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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어려운 책에 대한 어려운 리뷰] 『하나이지 않은 성』

응답하라 1990, 현/사/연/ 뤼스 이리가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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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어려운 책을 어렵게 읽었던 시대. 쉬운 책, 쉽게 읽히는 리뷰가 대세인 요즘, 도전정신 반 허세 반으로 붙잡았던 그 시절의 사상가들이 문득 떠오른다. 90년대 스타일을 간직한 번역가 이정인씨의 현대 사상가 리뷰를 연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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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중심의 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

 

벨기에 출신의 여성주의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1930~ , Luce Irigaray) ― 이리가라이, 이리가레이 등으로 표기되기도 했으나 최근 이리가레로 통일되고 있다. ― 는 벨기에 루뱅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했고, 1960년 대 프랑스로 건너가 자크 라캉의 세미나에 참가하는 등 정신분석학자로서 수련을 받았다. 그러나 1974년 철학 박사 학위논문으로 제출한 『반사경: 여성으로서의 타자에 대하여 (Speculum. De l’autre femme, 이하 『반사경』)』의 출간은 프랑스 라캉 학파에 큰 파문을 불러왔다. 이 책으로 인해 이리가레는 라캉이 주도하는 ‘파리 프로이트 학회’에서 쫓겨나며 라캉 학파에서 축출 당했다. 대학 강사직에서도 파면됐는데 라캉이 직접 영향력을 행사한 결과였다고 한다. 이리가레는 이후 프랑스에서는 다시 교직을 얻지 못했고, 유럽 여러 대학을 떠돌며 학문 활동을 이어나갔다.  

 

남근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반사경』은 어떤 책이기에 이리가레는 학계에서 매장 위기까지 몰리게 됐는가? 논문 심사에서부터 논란이 됐다는 『반사경』은 프로이트에서 플라톤까지 서양 철학사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철학에서 가부장제의 작동을 드러낸다. 특히 프로이트 비판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프로이트(그리고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남근중심주의 담론이라고 비판했다.

 

『하나이지 않은 성 (Ce sexe qui n’en est pas un, 1977)』은 프랑스 학계에서 추방된 이리가레가 1973년에서 1976년 사이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들을 묶은 책이다. 체계적인 저작은 아니지만 여기 수록된 많은 글들 역시 프로이트-라캉주의를 주요한 비판대상으로 삼고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원래 여성의 신경증 연구에서 시작됐다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남성 주체성 이론으로 귀결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유아기 남성은 근친상간과 부모살해에 대한 욕망을 가진다. 그러나 남성은 자신과 성기 형태가 다른 여성을 보고 남근이 거세될 수 있다는 위협을 느끼고는 아버지에 대한 복종을 내면화하며 주체로 성장한다. 그렇다면 여성은 어떻게 주체화되는가? 프로이트는 여성 역시 남근에 대한 동일한 욕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여성은 자신에게 남근이 결핍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남근에 대한 선망을 갖고 있다. 이런 식의 여성 주체성 이론은 당연하게도 여성을 결함을 가진 존재, 이미 보편적 인간인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존재라는 인식을 전제하고 강화시킬 수밖에 없다.


여성 주체성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은 이리가레가 『하나이지 않은 성』의 수록 논문 「정신분석 이론으로의 회귀」에서 다루고 있는 것처럼 카렌 호나이, 멜라니 클라인 등 이후의 여성 정신분석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그런 이의 제기들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프로이트로”라는 슬로건을 내건 라캉에게서 이런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리가레는 이러한 프로이트-라캉주의가 과학의 이름을 빌려 남근중심주의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남성주체성이 중성적인 인간주체, 진리의 기준을 자처하며 여성의 고유성을 억누르고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리가레는 성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며 기존의 사회?문화 질서에서 망각되고 있는 성의 차이를 전면적으로 드러내려고 한다.

 

“… 우리는 남근이 그의 특권을 질투하는 신의 실제 모습이 된다는 것을, 남근이 이러한 명목으로 담화 자체의 최종적 의미가 되고, 진실과 소유의 표준, 특히 성기의 표준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을, 또 욕망 자체가 궁극적인 기표, (혹은) 기의라고 주장하는 것에 의혹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 이론으로의 회귀」)

 

이리가레는 또한 현존 사회와 문화가 남성들 사이에서의 여성의 보편적 교환 위에서 세워졌음에도 레비-스트로스 같은 남성 사상가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여자들의 시장」, 「여자들 사이의 상품」) 이런 입장들로부터 이리가레는 여성(주의) 운동이 단순히 형식적 평등의 쟁취를 넘어 더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주의의 두 번째 물결

 

뤼스 이리가레는 흔히 엘렌 식수 등과 함께 프랑스 2세대 여성주의의 대표적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등장한 여성운동의 첫 번째 물결(first wave feminism), 즉 1세대 여성주의자들의 최대 목표는 여성 참정권의 쟁취였다. 하지만 1차 대전 이후 유럽과 북미 국가들 대부분에서 보통선거권이 쟁취되었는데도, 여성에 대한 사회ㆍ문화적 차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세대 여성주의 운동의 물결이 지나간 지 거의 반세기 후인 60년대 중반 여성운동의 두 번째 물결(second wave feminism)이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러한 2세대 여성주의는 정치적ㆍ경제적 평등권보다는 임신중지, 성폭행 등 그동안 사적 영역으로 은폐되던 문제들을 주로 제기했다. 베티 프리던의 『여성의 신비 (The Feminine Mystique, 1963)』, 케이트 밀레트의 『성 정치학 (Sexual Politics, 1969)』,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 (The Dialectic of Sex, 1970)』 같은 책들에 기초한 새로운 여성운동은 60년대 대중운동의 파고와 함께 더욱 급진화 되었다. 프랑스에서도 1968년 5월 혁명 이후 여성들의 피임권과 임신중지권을 중심으로 전투적이고 대중적인 여성운동이 벌어졌다. 뤼스 이리가레 역시 이러한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70년대 프랑스의 여성주의 이론은 이리가레의 작업에서 나타나듯이 당시 지배적 이론이던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흔히 프랑스의 대표적인 여성(주의) 이론가로 꼽히는 이리가레, 엘렌 식수, 쥘리아 크리스테바 등은 모두 정신분석학과 언어학 등을 베이스로 해서 여성의 고유성을 이론화하려고 노력했다. 


이리가레의 이론은 ‘성차 (la difference sexuelle)’라는 개념을 특별히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여성도 남성과 다르지 않다’라는 문제 제기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1세대 여성주의와 달리 2세대 여성주의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와 고유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이리가레의 이론이 아주 특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이리가레의 저작들이 뒤늦게 미국에 소개되었을 때 이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리가레의 저서들이 소개된 당시, 미국의 여성주의 운동은 80년대 초 포르노 반대 운동을 둘러싼 논쟁과 레즈비언 논쟁을 거치며 70년대 경향에 대한 비판과 성찰의 분위기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또한 80년대는 70년대 여성주의 운동에서 성장해 나온 젠더(gender) 개념이 확고히 자리 잡힌 시기였다. 본래 ‘종류 (kind)’라는 의미에 가깝던 젠더는 20세기 들어 여성과 남성을 가리키는 학술용어로 쓰이기 시작했고 여성주의 운동의 물결과 함께 타고난 성(sex)과 구별되는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는 성이라는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런 젠더 개념은 70년대 말에 들어 상식으로 자리가 잡혔고, 80년대 다양한 분야에서 젠더 연구가 활성화되었다. 성역할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젠더 개념은 여성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제약들을 자연적 본성의 한계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제기하는 매우 유용한 근거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유한 성차를 강조하는 이리가레의 주장은 젠더 개념에 대립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80년대 미국 여성주의 진영에서 이리가레의 이론이 처음에는 레즈비어니즘에 가까운 것으로 해석되어 환영을 받다가, 곧 생물학적 본질주의라는 격렬한 비판을 받았던 것(황주영, 『뤼스 이리가레』)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본질주의 혹은 성차의 형이상학?

 

이리가레의 이론이 생물학적 본질주의라는 비판은 과도한 것이었지만, 그녀가 후기로 갈수록 성차를 모든 차이에 앞서 존재하는, 혹은 다른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ㆍ근본적인 차이로 제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성차의 형이상학이라고도 할 수 있을 이런 경향은 남성 중심적 사회ㆍ문화 질서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균열을 내는 비판적 이론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기존의 남성중심 철학과 다른 여성주의 철학을 만들어내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이런 이리가레의 입장은 보다 최근에 등장한 여성주의의 새로운 경향에 의해 여성 내부의 차이를 보지 않는 지나치게 양성애 중심적 이론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예컨대 90년대 들어 등장한 여성주의 운동의 세 번째 물결(third wave feminism)은 2세대 여성주의가 과도하게 백인 중산층 여성 중심이었다는 반성과 함께 여성이라는 일반성 속에서 또다시 억압받고 있는 차이와 균열을 드러내려 한다. 이런 차원에서 3세대 여성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이자 퀴어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는 이리가레가 남성중심적 질서에서 배제된 외부를 여성적인 것 일반과 동일시하면서 자신 역시 여성에 속하지 않는 다른 타자들을 배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황주영, 같은 책)


이리가레는 프로이트를 비롯한 남성 사상가들을 격렬히 비판하고 있지만 동시에 많은 부분 남성 사상가들의 개념들을 차용하고 있거나 의존하고 있기도 하다. 기본 베이스로 삼고 있는 프로이트, 라캉 뿐 아니라 성차의 존재론에서는 하이데거나 들뢰즈의 영향도 보인다. 사실 양성애 중심적이라는 비판은 이리가레의 이론이 프로이트-라캉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한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신분석학 자체가 성적 이분법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주의 형이상학을 지향하는 이리가레의 욕망 자체가 그녀가 비판하고 있는 남성적 합리주의, 즉 남근로고스주의적인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도 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저런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아직 전혀 힘을 잃지 않고 있는 남성중심 사상들에 대한 이리가레의 근본적 비판은 여전히 날카롭고 읽어볼 만하다.

 

 



 

 

하나이지 않은 성뤼스 이리가라이 저/이은민 역 | 동문선
성의 차별에 의해 채색된 담론과, 문화를 철학적으로 규명하려는 보다 진전된 연구의 결실인『스페쿨룸』간행 후에 저자에게 야기된 문제들을 재편성한 책이다. 정신분석의 틀을 통해 정신분석이 안고 있는 맹점을 비판하고, 소녀의 성장을 소년의 대칭으로 간주하는 헛점, 남성의 성기가 초월적인 기의(signified)로 고정되어 버린 정신분석의 담론 체계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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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정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다양한 사회활동 틈틈이 추리소설, 교양서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한 번 글을 썼다 하면 정해진 원고 분량를 훌쩍 넘기며, 수많은 고유명사를 흩날리고, 뒷부분으로 갈수록 말투가 경직되는 그는 진정한 90년대 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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