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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희 “한동안 잊은 노래, 행복하다”

미국에서 성사된 우연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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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노래 가사들이) 다 겪은 얘기는 아니죠. 경험하고 체험한 일로만 노래를 만들 수 없는 일이고. 겪은 것도 있지만 당시 저는 '환상을 그린다!'는 의도는 분명 있었어요. 해보지는 않았지만 하고 싶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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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한국 포크의 천재적 인물'이자 '싱어 송 라이터의 선구자'로 통하는 전설 이장희를 미국에서 7월 30일에 만났다. 전혀 사전에 약속 없이 우연한 기회에 로스앤젤레스의 쉐라톤호텔 인근 업소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된 그는 “좋은 (대화) 자리가 될 것 같아서 나왔다”고 했다. “1년에 반은 울릉도, 반은 LA에 있는 셈입니다. 건강은 괜찮습니다!” 1947년생이니 그는 올해로 우리 나이 70세다.

 

이장희는 64세인 2010년 12월 TV 프로그램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화제를 모으면서 새로운 세대에게도 인지도를 높였다. 그 뒤 '쎄시봉' 열풍의 한 축이 되어 단독 무대를 비롯한 여러 공연으로 돌아왔다. “오늘 나눈 얘기를 인터뷰로 엮어도 될까요?”하는 질문에 “알아서 하시라”며 껄껄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의 웃음은 호쾌했다. 자리에는 전성기 시절 이장희가 발탁한 가수이자 호원대 교수인 정원영씨도 함께 했다

 

오랫동안 가수로서 사실상 은퇴상태였다가 2010년 12월 <황금어장> 출연을 계기로 무대 활동을 재개하고 계십니다. 기분이 어떠신가요.


사실 <황금어장>은 할 수 없이 나갔어요. 그런데 생각한 이상으로 관심을 끌게 되면서 <쎄시봉>도 나가게 되고 순회공연도 하게 되고…. 한동안 멀어져 있었는데 노래하는 기분이 좋아요. 노래를 잊었다가 다시 찾았다고 할까요. 행복합니다.

 

가장 가까운 시기의 공연은 언제로 잡혀 있나요.


오는 9월18일 세종문화회관에서 하는 <쎄시봉> 공연입니다. (조)영남이 형 자리를 제가 맡는다고 할까요. 윤형주, 김세환과 함께 합니다.

 

울릉도든 로스앤젤레스든 여건이 수월하지는 않겠지만 TV에 좀 더 나와 주었으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 마음이 같지는 않겠지만 매스컴에 자주 나오면 그다지 호의의 시선은 아니지 않나요? 저 같이 안 나왔던 사람이 얼굴을 비추면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정도가 좋지요.

 

리즈 시절로 돌아가서요, 그때 어른들이 어쩌면 '반항과 불량'으로 인식했을 '가죽 재킷' '오토바이', '담배' 그리고 결정적으로 '콧수염' 등 삐딱한 이미지가 이장희 트레이드마크였습니다. 그래서 젊음은 더 끌렸다고 봅니다. 20대 중후반 한창 젊었던 나이였는데 그런 도발적 상징들을 낳은 당시의 선생님의 의향 혹은 태도가 궁금합니다.


콧수염 같은 경우는 상처도 있어서 가리려는 의도도 있었고...너무 알아보니까 나중에는 밀어버렸죠. 글쎄요, 그때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혼잣말로 크게 웃으며) 그때 나이에는 그게 좋아 보였나.

 

이미지만 그런 게 아니라 노래도 당시 기준으로서는 도발적 충격적이었다. 문어체와 운율이 노래 가사의 일반 프레임이었던 시절, 이장희의 빅 히트송인 「그건 너」, 「한 잔의 추억」,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자정이 훨씬 넘었네」, 「한 소녀가 울고 있네」 등은 마치 친구들끼리의 자유로운 발설이라 할, 그래서 가깝고 또 경이롭기까지 한 구어체 언어의 랜덤 전개였다. 그리고 그 모든 곡은 이장희 스스로가 일궈낸 것들이었다. 외국 곡 번안이 일색이던 시절이었기에 그런 자작(自作)의 독립 스탠스는 더욱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아마 대중적 차원의 국내 최초의 싱어 송 라이터는 그였을 것이다. 천재적 상상이나 진한 경험의 산물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이 언어들이 풀어져 나온 배경이 궁금했다.

 

「그 애와 나랑은」이 공식 데뷔곡인 것은 맞나요. '그 애가 웃으면 덩달아 웃었네/ 그 애가 슬프면 둘이서 울었네/ 그 애와 나랑은 사랑을 했다네/ 하지만 그 애는 지금은 없다네/ 그 애의 이름은 말할 수 없다네' 가사가 그렇지요. 이 노래만이 아니라 상당수 이장희의 노래는 꾸며낸 게 아니라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1972년 <영 페스티벌>이란 타이틀의 첫 앨범에 실려 있고 이 곡이 라디오 전파를 많이 탔으니까 데뷔곡이라고 할 수 있지요. 더러 사람들이 제 곡들에 대해 궁금해 해요. '어떻게 그런 가사를 썼나?' (제 노래 가사들이) 다 겪은 얘기는 아니죠. 경험하고 체험한 일로만 노래를 만들 수 없는 일이고. 겪은 것도 있지만 당시 저는 '환상을 그린다!'는 의도는 분명 있었어요. 해보지는 않았지만 하고 싶은 것들.
 

돌이켜 보면 이장희의 노랫말은 격식과 틀에 대한 통렬한 비웃음, 청춘의 스트레이트한 자세와 순수 그리고 사랑과 일상의 가치를 일러주는 대단한 언어였어요.


'내가 어떻게 그런 가사를 썼지?' 제 음악을 사랑해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끔 들으면 저도 놀랍니다. ('가사가 마구 쏟아지듯 나왔나 보네요' 하니까) 그래요, 그런가 봐요. 지금은 도저히 못 쓸 것 같아요.

 

막 활동 시작할 무렵이 국내에 자작곡 흐름이 막 개화한 시기이기도 했는데요. 이른바 싱어 송 라이터 문화의 선두셨지요. 작곡 교육을 받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곡을 쓰게 된 건가요?


주변의 음악가가 다들 외국 노래 번안 곡에 집착하고 있을 때였지요. 외국음악을 동경하던 시기였으니까요. 특히 나나 무스쿠리의 곡(「Me t'aspro mou mantili」)을 번안한 트윈폴리오의 「하얀 손수건」이 공전의 히트를 치고 송창식 윤형주(47년 생으로 이장희 동갑이다)이 스타덤에 오르면서 번안 풍토가 확고해졌지요. 그들과 같이 다니며 어울리다가 '우리말로 만든 곡이 더 낫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죠.


삼촌 친구인 (조)영남이 형의 권유로 음악계에 발을 디디면서 해보니까 음악은 전주가 있고 반주가 따르고 근음(根音)이 있고 화성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어요. ‘아하! 음악이 이렇게 가는구나’ 그런 감성이 제게 있었던 것 같아요. 왜 혼자 작곡을 할 수 있었나, 돌아보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윤형주에게 「비의 나그네」, 송창식에게 「애인」을 주면서 어떤 면에서 먼저 작곡가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지요.

 

「그건 너」도 그렇지만 전성기 시절 이장희 음악에서 기타리스트 강근식의 지분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밥 딜런의 「Like a rolling stone」이 그랬듯 국내에서도 포크 아닌 '포크 록'이 부상하고 있음을 알리는 순간으로 평가되는데요. 강근식과의 콜라보는 서구의 포크록 트렌드를 의식한 건가요.


강근식은 최고의 재즈 음악가인 고(故) 정성조를 누르고 재즈 기타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실력파였어요. 방송진행자로 일세를 풍미한 당시 쎄시봉 사회자 이상벽의 친구이기도 했고 그의 주선으로 알게 됐습니다. 음악적으로 동행하고 싶었지요. 포크록 트렌드에 대한 의식보다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음악'을 그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때는 록 시대였고 당연히 밴드에 대한 욕구가 있기도 했죠.


당시 저랑 음악을 같이 한 밴드 멤버가 기타 강근식 하고 건반 이호준, 베이스 조원익, 드럼 배수연으로 나중 세션과 연주의 레전드가 된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이들과 어떤 '짜인' 틀로 짜인 음악을 만들어내는, 미리 구상하는 이른바 편곡 개념으로 접근한 것은 아니에요. 그저 내가 노래 부르면 조금 있다 강근식이 나타나 기타를 연주하고 그러다가 베이스 조원익이 가세하고 건반이 보태지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곡이 탄생한 거죠. 편곡이 아닌 잼(Jam)하는 형식으로 음악을 완성해갔다고 할까요.

 

당대의 아이콘인 소설가 최인호 원작에 이장호 감독 그리고 이장희 음악. 실로 1974년 <별들의 고향>은 센세이션이었죠. 당시 음악을 만들 때 영향을 주었던 음악은 무엇이었나요. 그리고 최인호 선생은 어떤 이유로 이장희에게 음악을 맡겼을까요.


(최)인호 형은 서울고 연세대 선배로 워낙 친분이 있던 관계였구요. 자연스레 음악을 맡았지요. 원래 저의 음악적 취향은 컨트리 앤 웨스턴(Country & Western)이었는데 그 무렵에는 로큰롤에 빠졌지요. 킹 크림슨과 핑크 플로이드 등 당대에 쇼킹한 사운드를 들려줬던 밴드음악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게 <별들의 고향> 음악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친 거지요. 본격 OST를 만들려는 구상도 그랬고 「한 소녀가 울고 있네」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같은 곡은 스타일이 기존 가요와는 달랐지요.

 

음악이 달랐던 것은 실험의 소산이군요.


그래요. 옛날에 없던 것을 하려고 했습니다. 음악적 시도에 충실하고자 했죠. 그래서 당시 서구의 록을 한국화(化)하고자 했던 실험가 신중현 선생을 존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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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희의 실험적 지향은 자신의 음악으로 그치지 않는다. 1978년 '한동안 뜸했었지'로 한국 펑크(Funk)의 길을 개척한 기념비적 록 밴드 '사랑과 평화'가 널리 알려진 것도 이장희의 음악적 역량과 대중적 안목이 광채를 발한 케이스다. 마치 외국 노래를 듣는 것 같은 '수준상승'을 꾀해준 그들의 「한동안 뜸했었지」, 「장미」, 「어머님의 자장가」, 「얘기할 수 없어요」 등이 모두 이장희가 써준 곡들이다. 그의 곡 감각은 물론이요, '밴드 감수성'은 지금 기준으로도 각별하다. 사랑과 평화가 알려지기 훨씬 전인 1976년 「어머님의 자장가」 녹음 중에 대마초 사건으로 인해 주류음악 활동은 급정지되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음악적 영향력은 1980년대 후반까지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활동이 어려웠을 텐데 1988년 「나는 누구인가」, 「솜사탕」, 「안녕이란 말은 너무 짧죠」가 수록된 독집은 어떻게 나오게 됐나요?


1982년 「캘리포니아의 밤」이 수록된 앨범을 낸 바 있어요. 거기에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가 마지막 곡으로 실려 있죠. 그리고 미국 LA에서 <로즈가든>이란 클럽을 운영하고 있을 때였던 1987년에 KBS의 연예국장이 찾아와 88올림픽을 맞아 토크쇼 프로그램을 같이 하자는 제의가 있었죠. 이를 위해 한국에 들어왔지만 성사되지 못하면서 공중에 붕 뜬 상태가 됐고 그때 댄스가수 김완선의 앨범을 프로듀스하게 된 거죠. (여기서 김완선의 대표 히트넘버 중의 하나인 「나 혼자 춤을 추긴 너무 어려워」가 나왔다). 말씀한 1988년 제 앨범도 그런 연유에서 그 무렵에 만들게 되었지요.

 

따지고 보면 전성기 시절 매우 짧은 활동기간이었는데 엄청난 임팩트였습니다.

 

하긴 딱 네 장의 독집이었으니까 짧았죠. 72, 73, 74, 75년이었죠. 
 

요즘 글로벌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K팝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너무 잘하지요. 곡의 진행도 변화무쌍하고 매력적이고… (웃으며) 솔직히 우리 때 음악은 동요 수준이지요.

 

이장희가 꼽는 최고작은 뭔가요.


굳이 꼽자면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공연에서는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와 「나는 누구인가」 2곡을 주로 부르지요.

 

젊었을 때 심취했던 아티스트들은 누군가요?


아까 컨트리 앤 웨스턴을 로큰롤과 포크 이전에 좋아했다고 했는데 행크 윌리암스(Hank Williams)를 빼놓을 수 없죠. 남들도 다 좋아한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에 열광했고 아까 얘기한 핑크 플로이드에 대한 애정은 오래갔어요. 국내에선 다시 말하지만 신중현 선생이고.


인터뷰 및 정리: 임진모
임진모(jjinmoo@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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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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