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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경, 5·18 생존자들의 꿈을 들여다보다

10주 간의 상담 과정 담은 『꿈에게 길을 묻다』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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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어느 시점에 시간이 멈춰서 현재도 미래도 편하지 않은 게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이에요. 트라우마 악몽은 외부의 개입이 있어야 합니다. 이 상태는 과거의 사건이 옹이 같이 박혀서 에너지가 흐르지 않는 거거든요. 트라우마 악몽을 다루는 사람들은 그 멈춰 있는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예요. 뭉쳤던 옹이를 풀어주고 거기에서 에너지가 빠져 나오게 하면 악몽은 되풀이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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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생존자들의 꿈을 들여다보다

 

『꿈에게 길을 묻다』는 광주트라우마센터의 ‘그룹투사 꿈작업’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광주트라우마센터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들과 그 가족들의 치유를 위해 설립된 단체로, 수면 장애와 악몽을 호소하는 참여자들을 위해 ‘그룹투사 꿈작업’을 기획했다. 상담을 이끈 저자 고혜경은 신화학 박사이자 ‘그룹투사 꿈작업가’다. 현재 크리스찬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그녀는, 제레미 테일러 박사에게 그룹투사 꿈작업을 배웠다.

 

제레미 테일러는 ‘살아 있는 가장 경험 많고 통찰력 뛰어난 꿈 탐험가’로 불리는 인물. 그는 1960년대 미국에서 그룹투사 꿈작업의 모델을 만들었으며, 성직자를 비롯해 베트남 참전 군인, 난민, 성소수자, 사회운동가, 노숙자, 범죄자 등 다양한 집단과 꿈을 통해 만나면서 집단의식을 연구해왔다. 그의 뒤를 이어 고혜경 저자 역시 10여년 간 그룹투사 꿈작업과 워크숍을 이끌어왔다. 한국 사회의 집단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밑거름을 만드는 데 노력하는 한편, 신화를 통해 우리의 삶을 읽어내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지난 14일 저녁, 최근 충정로역 인근으로 자리를 옮긴 ‘벙커1’에서 『꿈에게 길을 묻다』의 출간 기념 강연회가 열렸다. 고혜경 저자는 그동안 꿈작업을 진행해 온 경험에 비추어, 트라우마가 발생하는 이유와 그것이 꿈을 통해 드러나는 현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꿈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꿈 나쁜 꿈이라는 개념이 없다”고 말한 그녀는 “모든 꿈이 우리의 건강과 자기실현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특히 악몽은 “지금 굉장히 시급한 일이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고.

 

“전작 『나의 꿈 사용법』에서 꿈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이론을 이야기했는데요. 『꿈에게 길을 묻다』에서는 ‘실제로 꿈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책의 제목을 보시면 주어가 ‘꿈’이잖아요. 보통 심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꿈을 분석한다, 해석한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럴 때의 주어는 ‘나’가 되죠. 제가 ‘꿈’이 주어여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꿈이 나보다 훨씬 더 크고 깊고 지혜롭기 때문이에요. 이제는 ‘꿈이 나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조금 더 잘 들어보자고 말씀을 드리는 거죠.”

 

저자의 말에 따르면, 꿈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악몽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다룬다고 한다. 흔히 악몽이라고 부르는 ‘무서운 꿈’이 있는가 하면, 트라우마로 남은 사건이 계속 되풀이 되는 ‘트라우마 악몽’이 있다는 것이다. 트라우마 악몽에서는 똑같은 상황과 똑같은 시점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예기치 않은 큰 충격이 가해졌을 때, 그것이 해소되거나 완화ㆍ망각되지 않으면, 마치 옹이처럼 내면에 박혀서 트라우마 악몽의 원인이 된다. 당시의 상황, 당시의 자리가 반복되는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6.25 전쟁을 경험한 사람이 악몽을 꾸다가 소리를 지르면서 깨어나기를 반복한다든지, 제주 4.3사건의 생존자가 매일 밤 머리맡에 낫을 두고 잠이 들거나, 세월호 생존자가 침몰하는 배 안의 친구들을 두고 바다로 뛰어들어야 했던 순간을 꿈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것 등이 예이다.

 

“5.18 생존자들과 작업하면서 느낀 건데요. 과거의 어느 시점에 시간이 멈춰서 현재도 미래도 편하지 않은 게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이에요. 트라우마 악몽은 외부의 개입이 있어야 합니다. 이 상태는 과거의 사건이 옹이 같이 박혀서 에너지가 흐르지 않는 거거든요. 트라우마 악몽을 다루는 사람들은 그 멈춰 있는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예요. 뭉쳤던 옹이를 풀어주고 거기에서 에너지가 빠져 나오게 하면 악몽은 되풀이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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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룰 수 없는 사건은 기억할 수 없다

 

트라우마의 핵심 감정은 무기력증이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자책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러나 고혜경 저자는 “꿈이 말하고자 하는 건 ‘넌 아무것도 못 하잖아’라는 말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당시의 사건을 기억한다는 건 굉장히 좋은 소식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꿈속의 사건들을 다룰 수 있는 힘이 있을 때에만, 그것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다. 이와 같은 저자의 조언은 상담에 참여했던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5.18 생존자들에게는 트라우마 악몽뿐만 아니라 수많은 수면장애 현상들이 결합돼서 일어납니다. 대표적인 게 가위 눌리는 것, 야경증, 잠꼬대 같은 거예요. 실제 사례를 보면 자다가 벽을 너무 세게 친다거나, 자는데 문소리가 나서 도둑이 침입한 줄 알고 있는 힘껏 때렸는데 아들이었던 경우도 있어요. 무의식이 이런 방식으로 표현을 할 때는 그것이 지금 상황을 다룰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에요. 기본적으로 잠꼬대와 몽유병은 꿈을 꾸는 사람의 호소가 담겨 있는 거예요. 자신이 놓여있는 상황을 말로써 설명해 낼 수는 없지만 ‘제발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반영된 거죠.”

 

저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관련자들을 꿈이라는 깊은 차원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이 너무 감사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들은 가면을 쓰지 않는다. 가면을 쓸 수 있을 만큼 사치를 부릴 여지가 없는 것인데, 그래서 순수하다. 함께 작업하면서 그 점이 너무 좋았다”고 덧붙였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광주에 대해서 빚진 느낌을 가지고 있죠. 그 부채감에서 자유롭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제가 서울에서 꿈작업을 하다 보니, 광주 출신 사람들의 내면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광주항쟁이 깔려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이번과 같은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세대에 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로 대물림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꿈에게 길을 묻다』는 굉장히 힘들게 쓴 책이에요. 그런데 가볍게 쉽고 재밌게 읽히더라고요(웃음). 한편으로는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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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여에 걸친 강연이 끝난 후, 고혜경 저자와 독자들의 질의응답이 시작됐다. 자신의 꿈에 담긴 의미를 묻는 질문들이 이어졌고, 그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뒤따랐다.

 

한창 꿈을 꾸고 있을 때 잠에서 깰 때가 많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어떤 말을 하려고 한다든지, 궁금했던 사람의 정체가 밝혀지려고 할 때 잠에서 깹니다. 무의식이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걸까요?

 

네. 꿈에서 항상 쫓기다가 어느 날 용기를 내서 돌아보는 건 굉장히 결정적인 순간이에요. 두려운 대상은 직면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고 최선의 방법입니다. 도망을 가면 갈수록 쫓아오는 존재는 커지거든요. 깨어있을 때나 잠을 잘 때나 두려움에 직면하는 게 좋습니다.

 

꿈속에서 거울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주 꿈에 나타나는 두 명의 아이들이 있는데, 그 울음소리가 너무 싫어요.

 

제가 이런 꿈을 꿨다면, 어떤 식으로든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진지하게 할 것 같아요. 거울을 본다는 건 성찰인데, 꿈에서 이 일이 가로막히는 거잖아요. 그런 점에서 꿈을 더 열심히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꿈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그 즈음의 나의 과거와 관련이 있어요. 그리고 꿈에서 숫자는 우연히 등장하는 게 절대로 아닙니다. 만약 아이가 다섯 살이라면, 5년 전에 자신이 새로 시작했던 일이 뭐가 있는지 질문을 한 번 해보세요. 만약 꿈에서 보는 아이가 기괴하거나 기분이 나쁘다면, 아이가 원하는 것에 더 귀를 기울여주시고요. 저라면 내 안에서 호소하는 것들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질 것 같습니다.

 

꿈에서 색색의 물고기가 저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너무 무서워서 도망쳤어요. 어떤 의미일까요?

 

여자 입장에서 이 꿈을 꿨다면 일차적으로 남성성에 대한 두려움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꿈에서는 남자처럼 생긴 것이 여성성인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거든요. 상대적으로 길쭉한 물고기나 뱀 같은 것은 남성의 상징이고요. 제가 이런 꿈을 꿨다면 일단 남성성에 대한 이슈를 질문해볼 것 같아요. 그리고 인간 진화사를 보면 어류에서 시작됐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꿈의 의미에는 첫 시작이라는 개념도 분명히 들어있을 것 같습니다. 저라면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내가 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건 아닌지’ 질문도 해볼 것 같아요. 도망을 가다가 잠에서 깨는 악몽은 ‘이건 도망갈 일이 아니라 반드시 진행해야 하는 일’이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꿈속에서 옛날 옷을 입고 있었는데 현대 옷으로 바뀌기도 하고요, 지하철을 환승해야 하는데 어떤 걸 타야 할지 몰라 헤매기도 합니다.

 

탈 것은 일차적으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요. 자동차나 자전거, 오토바이처럼 개인적인 탈 것은 개인적인 관계를 의미하고요. 지하철, 버스, 비행기는 집단과의 관계를 이야기하죠. 그러니까 이런 꿈을 꾸셨다면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집단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고요. 기본적으로 옷은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어요. 내가 세상에 어떤 모습을 드러낼 것인지, 나의 어떤 측면을 세상에 보여줄 것인지를 표현하는 거죠.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잠을 자다가 꼭 중간에 깨는데요. 그럴 때면 꿈에 대해서 적어놓습니다. 꿈을 이야기하라는 메시지 때문에 잠에서 깨는 걸까요?

 

지금까지는 렘(REM) 수면 상태(얕은 수면 상태)에서 때 꿈을 꾼다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최근에는 렘 수면 상태가 아닐 때도 꿈을 꾼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꿈의 질은 완전히 다르지만요. 렘 수면의 주기는 하룻밤에도 여러 번 반복됩니다. 꿈을 꾸거나 꾸지 않는 상태가 대여섯 번 반복돼요. 꿈을 꾸다가 중간에 깨서 그 내용을 적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는데요. 제 경우라면 일단 꿈 때문에 잠에서 깨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생각해 볼 거예요. 꿈을 적기 위해서 중간에 잠에서 깨신다면, 스스로가 원하면 그렇게 해도 좋지만, 저는 추천하고 싶지 않아요. 어떤 이유로 잠에서 깼는데 꿈이 기억나서 적으신다면 나쁘지 않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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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게 길을 묻다광주트라우마센터 기획/고혜경 저 | 나무연필
그룹투사 꿈작업가 고혜경이 8회에 걸쳐 일곱 명의 광주민주화운동 당사자들과 함께 꿈의 여행을 감행했다. 사회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이들의 내면 여행인 셈이다. ‘5월의 꿈’ 그룹은 광주트라우마센터의 선별로 구성되었으며, 참여자 모두 5.18이 삶의 방향을 바꿔놓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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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임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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