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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으로써의 의상 <하늘을 걷는 남자>

같은 옷을 고집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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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펠리페 페티 외에, 노란 트레이닝복을 입은 이소룡과 가면을 쓰고 검은 수트를 입은 배트맨 까지. 이들에게 의상은 하나의 상징으로 기여한다.

스티브 잡스와 엘비스 프레슬리와 앙드레 김. 이들에게 남자와 고인이라는 사실 외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입는 옷이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남성적인 구레나룻과 흰 나팔바지를 고집했다면, 앙드레 김은 좀 더 과장된 어깨와 화려한 문양의 정장을 즐겼다. 스티브 잡스는 검은 터틀넥에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었다. 그 때문인지 이들을 떠올리는 일은 수월하다. 육안에 보이지 않더라도 심안에 잔상이 남아 그 이미지가 환영처럼 떠다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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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하늘을 걷는 남자>에서 외줄타기 장인 ‘필리페 페티’는 검은 나팔바지에 검은 터틀넥을 고수한다. 일상생활을 할 때까지 이 옷을 고집하는 건 아니다. 그에게 검은 바지와 검은 티셔츠는 일종의 무대의상이다. 허공에 매달린 얇은 외줄 위에 자신의 몸을 맡길 때, 평소와 같은 자세로, 정신으로 임할 수 없다는 일종의 선언 같은 것이다. 마치 제사장이 예복을 갖춰 입고 제식을 올리듯, 필리페 페티는 검은 나팔바지와 검은 터틀넥을 입고 파란 창공 속에서 걸어간다. 그에게 이 무대의상은 중력의 지배를 받으며 땅위를 걷는 한 범인에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며 창공 속을 걷는 한 모험가로 변모하게 한다. 평범한 검은 바지와 티셔츠가 그의 생활을 전환하는 스위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갑자기 내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작가를 하기 전부터 밴드를 해왔던 필자에게도 무대 의상이 있다. 비운의 밴드 <시와 바람>의 무대 의상은 동대문 상가에서 산 부인복이다. 멤버들은 새벽시장에서 그 의상을 보는 순간 100만 볼트에 감전 된 것처럼 말을 잃어버렸다. 꽃무늬가 촌스럽게 새겨진 그 부인복 앞에 멤버 네 명은 모두 굳게 선 채로 한동안 넋을 잃은 듯 응시했다. 마치 필리페 페티가 타는 밧줄처럼, 허공에 매달린 그 옷 앞에 선 우리는 일종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거의 동시에 ‘이. 이 옷이다!’라며 더듬듯 읊조린 뒤, 뭔가에 이끌려 값을 치렀다. 흥정을 하는 것조차 그 옷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듯, 멍한 채로 돈을 건네고 쇼핑상가를 나와 새벽녘 포장마차에서 가락국수를 먹었다.

 

펠리페 페티처럼 같은 옷을 고집하면 장점이 있다. 이런 옷을 택한 이들은 강도 높은 집중을 요하는 일을 한다. 따라서 더 이상 의상 때문에 고민할 필요 없이, 온전히 본연의 일에 집중할 수 있다. 그것이 스티브 잡스의 터틀넥과 펠리페 페티의 까만 바지 정도라면 말이다.

 

동대문에서 가락국수를 먹고 난 다음날 아침, 눈을 뜨고 나도 모르게 기함을 질렀다. 방 안에 걸린 촌스러운 꽃무늬 부인복이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성복인지라 성인 남성에게 꽉 끼기까지 했던 그 의상은 같은 시각 합정동과 망원동과 흑석동에서, 즉 멤버들 각각의 방에서 후회와 통회와 회한의 함성을 지르게 만들었다. 마침 그날 첫 공연이 있는지라,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섰는데, 펠리페 페티나 스티브 잡스처럼 일에 집중할 수 있기는커녕 옷이 너무나 달라붙고 수치스러워 제발 공연이 속히 끝나길 기도했다. 그날, 우리는 합의했다. 다음부터는 반드시 선글라스를 끼자고 말이다. 우리는 영혼의 창인 눈동자를 가림으로써, 소중한 우리의 혼을 지키기로 결정했다.

 

스티브 잡스, 펠리페 페티 외에, 노란 트레이닝복을 입은 이소룡과 가면을 쓰고 검은 수트를 입은 배트맨 까지. 이들에게 의상은 하나의 상징으로 기여한다. 그렇기에 대중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이들은 더욱 같은 의상을 고집했는지 모른다. 첫 공연 뒤에 두피부터 발톱까지 저미는 수치를 느낀 ‘시와 바람’ 멤버 들은 모두 선글라스를 낀 채 말했다. “우린 돈 벌면 의상부터 바꾸자고.”

 

이 결심을 한 지, 5년이 지났다. 그 사이 멤버 한 명은 자기 음악을 하겠다고 탈퇴를 했고(의상 때문이라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하나, 그가 탈퇴의사를 밝히며 건넨 첫 인사가 “형. 의상은 반납 할게요”였다), 계절은 스무 번이나 바뀌었지만, 통잔 잔액은 더 줄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직도 의상을 못 바꾼 채 지내고 있다. 이렇게 따져보니, 펠리페 페티 역시 ‘어쩌다보니’ 검은 옷을 계속 입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


그나저나, 같은 옷을 5년 째 계속 입다 보니 이제 정도 들고, 작은 사이즈의 부인복이 몸에 착 감겨 누군가가 안아주는 포근함까지 느껴진다. 미운 정 고운 정 든 부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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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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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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