ‘가맥’은 말 그대로 편의를 위한 것이 크겠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진주슈퍼 앞 평상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마시는 막걸리 한 잔과 진주댁이 제공하는 무상의 안주를 먹는다는 건 편의적인 면과는 무관하다. 이런 온기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그 평상에서 ‘서면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나 ‘생강은 어디에서 나는가’ 류의 아재 개그 콘서트가 벌어지고, 썰렁한 개그에 점퍼나 걸쳐야겠다고 말을 끊고 쓱 안으로 들어가는 진주댁을 보는 일은 엄마 미소 같은 관객 미소를 자아낸다. 아직 울음보가 터지기 전이니, 나옥분 할머니의 사연을 아무도 모를 때니까.
 
나 어릴 적 동네에 있던 평상에는 그런 풍경이 선명했다. 어른들의 풍경이랄까. 동네 오며 가며 한마디씩 무언가에 대해 말 거드는 것이 당장 쓸모없는 일이고 오지랖에 가까운 일이지만, 함께 더불어 산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 사잇길에서 발견하는 꽃이랄지 작은 풀잎이랄지, 건조하지 않은 생명력이 발산되는 풍경이었다.


<아이 캔 스피크>는 재래시장 재개발과 구청 공무원의 일과 위안부 문제를 나옥분 할머니 중심으로 다루었다. 함께 산다는 것, 공동체, 기록의 영상화, 위안부 역사 진실 규명이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갖고 있는 영화다. 그래서 관객인 내가 할 말을 보탤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는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공유된다. 뭔가 말을 보태는 게 구차해 보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자꾸 진주댁이 떠오른다.
 
나옥분 할머니를 연기한 일흔 넘은 배우 나문희는 한마디로 ‘경지의 연기’를 했다. 말해 무엇하겠는가. 화면을 꽉 채우는 얼굴 클로즈업, 주름진 얼굴의 눈빛과 입술의 들썩거림은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어쩔 수 없게도 ‘신들렸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미국 상원 증언대에 서기 위해 떠나기 전 엄마 묘소에 간 나옥분 할머니가 ‘엄마 엄마’를 외치는 장면은, 원망과 그리움의 두 겹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애증의 호칭, 엄마를 부르는 소리에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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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할머니의 연기만큼 찰진 진주댁이 잊히지 않는다. 왜일까. 배우 염혜란의 개성적인 외모와 대사 호흡 조절이나 캐릭터 완성도 같은 영화적인 요소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주댁이라는 존재감. 인간관계에서 빛나는 깊은 이해심과 공감력의 소유자가 현실에서 참으로 그리웠기 때문이다.
 
진주슈퍼의 간판에는 ‘식재료 도소매’라고 적혀 있다.(두 번째 볼 때 발견했다) 먹고 사는 일에 대한, 크고 작은 유통을 한다는 적절한 선전 문구. 진주댁이 그런 존재였다. 동네 인간관계의 핵심 축. 편견 없고 긍정적이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사람.
 
나할머니의 험난한 과거를 알고 난 후의 진주댁의 모습을 보라. 왜 자신을 데면데면하게 대하고 눈을 피하느냐는 나할머니의 항의에 “서운해서 그랬어요. 서운해서.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귀띔도 안 해주고”라며 울먹인다. 그리고 지상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말을 한다.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 오랜 세월.”
 
얼마나 많은 순간, 우리는 사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해하는가. 쉽게 규정짓던가. 사람마다 가까운 과거나 오래된 세월의 사연이 있는 법임을 자신을 돌아보면 알 수 있는 것을. 우리는 말 한 마디나 어떤 몸짓으로 그 사람을 쉽게 판단해버린다. 
 
진주댁의 깊은 공감력은 관객마저도 품기에 이른다. 사람 사잇길을 내는 공감력이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서 시원하게 뚫어낸 고속도로가 아니다. 섬세하게 떨림이 있는 길이다.
 
잦은 발길이 만들어낸 사잇길. 다가가다가 망설여서 되돌아오는 발자국이 그 길을 단단하게 다지기도 한다. 진주댁이 이토록 그리운 것은 사잇길이 점점 희미해지는 세태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기도 하다. 나할머니와 진주댁이 나누는 온기가 식지 말기를. 사람 사는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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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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