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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인간이 되려는” 외침

2006년 개봉작 <브이 포 벤데타>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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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의사당이 폭파되는 순간 시민들은 일제히 가면을 벗는다. 환한 불꽃에 비친 얼굴들은 저마다 다르다. 달라서 아름다운 것, 그것이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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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에는 열심히 일하고 주말엔 광장에서 구호를 외치는 게 일상이 되고 있다. 지척에서 들리는 목소리들에 귀를 막고 있는 한 사람 때문이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그 한 사람을 깨우쳐 민주시민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이 촛불집회의 엔딩일 수도 있겠구나.

 

집회에 참여하면서 한편의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2006년 개봉됐던 <브이 포 벤데타>다. 11월 5일 집회에서 한 발언자가 말했다. “오늘, 11월 5일은 <브이 포 벤데타>에 나왔던 그 날입니다.”

 

영화의 배경은 2040년 영국이다. 사람들의 생활은 평온한 듯 보이지만 철저하게 정부 통제를 받고 있다. 거리 곳곳에 CCTV 카메라와 도청ㆍ감청 장치가 설치돼 들숨 하나 날숨 하나까지 체크된다. 심야엔 통행금지로 거리에 인적이 끊긴다. 안전을 보장받는 대신 자유를 빼앗긴 사회다. 이 체제에 반항하는 자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고문당하고 죽임 당한다.

 

이 섬뜩한 사회에 어느 날 한 인물이 등장한다. 400년 전 의회 의사당을 폭파하려다 처형당한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쓴 남자(휴고 위빙)다. ‘V'라는 이니셜로 불리는 그는 뛰어난 무술 실력과 기상천외한 지략, 무엇보다 민주주의를 향한 투철한 신념으로 무장돼 있다. 그는 폭탄을 몸에 두르고 TV 방송국에 들어가 제작진을 위협한 뒤 무단 방송을 시작한다.

 

“이 나라는 단단히 잘못돼 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됐습니까. 누구의 잘못입니까. 물론 가장 큰 책임은 정부에 있고, 정부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든 장본인은 바로 방관한 여러분입니다.”

 

시민들은 왜 ‘이 지경이 되도록’ 방관한 걸까. 그건 두려움 때문이다. 전쟁, 테러, 질병, 동성애, 다른 피부색에 대한 두려움과 편견이 스스로들을 옭아매버렸다. V는 자신을 도와준 여성 에비(나탈리 포트만)를 은신처로 데려와 아침을 해준다. 에비는 자신이 먹던 버터가 정부 창고에서 훔쳐온 것이란 얘기에 “당신 정말 미쳤군요”라고 말한다. V는 대답한다.

 

“나는 그저 인간이 되려는 것뿐이오.”

 

셰익스피어 작품인 ‘맥베드’의 대사를 차용한 이 말이 영화의 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저 인간이 되려는 것”이란 무엇일까. 과연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까. 그 이유는 영화에 나와 있다.

“모두가 특별하다. 모두 영웅이고, 애인이며, 멍청이, 악당이다. 모두가 그들만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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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함께 모일 때 완전해지는 유적(類的) 존재다. 또 한편으론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다. 그 개별성, 독자성을 무시하는 체제는 오래 갈 수 없으며 오래 가서도 안 된다. 공허한 이념으로 자유와 개성을 억압하는 전체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많은 것들을 유보시킴으로써 작동해왔다. 경제 성장, 국가 안보, 사회 안정. “내일을 위해” 오늘의 부자유와 불편, 저임금을 감수해야 한다. 착한 국민들은 그 말에 현혹돼 하루하루를 참아왔다. 그러나 그토록 기다리던 내일은 결국 오지 않았다. 힘겨운 오늘만 되풀이됐다.

 

이 ‘내일 이데올로기’ 속에서 국가는 시민들의 희생을 요구했다. 30여 년 전 한 선배는 전방부대에서 병역을 마친 뒤 제대하면서 ‘내 자식 대(代)에는 군대 가는 일은 없겠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최근 두 아들을 군대에 보낸 다음에야 헛된 희망이었음을 깨달았다. “민정수석 아들은 ‘코너링이 좋아서’ 서울경찰청 운전병이 됐는데….” 힘없고 빽 없는 시민들의 삶에선 내일도 오늘과 다름없는 일들이 반복되는 게 한국이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 집회는 국정농락-헌정문란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됐다. 대통령 연설문 유출, 기업 모금을 통한 수상한 재단 형성, 최순실 씨 딸 정유라의 부정입학 같은 눈앞의 불의들이 시민들을 자각하게 하고 응집시켰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뿐이 아니었다.

 

올해 이어진 사건들을 보라. 홍만표, 최유정 변호사 전관(前官)범죄, 진경준 검사장 주식 뇌물, 교육부 관료의 “민중 개ㆍ돼지” 발언, 스폰서 부장검사…. 사건들은 한 곳을 향하고 있다. 한국 사회가 ‘돈과 권력이면 무엇이든 되는’ 사실상의 신분제 사회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이다. 헌법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마저 범단(범죄단체)과 다름없는 이들과 어울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도록 한 사실에서 시민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2016년은 한국 사회의 부정과 부패들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 시민들은 대통령과 함께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하야를 요구하고 있다. 목표는 “그저 인간이 되려는 것”이다. 빈부의 격차와 신분의 차이를 넘어 평등한 권리를 지닌 ‘내 삶의 주권자’임을 확인 받으려는 외침이다. 그래서 박정희식 구체제의 상징인 박 대통령이 물러나는 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V가 방송을 통해 “집결하자”고 촉구한 11월 5일 밤, 수많은 시민들이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의회 의사당 앞으로 모여든다. 의사당 앞을 지키던 군 병력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겨누지만 시민들의 물결 앞에 맥없이 무너진다. 의회 의사당이 폭파되는 순간 시민들은 일제히 가면을 벗는다. 환한 불꽃에 비친 얼굴들은 저마다 다르다. 달라서 아름다운 것, 그것이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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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부터 연재한 <권석천의 무간도>가 이번 회를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재밌게 읽어주신 <채널예스>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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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권석천(중앙일보 논설위원)

1990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2007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법조팀장,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앞에 놓인 길을 쉬지 않고 걷다 보니 25년을 기자로 살았다. 2015년에 <정의를 부탁해>를 출간했다. 이번 생에는 글 쓰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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