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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란 말이 일생을 만들 때가 있다

영화 <엘리자의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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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란 말이 일생을 만들 때가 있다”고 시작하는 시를 읽는 기분. 어쩌면 로메오는 ‘하필’이란 말에 기대어 딸에게 벗어나라고 강권하면서 그 사회의 눅눅한 어둠 속에 한 발 디뎠는지도 모르겠다. (2017.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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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엘리자의 내일>의 한 장면


“어떻게 마음의 짐을 안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나요?”라고 아내가 딸 엘리자의 내일을 걱정한다. “여기 남아서 변화를 일으켜야지. 다 떠나면 어떡해” 어머니가 손녀의 유학을 반대한다. 이 영화는 아버지-딸의 관계 속에서 미스터리한 긴장감이 팽팽한데, 그 아버지 로메오의 어머니와 아내는 모두 바른말을 하고 있다. 틀린 말이 없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이렇게 불안한가. “힘들다, 뭐가 최선인지 모르니까” 하고 심정을 토로하는 아버지는 왜 이다지도 피로한가.

 

루마니아의 중산층 가장이자 의사인 로메오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다. 민주화운동 전력도 있지만 전혀 변화되지 않는 사회에 좌절감이 크다. 딸을 여기 아닌 곳, 영국으로 유학을 보내려고 한다. 총명한 딸은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갈 예정이니 바란 대로 될지도 모른다.

 

첫 장면, ‘누군가’ 던진 돌에 집 창문이 깨졌을 때 로메오는 뛰쳐나가 범인을 찾아보려 하지만 놓친다. 핸드헬드 카메라가 흔들리며 로메오가 뛰는 대로 따라가는데, 현실이 녹록하지 않다는 이미지다. 또 ‘누군가’ 등교하는 엘리자를 납치해 강간하려 했다. 미수에 그쳤지만 엘리자는 유학 관건인 졸업시험을 앞두고 있던 터다. 제대로 시험 치를 분위기는 아니었다. 역시 ‘누군가’가 로메오가 세워둔 자동차를 훼손하고 만다. 범인 ‘누군가’는 끝내 밝혀지지 않지만, 어쩌면 헬-루마니아의 ‘보이지 않는 손’일지도 모르겠다.

 

칸영화제에서 첫 작품 <4개월, 3주 그리고 2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크리스티안 문주는 <엘리자의 내일>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이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의 일상으로 끌어들여 치열하게 묻고 답하는데, 이 영화도 그러했다. 그러고 보니 공동 제작자가 다르덴 형제다.

 

정의란 무엇인가. 그들만의 의리와 인간적인 봐주기, 그럴듯한 처신으로 시스템을 파고드는 불의를 정의의 이름으로 단호하게 처단할 수 있는가. 큰 이권을 바라며 행해지는 불의는 처단하기 쉽지만 가족의 일은, 피해자의 형편을 봐주는 방식의 불의는 어떻게 보아야 하나. 하필 졸업시험을 앞두고, 하필 유학을 앞두고, 하필 자신의 딸이 강간 미수 사건의 피해자가 되어버렸으니 아버지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공부 잘했던 딸이 불안감 때문에 망칠지 모를 시험을 조금만 봐주면 되겠다는 쉬운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차피 공무원-교사-경찰 모두 불의의 타협과 결탁에 익숙한 사회니까.

 

하필은 불현듯 순간의 어긋남에 불을 비춰주는 말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 잘못된 일이
하필은 기필코 하필이란 말을 물어보게 하는 말
하필은 참회도 없이 두 손을 붙들고 우는 말
하필이 쌓아올린 하필 그런 삶

-김승희 「‘하필’이란 말」 중에서

 

“하필이란 말이 일생을 만들 때가 있다”고 시작하는 시를 읽는 기분. 어쩌면 로메오는 ‘하필’이란 말에 기대어 딸에게 벗어나라고 강권하면서 그 사회의 눅눅한 어둠 속에 한 발 디뎠는지도 모르겠다. 내 자식에게만은 하필, 이란 말의 무게를 느끼지 않게 하려고.

 

한 번의 청탁이 로메오 인생을 어떻게 몰고 가는지, 영화는 치밀하게 보여준다. 사회의 어둠을 빨아들이는 일상의 불의가 어떻게 로메오를 옥죄어가는지 탁월한 시나리오로 보여준다. 로메오라는 인물은 정직하기로 소문난 의사였고, 연약한 아내에 대해, 위태로운 심장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에 대해, 또 연인 관계인 엘리자의 영어 교사에 대해 폭력적이고 위선적인(위악적인 것은 물론) 태도를 취한 적은 없다. 멋진 인물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인간적으로 그 선의를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시험 조작을 위해 엘리자에게 시험지에 특별 표기를 하라고까지 주문했으나, 딸은 표기하지 않고도 시험을 잘 마쳤다고 보고한다. 졸업식장에서 환히 웃는 딸 엘리자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로메오. 그러니까 엘리자의 내일은 엘리자가 환하게 열어젖힌 셈이다. 이 영화가 ‘로메오의 내일’이 아니라 ‘엘리자의 내일’이어서 안도감이 든다.

 

“이곳을 떠나렴 너의 미래를 위해”라고 말하는 것은 아버지의 몫, 떠날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하는 것은 딸 엘리자의 몫,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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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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