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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영 “저자와 소통하는 느낌”

교수 권수영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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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통해 저자와 소통하는 느낌에 빠져들 때가 제일 행복해요. 이런 은밀한 소통이 독서의 묘미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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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통해 저자와 소통하는 느낌에 빠져들 때가 제일 행복해요. 가끔은 제가 아는 분의 글을 읽을 때도 있지만, 보통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런데도 그 저자분과 한 방에 있고, 시대의 아픔을 함께 공유하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시대를 관통하는 진리를 깨닫게 할 때는 가끔 소름이 돋지요. 이런 은밀한 소통이 독서의 묘미가 아닐까요?

 

철학과 종교, 최근에는 심리학과 신경과학에 이르기까지 가장 핵심적인 연구 주제였던 인간의 본성이 제 주된 관심사지요. 최근 인간의 선한 본성(공감, 연민, 용서 등)에 대한 다양한 학자들(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등)의 융합적인 접근을 담은 책, The Compassionate Instinct (2010)을 읽고 있습니다.

 

저는 신학자이면서 종교심리학자이고 임상적으로 심리상담과 코칭 서비스를 실천하고 훈련하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학문적으로 분야와 분야 사이에서 애매하게 걸쳐져 있는 실존을 느낄 때가 있답니다. 그런데 그런 건널목이나 교차점에서 절묘한 통찰이 생기는 것을 발견합니다. 어떤 학자는 이를 ‘옆길 학습’(sideway learning)이라고 하더군요. 전혀 색다른 분야의 책도 한번은 도전해 보세요.

 

 

명사의 추천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저/천병희 역 | 숲

사랑하는 아들에게 인생에 대해 가르침을 주려 한다면 어떤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이 책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들에게 전하는 윤리학 책입니다. 특히 학습량에 목숨을 거는 한국의 부모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입니다. 자녀에게 지식이나 정보 제공뿐 아니라, 중요한 삶의 지혜를 전달하고자 했던 철학자는 중용의 과정을 통한 도덕적 덕을 강조합니다. 덕성을 습득하는 일은 꾸준한 실천을 거듭하여 지나치지 않게, 또한 모자람도 없이 그 적절한 수준을 체득하는 일입니다. 어쩌면 이 책은 한결같이 자녀의 명문 대학 진학만을 지상 과제로 여기는 부모를 되돌아보게 하고, 작은 일이라도 부단히 몰입하고 실천하여 자녀를 '생활의 달인'으로 만드는 부모를 응원할 것입니다.

 

 

문명 속의 불만
지그문트 프로이트 저/성해영 역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현대 문명은 개인마다 드높은 도덕성을 요구합니다. 세계대전이 막 시작되던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프로이트는 인간성의 가장 깊은 본질은 본능적 충동으로 이루어진다고 설파합니다. 문명 사회가 개인의 선한 행동만을 요구하면서 이런 행동의 동기 아래 본능적 바탕에 대해서는 도무지 모른 척했다는 것이지요. 우방국의 참전으로 인해 적도 모른 채 참혹하게 진행된 세계대전은 본능을 도외시한 인간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충동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점을 밝히 보여주는 정신분석학 고전입니다.

 

 

마음 뇌 영혼 신
말콤 지브스 저/홍종락 역 | IVP

현대 과학의 영역은 신(神)을 믿는 데 방해가 된다고 믿는 종교인들이나 최근 진화심리학에 매료된 지성인들에게도 꼭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영국의 신경심리학자 지브스 교수는 진화심리학의 역할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심리학이 진화심리학으로 통폐합되고 있다는 식의 과도한 주장은 차분히 생각해볼 것을 권고합니다. 가상의 심리학과 대학생과 대담하는 형식을 빌려 쓰여진 그의 책을 읽노라면, 현대가 가장 첨예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뇌과학의 영역도 신과 우주를 관계적으로 인식하는 영혼과 종교의 영역과 결코 반대편이 아니라는 점을 느끼게 합니다.

 

 

인간의 자리
폴 투르니에 저/김석도 역 | NUN

가끔 기독교인들이 심리학을 지나치게 경계하는 경우를 발견합니다. 자기부인을 요구하는 기독교와 자기실현을 강조하는 심리학이 반대 주장을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스위스의 내과의사였던 폴 투르니에는 이러한 기독교와 심리학을 가장 잘 통합적으로 연결한 임상가입니다. "자신을 줄 수 있으려면 먼저 자신을 소유해야 한다. 자신이 실존하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줄 수 없다." 그는 자기주장의 복음과 자기포기의 복음, 즉 심리학의 복음과 종교의 복음은 연속적이고 상호보완적임을 다양한 임상 사례를 통해 알기 쉽게 설명해줍니다.

 

 

태초에 창조성이 있었다
고든 카우프만 저/박만 역 | 한국기독교연구소

하버드 대학의 신학자 고든 카우프만은 과학자들과 가장 활발하게 대화했던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신학이란 보이지 않는 신을 적절하게 상상하여 구성해가는 인간적인 작업이라고 정의했지요. 신의 모습을 인간의 틀에 따라 아버지로, 때로는 왕으로 상상하노라면, 무한한 신비의 신성을 인간의 모습으로만 제한하고 마는 소위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의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기독교의 신을 창조자가 아닌, 창조성(creativity) 그 자체로 상상하면서, 천체물리학자들이나 진화생물학자들이 우주의 기원과 진화의 중요한 속성으로 상정하는 창발성(emergent property)과의 대화를 시도합니다. 가히 기독교 신학의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을 시도한 저술입니다.

 

 

영화

 

밀양
이창동

기독교인이라면 꼭 보라고 권하고 싶은 영화입니다. 그런데 실은 이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많은 기독교인들이 적잖은 반발을 했었지요. 영화 중에 기독교를 폄하하는 내용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영화 제목은 두 가지 의미를 담습니다. 여주인공 신애(전도연 분)가 남편을 잃고 새로이 정착하고자 찾아간 남편의 고향이 '밀양'이라는 도시였고, 그 한자의 뜻인 '은밀한 햇살'(secret sunshine)은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 즉 마당 한 구석을 비추는 은밀한 햇살 장면과 연결됩니다. 주인공 이름에서 신애(信愛)는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소망이 빠진 이름입니다.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소망까지 잃은 신애에게 무엇이 은밀한 햇살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전통적으로 기독교가 추구해온 용서는 영화에서처럼 기독교인이 된 신애가 자신의 하나뿐인 외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직접 찾아가 용서한다고 고백하는 행위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명하신 말씀을 실천하고자 한 거죠. 그런데 그 흉악한 살해범이 자신은 하나님께 이미 용서받았다는 고백을 듣는 순간, 신애는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고 맙니다. 처절한 버려짐의 경험이지요. 가해자에 대한 어떠한 원한의 감정도 제대로 표현해보지 못한 신애는 갑자기 자신의 원수를 먼저 용서한 하나님에게 참아왔던 원한을 표시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도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버린 듯한 하늘을 향해 절규를 했었지요. 신애의 용서 시도는 정말 실패한 것일까요? 영화의 결말은 신애가 하나님을 저주하면서 자신 안의 원한을 토해내다가 결국 무기력에 빠지고 마는 마지막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녀의 마당 구석에 '은밀한 햇살'을 조명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한 예수의 말씀은 무조건 가해자는 용서하라는 말이 아니라, 용서의 여정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고도 길다는 말일 수 있습니다. 용서는 애도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신애의 경우라면, 원한을 가지고 상대를 처절하게 저주하고 분노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단계가 애도의 첫 걸음일 수 있습니다. 신의 아들 예수마저도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죽이라고 하는 무리를 용서하기까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외로운 고뇌와 힘겨운 골고다 언덕으로 향한 길고 긴 절규와 비탄의 여정이 있었지요. 이제 길고 긴 용서의 여정 중에 신애는 용서의 그 첫 번째 단계를 시작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다행스럽게도 한결같이 신애의 옆을 지키는 '밀양' 남자 종찬(송강호 분)이 '은밀한 햇살'의 한 켠을 담당하고 있지요. 만약 신애의 교회 신도들도 막 시작된 신애의 용서와 애도의 여정에 동참할 수 있었다면 더욱 좋았겠지요. 기독교인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었던 이 영화가 실은 가장 은밀한 기독교의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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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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