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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함보다는 shy하게

노안 이후 비로소 보이는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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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아한 중년의 자세 중 하나는 ‘shy해지기’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침없이 당당하게’라는 자기에게 용기주기와 남성성의 신화는 젊어서나 유용한 것이리라.

노비문장: “무엇이든 무엇이든 작은 것은 모두 다 아름답다”


이어령, 『축소지향의 일본인』 중 <마쿠라노소시(枕草子)> 인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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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서점의 손바닥만한 문고판.

 

지난 1월, 일본 여행을 했다. 정확히는 조선통신사의 발자취를 쫒아가는 취재였다. 간혹 자유시간이 있었다. 전철에서, 길거리에서, 상점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친절했다. 친절의 저의를 떠나 친절하니 좋았다. 이번에는 특히 일본의 아저씨들을 주의 깊게 봤다. 중년을 주제로 칼럼을 쓰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니, 무의식적으로, 의식적으로 그리 됐다.

 

내 눈에 보이는 일본 아저씨들은 대개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이보리색 트렌치 코트를 입고 서류 가방을 들고 한 보폭의 징검다리를 건너는 사람처럼 총총총 신호등을 건너거나 전철 안 한쪽에 서서 미니 북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대개 키가 작았고 왜소해 보였다. 그리고 또 하나,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의 영역이 적었다. 공간이 적으니 그들이 보내는 신호도 작았다. 있는 줄 모르게 있다는 뜻이다. 물론 짧은 여행 중에 본 일본 아저씨들이, 일본 전체의 중년을 대리할 수 없다. 내가 본 그들이 그랬다는 것이다.

 

우주를 축소해서 정원에 가두고,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하이쿠)안에 언어를 압축하는 축소의 미학을 가진 사람들이어서 일본 아저씨들의 자기 영역과 존재과시의 신호도 크지 않았던 것일까? 그렇게 단순화 시킬 수는 또한 없을 것이나 확실히 흔한 한국 아저씨들의 큰 목소리, 쩍벌린 다리, 헛기침과 비교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최근 나는 두 번 정도 운전을 하다 화끈한 내 또래 아저씨들을 만났었다. 한 명은 갑자기 내 차를 쫒아 왔고 경적을 울렸고 부딪칠 듯이 다가왔다. 그것이 자기 차를 추월한 보복이었다는 것을 잠시 후 알게 되었지만, 차 안의 운전자가 보이는 저 과잉의 분노표시는 쓴웃음 이외에 대응할 방도가 없었다. 또 한 명은 외길에서 나와 마주친 상대편 운전자였는데, 내 뒤에도 차가 또 한 대 있었고 마주한 차는 옆으로 피할 공간이 있었으므로 그 차가 진로를 확보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차의 운전석에서 한 남자가 내리더니 나에게 성큼 성큼 다가와 내 차의 창문을 두드렸다. 그러더니 대뜸, “라이트를 끄란 말이야, 이 양반아! 그건 상식 아냐! ” 라고 반말로 고함을 질러댔다. 오늘 응급실 하나 예약했네, 라며 전의가 훅하고 타올랐으나, 동시에 떠오른 것은 ‘내가 만일 여자였으면 어떠했을까’ 라는 것이었다. 그 생각만으로 소름이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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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통식인 가이세키 요리. 그릇도 음식도 한국인 눈에는 소꿉장난 하듯 작다.

 

식당에서 종업원을 향해 반말의 주문을 하고, 전철에서 큰 소리로 젊은이를 나무라며, 그곳이 어디든 왕의 행세를 하거나 도로에서 황야의 무법자가 되는 저 이들은 자기 존재감을 어떻게든 크게 알리고자 하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야 상대가 나를 무시하지 않을 것이며, 나로 인해 상대가 긴장할 것이라는 안도감도 드는 것 같다. 여하튼 그들은 존재의 공간과 신호가 확실히 크다.

 

나는 그것을 익숙함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 사회에 오래 산 사람들의 익숙함 말이다. 시스템에 익숙하고 관계에 익숙하고 상대를 제압하는 화법에 익숙하다. 짠밥을 많이 먹을수록 군 생활이 익숙하듯, 이 사회에 오래 살수록 주변의 모든 것이 익숙하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한동안 여행을 거의 외국으로만 다니다가 마흔이 넘어서 여행지를 주로 국내로 바꾸면서이다. 처음 가보는 외국은 신기하고 새롭고 요즘 말로 신박했으나, 중년의 나이로 접어들자 내 나라가 주는 익숙함과 편안함이 더 좋아졌다. 전국의 누구를 만나든 대화가 통하고, 아주 효율적인 짧은 커뮤니케이션으로도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다 얻을 수 있었으며, 행여 누군가와 다툼이 있더라도 이길 수 있는 말싸움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그 익숙함에 나는 여행지의 취향도 바꾼 것이다. 그것이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나를 공격하거나 나를 불편하게 할 때 그에 항의하거나 배로 되돌려줄 수 있는 준비가 돼 있었고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나는 우아한 중년의 자세 중 하나는 ‘shy해지기’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침없이 당당하게’라는 자기에게 용기주기와 남성성의 신화는 젊어서나 유용한 것이리라.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맘만 먹으면 회사에서, 사회에서, 가정에서 거침없이 당당한 기득권층이 중년들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 당당함을 내면 속 자존감이라는 서랍에 고이 모셔두고 일상에서는 조금은 부끄럽고, 약간은 축소된 모습으로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음식 주문을 하자. 거침없는 중년보다는 다소곳한 중년이 더 은은하고 우아하며 카리스마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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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을 보다 작은 상자로 축소해서 가동적인 음식으로 만든 일본인의 발상법, 도시락.

 

 

독후 한줄- 『축소지향의 일본인』

 

 

일본은 있네 없네 말이 많을 때, 오랫동안 일본과 일본인을 알려주는 책으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


  한국인의 관점, 한국의 문화 풍속과의 비교를 통해 쓰여져서 더 일본인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었다
는 저자의 말에 고개 끄떡.


  인터넷도 없던 시대에 이런 식의 고증과 자료가 풍부한 책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그것도 고작 1년의 체류만으로? 하기야 일본관련 서적의 레전드라는 국화와 칼』은 루스 베네딕트가 단 한 번도 일본 땅을 밟지 않고서 썼다지? 그래서 이어령 선생은 자신의 책을 ‘어린이의 시선으로 보는 일본론’이라고 했구나. 고개 또 한 번 끄떡.


이어령 선생님은 글도 참 읽기 편하게 쓰시네.


축소지향의 여섯 가지 모형, 자연물에 나타난 축소문화, 인간과 사회에 나타난 축소문화는 그야말로 술술 쏙쏙 읽힌다.


  뒤에 두 챕터, 산업에 나타난 축소문화, 확대지향의 문화와 오늘의 문화는, 이 책이 이미 20년도 전에 쓰여져있으므로 시의성이 확실히 떨어지고


  왕대포, 왕사탕, 왕뚜껑 등 앞에 왕을 붙이면서 힘을 과시하는 한국, 접두어로 마메 (豆. 콩)와 하나를 붙이면서 작게 줄인 것이 힘세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본, 이 부분이 참 인상적이었다.


∨  어쨌거나 일본 여행 전 후, 왜 이렇게 두 나라는 다르지라는 궁금증이 들 때 보면 딱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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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윤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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