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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때 아프기로 해

노안 이후 비로소 보이는 문장 김사인 『시를 어루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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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보톡스가 ‘詩’라는 것을 공주님이 알았더라면, 백 방의 주사를 맞고 일곱 시간 동안 깊은 잠에 빠지지 않아도 됐을 텐데 쯔쯧하고 혀도 한 번 차보는 것이다.

노비 문장(안 이후 로소 보이는 문장)

 

詩集을 사는 일은/ 즐겁다/ 그 중에서도 아이들 책을 사다가/ 모르는 이의 / 불꽃 같은 詩 가 있는/詩集을 /덤으로 사는 일은 즐겁다

『시를 어루만지다』, 김사인 지음, 96쪽, 윤석위 <詩集>

 


1.


두어 번 뵌 적이 있는 젊은 성직자에게 문자가 한 통 왔다, “가을이 오니 한번 뵙고 싶어요. 점심 식사 어떠세요?“ 그의 교당이 있는 용산에서 점심을 하기로 했다. 지난 봄,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됐고, 그는 내 회사에 제법 규모가 큰 교단의 힐링 캠프를 의뢰했으나 진행 과정에서 갑자기 기존의 업체를 바꿀 수 없다는 내부 결정을 통보한 이후의 첫 재회인 셈이었다.

 

용산으로 가는 강변북로는 꽤 막혔다. 차 안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무슨 일일까? 내년도 행사를 의논하려고 하나? 그러고 보니 한창 사업계획서를 쓸 시기이군,

 

오후에 지방으로 출장을 간다며 양 손에 큰 가방 두 개를 가지고 나타난 그와 점심을 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카페에 마주 앉았다. 앳된 청년의 얼굴이 단정한 셔츠로 인해 더 도드라져 보인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삼십 대의 노련함 대신 투명한 순진함이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은 실제 성직자의 환경 때문인지, 혹은 성직자를 보는 내 편견 때문인지는 알 수 없겠으나, 분명 그 오전의 카페에서 그는 내 눈에 그리 보였고 나는 가만히 차를 마시며 이 만남의 용건이 그의 입에서 꺼내지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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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이런 분위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두 가지를 의논 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의논이라기 보다 조언을 듣고 싶다고 했다. 어찌 보면 개인적인 일이라 느닷없는 만남에의 제의가 주저되었으나, 지난 봄 이후 계속 생각이 나서 뵙고 싶었다는 말도 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 두 가지, 그의 고민을 이야기 했다. 모두 자신이 하고 있는 교단의 일과 관련된 것이었다. 하나는 시국기도회를 어떻게 대중적인 참여를 끌어올리며 이어갈 수 있는지, 또 하나는 청소년 포교 사업을 좀더 흥미 있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그러면서 고민이 시작된 배경을 길게 설명했다.


비록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 만남이 내 비즈니스와 관련이 없다는 것에 나는 맥이 빠졌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어의 없었다. 내가 이 교단과 관련 있는 사람도 아니고, 심지어 내가 이쪽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것을 다 떠나서 자기 고민을 말하기 위해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이 바쁜 시간에 이리 불러내도 되는 것인지 나는 의아했고 다소는 불쾌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그의 말을 허투로 듣고 있었던 것도 같다.


내 속내와는 아랑곳없이 그는 두 눈을 반짝이며 진지하게 자기의 사변을 늘어놓았다. 중간중간, 이런 이야기를 위해 뵙자고 한 것이 죄송하다는 말을 놓치지 않으며, 그는 그 어떤 삿됨이나 탁함도 없이 자기의 사연을 털어놓고 나에게 의견을 묻고 있었다. 의도하지 않은 일이 벌어져서 당황했지만, 의도한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았기에 생길 수 있는 반전의 감각이 바로 그때 내 안에서 꿈틀대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단박에 이 상황이 좋아졌다. 반짝하고 빛나는 사금파리를 발견한 것처럼 내 앞에서 자기 말에 몰입돼있는 이 성직자가 그렇게 순수해 보이기 시작했다.


돈 버는 일과 관련이 없으면 어때?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목적으로만 만나야 하는 건 아니잖아? 이렇게 차를 마시면서 자기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거지. 세 번째 만남에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세번 째 만남에도 자기 마음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하고 고마운 것 아닌가?


그 이후 나는 진지해졌고, 그의 고민에 같이 동참했고,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내놓으며 토론했다. 밥을 대접하고 싶어 밥집을 갔다. 따뜻한 밥과 국을 먹으며 그는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하여, 꿈에 대하여 이야기 했고,  나는 잘 모르는 우주를 향해 아득하지만 아늑한 비행을 하는 기분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 내 머릿속에는 시 한 편이 써지고 있었다.

 

 

그때 그때 아프기로 해

 

살아간다는 건
잘 걷다 돌부리에 넘어지는 어린애처럼
무시로
배신의 돌, 영문 모를 돌, 느닷없는 돌, 믿었던 돌들을 만나는 것
놀라고 주저앉고 바닥에 엎어져
한참을 울고
며칠을 아파 하는 것

 

그럴 때마다 마음에 벽돌 하나씩 두르고
세상은 그런 거야
인간은 그런 거야
사랑은 그런 거야
믿음 따위 개나 주는 거야
아프지 않기 위해
인간에 대한 기대도 하지 않기
예감이 이상하면 먼저 자르기

 

그런데 이상하지
벽돌이 쌓여
마음은 단단해지는데
안전한 만큼 설레지 않아
편안한 만큼 묻고 싶은 것도 없어
평화로운데 재미가 없어

 

당신은 당신대로
나는 나대로 그리하여

 

그때그때 아프기로 해
반복의 배고픔처럼 아프기로 해
아플 때는 아프기로 해
죽을 때까지 아프기로 해
살아있는 증거로 아프기로 해
 
사람에게 평생 설레기로 해

 

 

2.

 

시를 좋아한다. 시 읽기를 좋아하고 간혹 부끄러운 끄적거림도 사랑하며 시인과 술 마시는 것을 지복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시 선집을 즐겨 읽는데, 한 명의 시인이 쓴 단일 시집을 읽는 것이 바다 속을 다이빙 하는 깊은 즐거움이라면  시 선집은 스노쿨링처럼 가볍게 다양한 시들을 만나는 재미가 있어 좋다. 특히 안도현, 김용택, 나희덕, 도종환, 정호승 씨와 같은 시신(詩神)들의 시평은 주인공 시 보다 때로 더 큰 찬탄과 감동을 주기도 하는데, 정끝별과 문태준이 해설을 맡고, 민음사에서 편찬한,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1, 2』는 개인적으로 꼽는 최고의 시 선집이다.


특히 내가 즐기는 나만의 시 읽기 방식은, 시를 읽고 페이지 여분의 공백에 시적 감동과 내가 받은 시인의 메시지를 메모하는 것인데, 그것은 몰입적 시 읽기에도 큰 도움이 될 뿐 더러, 천천히 시를 씹어먹고, 반복해서 되새김할 수 있어서 참 좋다. 덕분에 새 시집 안쪽은 늘 연필심으로 촘촘하게 짜인 거미줄 꼴이 되고는 한다. 무엇보다 나의 메모 이후 대가의 시 해설을 읽게 되었을 때 같은 느낌이면 더 반갑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더 흥분되니 오래도록 나의 이런 시 읽기 방식은 계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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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대개의 시선집들이 다루는 시들이 유명한 시인들의 익숙한 시들이다 보니 비록 해설자에 따라 다른 시감(詩感)으로 차별된다고 해도 여기서 본 시를 저기서 보고, 저기서 본 시를 또 다른 책에서도 만나게 되는 중첩성이다. 좋은 시는 아무리 읽어도 좋지만 그래도 아무 기대 없이 들어간 극장에서 대박의 영화를 만나는 기쁨을 시집에서도 가져보고 싶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김사인의 『시를 어루만지다』는 시문학계 전면에서 이미 크게 이름을 날리고 있는 시인들은 다른 지면에 양보하고 의도적으로 덜 알려지고 덜 드러난 시들을 선정한 것이 무엇보다 신선하다. 그것은 노비 문장에 소개된 윤석위의 「시집」이라는 시처럼 모르는 이의 불꽃 같은 삶과 사랑과 인생을 만나는 즐거움이자 감동이다. 게다가 김사인의 따뜻하면서 예리하고, 대범하면서 세심한 감수성은 이 책에서 어루만지게 되는 또 다른 시들이다. 무엇보다 그가 시를 섬기고 받드는 제주(祭主)의 자세가 처음부터 끝까지 흐트러짐 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참 좋다. 이 책이 성취한 가장 큰 미덕은, 선정된 시들이 내뿜는 긴장감과 함께 이 시를 선정하고 그 시 앞에 무릎 꿇은 자의 태도적 긴장감이다.


 

3.


상식과 질서가 주술에 빠져버린 기묘한 시절이다. 상실과 허탈감에 가슴이 뻥 뚫린 무중력의 시간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말처럼 이 또한 어김없이 지나갈 것이다. 다만 남은 것은 각자에게 남은 감정의 딱지들이다. 의심, 혐오, 방어, 단정, 체념, 외면, 무감각 등의 딱지들. 그리고 이것은 한 시절, 한 사건만의 딱지들이 아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사건을 겪고, 더 많은 밥을 먹게 되면서, 우리는 되풀이해서 이런 딱지를 만들고 더 단단해지며 덕분에 덜 방황하고 덜 아파한다. 무뎌진 감수성 대신 우리는 편안함을 얻는다.

 

그러나 인간이 정말 늙는다는 것은, 신체의 노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늘 생각한다. 감성이 죽었을 때, 인간은 늙은 것이라고, 나는 늘 주문한다. 사람에 대해, 시대에 대해, 늘 그때 그때 아파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 대가로 새로움 앞에서 또 다시 설렐 수 있는 것, 나는 이것이 정녕 살아있는 것들의 특권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시(詩)다. 감성의 노화 방지에는 시가 최고인 것이다. 중년의 보톡스가 ‘詩’라는 것을 공주님이 알았더라면, 백 방의 주사를 맞고 일곱 시간 동안 깊은 잠에 빠지지 않아도 됐을 텐데 쯔쯧하고 혀도 한 번 차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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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용인(<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저자, 노매드 대표이사)

<딴지일보> 편집장을 거쳐 현재 노매드 힐링트래블 대표를 맡고 있으며, 심리에세이 《어른의 발견》,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 《사장의 본심》, 《남편의 본심》, 여행서 <<시가 있는 여행> <발리> 등의 책을 썼다. 또한 주요 매체들에 ‘윤용인의 심리 사우나’, ‘아저씨 가라사대’, ‘남편들의 이구동성’ 등 주로 중년 남성들의 심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칼럼을 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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