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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지옥

조혜은의 두 번째 시집 『신부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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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라는 지옥을, 사랑이라는 감옥으로부터 다시 그것을 파괴하고 재구성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지옥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계속 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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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란 지옥이라고 사르트르는 말했다. 나(주체)를 만드는 것이면서 파괴하는 것. 이 끝없는 주체와 타자의 투쟁, 그리고 자리바꿈이 바로 인식의 과정이고 삶의 양태이다. 시라는 양식은 이 과정을 통해 인식의 자리를 넓히고, 새로운 지평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양식이다. 그렇기에 시가 그리는 ‘나’는 ‘나’이면서 ‘나’가 아니고, 그것은 시가 그리는 ‘타자’역시 그러하다. 바로 이 주체와 타자 간의 관계를 가장 밀접하게 그려낼 수 있는 양식이 바로 시라고, 나는 생각한다.

 

조혜은의 두 번째 시집 『신부 수첩』은 이 타자라는 지옥을 매우 선명하고도 일관된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우리가 사랑을 해야지. 성실한 당신의 가슴과 적합한 나의 가슴이 네모난 비닐종이 안에서 썩고 부패하여 미끄러지듯 만날 때. 유통될 기한을 잃어버린 채 네모난 식탁 위에 버려진 견과류의 모양으로. 우리는 사랑을 해야지. 성급하게 마르고 오래되어 버려진 나의 가슴 위로, 사랑을 해야지. 오롯이 솟은 짙은 유두를 당신의 가슴에 매일 박아 넣을 때, 사랑을 해야지. 네모난 방의 모서리를 따라 습관처럼 번지는 곰팡이는 맛을 가졌으면 좋겠어.

-「미식가들2」 부분

 

“우리가 사랑을 해야지”라는 문장은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랑은 ‘당신’과 ‘나’의 가슴이 비닐 종이 안에서 썩고 부패하는 사랑이고, 유통될 기한을 잃어버린 사랑이다. 이 사랑은 삶에 짓눌리고 찌그러진 사랑이다. ‘네모난 비닐 종이’, ‘유통될 기한을 잃어버린 견과류’, ‘네모난 방의 모서리를 따라 습관처럼 번지는 곰팡이’등, 일상을 환기시키는 여러 남루한 이미지들과 함께, 이 시의 사랑은 기쁨의 빛이 아니라, 살을 짓누르는 무거운 고통이 되는 것이다.

 

아울러 시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사랑을 해야지”라는 문장은 ‘나’가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암시하는 한편, 이 고통을 어떻게든 받아들이고 싶지만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곤경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벗어날 수 없는 사랑, 벗어날 수 없는 고통. 벗어날 수 없기에 고통스러운 그 사랑 속에서 시인은 끊임없이 고통을 마주하고 그것에 대해 고백한다. 『신부 수첩』은 이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을 일관되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은 ‘가족’이라는 관계의 형태로 수렴되어 드러난다.

 

나는 몸통을 잃는다.

 

너의 사랑은 기형적이었고 일그러진 형태로 바닷에 짓뭉개져 있었다. 너는 너를 사랑하기 위해서 내 발목을 잡거나 내 코를 잘라내거나 망치로 내 손가락을 때려 하나씩 뜯어냈다. (중략) 그런 너에게 결혼이란 참으로 합리적인 제도였다. 그곳에서 너는 어떤 처벌도 사랑이란 말로 무마하며 결코 나와는 행복하지 않았다.

-「가정」 부분

 

이 시 속의 ‘나’는 사랑이라는 형식에 의해, 결혼으로 성립되는 가정이라는 제도로 인해 끊임없는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나’가 잃어버린 ‘몸통’이란 그 자신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억압 속에서 ‘나’는 점차 나의 자리를 잃어버린다. ‘타자’에 의해, 관계에 의해 ‘나’는 사라지며, 이렇게 타자라는 지옥에 의해 ‘나’는 파괴된다.  그러나 『신부 수첩』은 그저 ‘나’의 파괴를 전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 시집은 고통을 그리면서 나아가 그것을 다시 잃어버린 ‘주체’를 ‘타자’로서 두고 바라보는 묘한 시선을 통해 이 폐색된 상태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너무 슬픈 것 같아.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짓밟힌 낯선 얼굴로 네가 말했다. 어제의 문장에 머무르지 않아. 내가 말했지. 일찍 밤이 찾아오거나 혹은 영원히 밤 같은, 밤의 의미가 상실된 도시에서. (중략) 우리는 끝이 나야 해. 너는 끝없는 여행을, 나는. 또 다른 나를. 너에게 나는 그리운 말이었다. 나는 매일 밤 나를 흉내 냈다. 관광지에서. 우리가 서로 멀어지다가 우연히 만나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길. 겹쳐진 많은 날들이 날 선 문장을 선물하고. 우리는 걷고 있었다.
관광지가 되는 건 너무 슬픈 것 같아. 사랑은 질병 같았다.

-「관광지-우리」 부분

 

슬픔으로 가득한 이 시집에서도 가장 슬픈 시편 가운데 하나다. 이 시는 ‘나’를 바라보는 두 시선이 서로 얽혀 있다. 한 편에는 자신을 ‘관광지’가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이 고통을 전시하고자 하는 태도가 있으며, 다른 편에는 다시 ‘관광지’가 된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을 만듦으로써, 타자화 되어버린 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얽어매는 이 가족이라는 지옥 속에서, 그로부터 한 발짝 벗어나 다시 그것을 관조하는 일을 통해, ‘나’는 고통의 자리를 이겨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가 타자에 의해 ‘타자’의 자리로 전락했을 때, ‘나’가 해야 하는 일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내가 서 있는 자리, 내가 전락한 자리를 응시하고 드러냄으로써, 다시금 주체의 자리를 획득하는 것. 『신부 수첩』은 고통을 전시하거나 거기에 사로잡힌 시집을 읽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이것은 타자라는 지옥을, 사랑이라는 감옥으로부터 다시 그것을 파괴하고 재구성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지옥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계속 살고자 한다.


 

 

신부 수첩조혜은 저 | 중앙북스(books)
이 시집에서 시인은 ‘사랑의 폭력성’을 테마로 하여 불행을 응시하는 눈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이 사랑을 모독하고 질식시키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 장면의 배우이자 관객인 시인의 조각난 내면의 음악들은 전곡 반복으로 설정된 플레이어에 걸려 재생되듯 독자의 귀를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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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인찬(시인)

시인. 시집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 『사랑을 위한 되풀이』와 산문집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 등을 썼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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