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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정>, 본능이, 마음이 말하는 순간 ‘지금!’

“지금!”은 누구 편에 설지, 누구에게 총구를 겨눌지 정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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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은 승리에 대한 확고부동한 전망에서 나오지 않는다. 마음의 빚, 마음에 생긴 작은 균열, 숨져간 친구가 남긴 “발가락의 가벼움”에 대한 부끄러움 같은 것들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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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우리가 만난 지 36년이 됐구나!”

 

얼마 전 중학교 동창들과 저녁자리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36년. 일제 강점기 36년도 그렇게 길지도, 그렇게 짧지도 않았구나,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 36년 동안 어떤 자는 줄기차게 친일을 했고, 어떤 자는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했고, 어떤 자는 독립운동에서 친일로 투항했다. 친일이냐, 독립운동이냐가 온전히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맡겨진 때였다. 영화 <밀정>은 마음의 빛과 그림자가 복잡하게 엇갈렸던 그 시대를 다루고 있다. 그 시대를 규정한 의심은 영화 첫 장면,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이정출(송강호)의 입에서 나온다.

 

“넌 이 나라가 독립될 거 같냐? 어차피 기울어진 배야!”

 

이정출이 임시정부에서 함께 활동했던 친구에게 투항을 종용하지만 친구는 총탄에 잘려나간 발가락을 남긴 채 자결한다. 이후 의열단의 뒤를 캐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은 이정출은 의열단 리더 김우진(공유)에게 접근한다. 의열단 단장 정채산(이병헌)은 김우진에게 “적의 첩자를 역으로 우리의 첩자로 만들자. 그 자(이정출)가 지닌 마음의 빚을 열어주자”고 말한다.

 

김우진에 이끌려 정채산을 만난 다음부터 이정출의 고민은 시작된다. 안정된 삶을 지속할 것인가. 마음의 움직임에 운명을 맡길 것인가. 이정출은 “당신 이름을 어느 역사 위에 올리겠느냐”는 정채산의 물음을 가능하면 회피하고 싶다. 그는 두 가지 선택지의 중간쯤에서 적당히 자신이 설 자리를 찾으려 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선택의 시간은 오고야 만다. 의열단원들이 폭탄을 가지고 경성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이정출과 동료 일본 경찰 하시모토, 김우진 세 사람이 마주친다. 이정출과 김우진이 함께 앉아 있는 식당 칸에 하시모토가 들어선 것이다. 이정출은 두 사람에게 말한다.

 

“잘 들어. 자칫 하다간 여기서 다 죽어.”

 

하시모토가 답한다.


“그건 누가 먼저 상대를 제압하느냐에 따른 거겠죠. 생각 잘 하십쇼.”

 

순간 김우진이 외친다.


“지금!”

 

숨 막히는 긴장이 깨지고 총구에서 불꽃이 튀긴다. 나는 그 장면에서 정채산이 이정출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나라 잃은 군인이요. 도망자 신세로 떠돌아다니면서 내가 가장 자신 있게 익힌 거라곤 사람에 대한 동물적 경계입니다. 누가 내 편이 돼줄지, 누가 내 목숨을 이어줄지를 내 본능에 의해서 결정하는 거죠.”

 

이정출에겐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의열단을 일망타진하려고 김우진을 포섭하는 중이었다”고 둘러댈 수도 있었고, 김우진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총구는 하시모토를 향했다. 그것은 복잡한 수식을 거쳐 나온 결론이 아니었다. 이정출의 총구 방향을 정한 건 ‘본능’이었다.

 

“지금!”은 어디에 이름을 올릴지, 누구 편에 설지, 누구에게 총구를 겨눌지 정해야 할 때다. 순간의 선택은 결국 본능일 수밖에 없고, 직관일 수밖에 없고, 진실한 마음일 수밖에 없다. 그 밑바닥엔 신념이 있다. “사람 말을 믿지 않고, 내가 한 말 조차 믿지 못하지만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믿을 뿐”(정채산)인 신념, 그 신념에 따라 ‘내 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신념은 승리에 대한 확고부동한 전망에서 나오지 않는다. 마음의 빚, 마음에 생긴 작은 균열, 숨져간 친구가 남긴 “발가락의 가벼움”에 대한 부끄러움 같은 것들에서 나온다. 의열단이 던진 폭탄도 일본인, 친일파 몇몇의 살상이 아니라 동포들의 안온한 삶을 흔들어 마음의 움직임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 아니었을까. “우리는 계속 싸우고 있다”(영화 <암살>)는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 아니었을까.

 

지금도 그 떨림, 그 마음의 움직임들은 계속되고 있다. 방송사 해직 기자, PD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독립된 나라에서 독립운동 하듯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불행한 일이다. 그중 이제 마흔여덟이 된 한 기자는 암과 투병하고 있다.

 

그들에게도 “지금!”이란 목소리가 들린 순간이 있었다. 10년, 20년 넘게 취재 현장을 뛰어다닌 본능으로 어떤 선택을 했다면, 더욱이 그 결과로 ‘나라 잃은 군인’과 다름없는 고통의 시간을 감내하고 있다면 분명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선택한 길을 존중한다. 그들이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끝까지 걸어가기를 희망한다. 한 사람의 동료로서 부디 병과 싸워 이겨내기를 기도한다. 

 

2016년, 나는, 그리고 당신은 정채산일 수 있고, 김우진일 수 있고, 이정출일 수 있고, 얼굴 없는 밀고자일 수 있다. 바로 이 순간, “지금!”이란 외침이 들려온다면 어떤 본능에 몸을 맡길 것인가. 영화는 그것을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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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권석천(중앙일보 논설위원)

1990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2007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법조팀장,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앞에 놓인 길을 쉬지 않고 걷다 보니 25년을 기자로 살았다. 2015년에 <정의를 부탁해>를 출간했다. 이번 생에는 글 쓰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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