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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아니면 강낭콩'인 세상

마음들이 계속 모인다면 하나 둘씩 시스템이 나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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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 사회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대통령이 퇴진하고, 최씨 일당이 재판에 넘겨지더라도 변하는 건 별로 없을 것이다. “돈이 실력이고 부모를 원망해야 하는” 상황은 계속될 것이다. 그래도 대통령이 무능과 부패를 책임지고 최씨 일당이 죄의 대가를 제대로 받는 것만으로 중요한 변화의 계기는 마련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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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인 더스트>는 현대판 서부극이자 자본주의의 우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등장인물들이 심드렁하게 내뱉는 말들이 황량한 풍경과 함께 과녁에 꽂힌다. 한국 사회도 비정한 서부로 변하고 있는 것일까.

 

영화는 시작부터 토비(크리스 파인)와 그의 형 태너(벤 포스터), 두 형제의 은행 강도 장면을 보여준다. 얼굴에 복면을 뒤집어쓴 형제는 후미진 소규모 지점에 들이닥쳐 권총으로 위협한 뒤 푼돈들을 챙겨온다. 다발에 묶인 100달러 짜리 지폐들은 추적당할 위험이 있다.

 

형제가 강도 행각에 나선 이유는 어머니의 유산인 농장 소유권이 은행에 넘어갈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차분하고 이성적인 토비는 이혼한 아내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농장을 주고 싶다.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태너는 10년간 교도소 생활을 한 전과자. 동생 토비의 부탁으로 은행 강도에 나선다. 범행은 번번이 성공하지만 이들을 좇는 사람이 있다. 정년퇴직을 앞둔 베테랑 형사 해밀턴(제프 브리지스)이다. 해밀턴은 오랜 경험에서 단련된 후각으로 추적에 들어간다.

 

다음 범행이 일어날 장소로 한 은행 지점을 점 찍은 해밀턴은 동료 형사 알베르토(질 버밍험)과 함께 잠복근무를 한다. 끼니를 때우러 들어간 식당에서 나이든 웨이트리스가 말한다.

 

“뭐 먹기 싫어? 내가 여기에서 44년 동안 일했는데, 티본 스테이크와 구운 감자 말고 다른 걸 주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딱 한 명, 1987년 어떤 녀석이 송어를 주문했는데 빌어먹을 송어 같은 건 여기 없어. 당신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옥수수 아니면 강낭콩.”

 

선택권은 있지만 무엇을 선택하지 않을 것인지만 선택할 수 있다. 선택을 하라면서 선택할 메뉴가 없다. 고를 수 있는 건 오직 옥수수냐, 강낭콩이냐다. 흙수저든, 은수저든, 금수저든 태어난 대로, 주어진 대로 그냥 살아가야 한다는 듯. 

 

아들을 찾아가 “우리처럼 되지 마라. 넌 다르게 살라”는 토비의 충고와 범행 대상(은행 지점)을 변경하면서 “패턴은 어디든 같다”고 하는 태너의 말이 오버랩된다. 다르게 살라고 하지만 어디를 가도 다를 게 없다. 생(生)의 막다른 골목에서 동생을 위해 스스로 경찰의 사냥감이 되기로 한 형 태너를 보낸 뒤 차를 몰고 가던 토비는 경찰 검문을 받는다. 그는 “왜 이 길로 가느냐”는 경찰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이 길 밖에 없어서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은퇴한 형사 해밀턴이 토비를 찾아와 묻는다. 해밀턴에겐 토비가 주범이란 심증만 있을 뿐 증거는 없다. 인간은 알고 싶은 건 참지 못하는 동물이다.

 

“(은행 강도를 한) 이유가 뭔가? 나를 납득시켜주게.”
“난 평생 가난하게 살았어요. 가난은 전염병 같아서 대를 이어가며 가족 전부를 괴롭히죠. 하지만 내 아이들은 안 돼요. 더는 안 돼요.”

 

자자손손 같은 메뉴만 먹어야 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싶다는 것이다. 그나마 있는 것마저 수탈해가는 빈익빈부익부의 세계에서 아이들만은 해방시켜주고 싶다는 것이다. 평범한 시민이었던 토비가 범죄자가 되기로 결심을 굳힌 건 어머니가 죽음으로 가난과 질병에서 가까스로 ‘해방’되는 모습을 지켜본 다음이었다.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있는 우리 부모 가지고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고. 돈도 실력이야.”

 

대통령의 측근 최순실 씨 딸 정유라가 SNS에 올린 이 말이 왜 거센 분노를 일으킨 걸까. 돈으로 실력을 사는 걸 자랑스럽게, 뻔뻔하게 얘기했다는 이유만일까. 정유라가 한국 사회를 정확히 드러냈기 때문은 아닐까. 돈이 실력인 사회라는, 공공연한 비밀을 발설함으로써 ‘안 그래도 쓰리고 아픈 마음들’을 건드렸던 것이다.

 

두 형제와 두 형사가 쫓고 쫓기는 영화에서 진짜 악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형제도, 형사들도 상황의 참여자 내지 피해자다. 악인은 형제의 어머니를 “근근이 먹고 살게 하다가 땅을 뺏어버리는” 역모기지상품을 운영한 은행, 금융자본주의다. “거래 즐거웠습니다.” 선량한 얼굴의 은행 직원을 대리인으로 내세운 시스템이 “지옥에 있든, 파도가 몰아치든(hell or high water?영화 원제)” 돈을 갚도록 하고, 은행 강도를 하도록 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패턴은 반복된다.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대통령이 퇴진하고, 최씨 일당이 재판에 넘겨지더라도 변하는 건 별로 없을 것이다. “돈이 실력이고 부모를 원망해야 하는” 상황은 계속될 것이다. 그래도 대통령이 무능과 부패를 책임지고 최씨 일당이 죄의 대가를 제대로 받는 것만으로 중요한 변화의 계기는 마련될 것이라 믿는다.

 

지난 토요일 오후 광화문광장에 섰을 때, 광장 뒤편에 ‘박근혜 퇴진 이후 우리가 바라는 사회?’라고 적힌 설치물이 있었다. 거기엔 시민들이 적은 포스트잇들이 붙어 있었다. ‘노력한대로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사회’ ‘청년들이 취업 걱정하지 않는 나라!’ ‘국민을 위한 정치, 통일을 위한 정치’ ‘비정규직 없는 세상’ ‘북유럽식 선진복지 국가, 다문화 모범국가’ ‘모두에게 창피하지 않는 투명한 국가’…. 진실한 염원들이 100만의 촛불로 불야성을 이루게 했다.

 

그 마음들이 계속 모인다면 하나 둘씩 시스템이 나아지지 않을까. 최소한 돈이 전부인 세상, 선택지가 ‘옥수수 아니면 강낭콩’ 뿐인 세상에선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그날 밤 나는 그런 꿈 하나를 품고 촛불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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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권석천(중앙일보 논설위원)

1990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2007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법조팀장,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앞에 놓인 길을 쉬지 않고 걷다 보니 25년을 기자로 살았다. 2015년에 <정의를 부탁해>를 출간했다. 이번 생에는 글 쓰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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