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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꽃>, 영화로 시(詩)를 시도할 수 있다

꽃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그 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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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끝에서 시작해 희망의 시작으로 마무리하는 ‘꽃’ 삼부작의 연출 의도에 대해 박석영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다시는 잡을 수도, 안을 수도 없지만, 그 완전한 생명을 이야기하고 싶었다.”(2017.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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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시(詩)를 시도할 수 있다. 그렇다고 시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박석영 감독이 연출한 <재꽃>은 그 어려운 걸 해낸다. <재꽃>은 박석영 감독의 ‘꽃’ 삼부작의 완결편이다. <들꽃>(2015)과 <스틸 플라워>(2016)의 연장 선상에서 이야기해야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재꽃>을 포함해 ‘꽃’ 삼부작의 주인공은 하담(정하담)이다. <들꽃>에서 그녀는 남자에게 폭행을 당하다 두 명의 언니에게 구출되지만, 거리를 전전한다. 안전하게 잘 곳을 찾기 위해 매일 같이 노력해도 허사다. 어른들의 보호는커녕 그녀들을 이용해 돈 좀 벌어보려는 악한들 천지다.

 

<스틸 플라워>에서도 하담은 극단적인 생존의 위협에 내몰린다. 홀로 추운 거리를 헤매며 일거리를 찾아도 돌아오는 건 문전박대뿐. 겨우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어도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다시 거리로 쫓겨난다. 세상이 그녀를 속일지라도 겨우 전등 빛에 의지한 밤거리에서 탭댄스를 추며 희망 한줄기를 놓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당도한 <재꽃>에서 하담은 전보다 여유로운 표정이다. 안전하게 지낼 곳도 생긴 것 같고 가족도 있어 보인다. 돌보아야 할 동생도 생겼다. 해별(장해금)이란 이름의 11살 소녀다. 생전 본 적 없는 아빠를 찾겠다며 시골 마을을 찾아왔다. 해별이 아빠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손사래를 쳤다가 갑자기 함께 살겠다며 집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재꽃’은 실제로 존재하는 꽃이 아니다. 다 타버리고 재가 됐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꽃이라는 의미로 박석영 감독이 지었다. 감독이 보기에 지금의 소년과 소녀들은 재와 같은 존재다. 부모는 자기 자식부터 챙기느라 주변 아이를 향한 관심은 뒷전이고, 어른들은 자기 잇속을 챙기느라 나이 어리고 힘 약한 사람들을 위험에 몰아넣는다. 최후의 보루가 되어주어야 할 사회는 이 친구들을 무한경쟁 속으로 몰아넣고 모른 척 뒷짐 지고 있다.

 

가진 거라고는 달랑 캐리어 하나뿐. 아이들은 정글 같은 사회에서 ‘들꽃’처럼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혼자 힘으로 자라난다. 이리 채이고 저리 깨지면서 ‘강철 Steel’ 같은 맷집 하나만은 제대로 키운 ‘꽃 Flower’은 몰아치는 삶의 파도에 굴하지 않고 안전하게 몸을 뉘울 집을 찾아 나선다. 꽃잎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는 고통에서도 기어코 꽃으로 자라나는 생명력이란.

 

<들꽃><스틸 플라워>와 다르게 <재꽃>의 배경은 초록빛 충만한 자연이다. 시원하게 뻥 뚫린 푸른 하늘과 젖줄처럼 흐르는 졸졸 시냇물과 하담과 해별의 키보다 살짝 높이 자라난 풀과 나무들이 엄마의 품인 양 포근함과 안락함을 제공한다. 이곳에서도 하담과 해별은 끝내 어른들의 보호도, 집에 정착하지도 못하고 다시 거리로 나서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 둘이다.

 

하담은 <들꽃><스틸 플라워>를 거치면서 모진 비바람에도 어엿한 꽃 한 송이로 성장했다. 그동안 떨어져 나간 꽃잎들은 홀씨처럼 지나간 길에 뿌려져 희망의 싹을 피웠다. 그 새싹 중 하나의 이름은 해별. 해별은 일면식도 없는 하담을 보자마자 별 거리낌 없이 따르기 시작한다. 홀로 꽃이 된 하담과 다르게 해별에게는 흐린 하늘에 ‘해’가 되고 어두운 거리의 ‘별’이 되어줄 하담이 꼭 옆에 붙어 있다.

 

꽃잎 무성한 꽃으로 자랄 해별의 미래에 함께할 이는 하담 만이 아니다. 하담이 뿌린 희망이 해별처럼 자라날 것이며 해별이 지나간 자리에 뿌려진 또 다른 희망들이 꽃으로 이 세상을 장식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꽃들이 세상을 가득 채울 날이 올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재’는 타버리고 없어진 것이 아니다. 또 다른 불씨다. 재이지만, 여전히 ‘꽃’인 이유다. 

 

절망의 끝에서 시작해 희망의 시작으로 마무리하는 ‘꽃’ 삼부작의 연출 의도에 대해 박석영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다시는 잡을 수도, 안을 수도 없지만, 그 완전한 생명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삶은 미(美)와 추(醜)를 왕복하는 진자 운동이다. 시는 삶의 추한 광경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예술이다. 그래서 시는 우리의 삶이다. 고통은 삶에서 많은 것을 빼앗아가지만, 우리가 잊고 있던 것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그게 시의 역할이다. 그렇다면 <들꽃><스틸 플라워>, 그리고 <재꽃>도 시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허남웅의 영화경’ 한눈에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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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허남웅(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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