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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할수록 실성할, 이 나라에서 살아남기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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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편견과 무지하게 느껴지는 강압을 비틀고 조롱한다. 사실 논리적인 관점에서만 보자면 비약도 심하고 단점도 많다. 하지만, 이 영화, 거칠고 과장될수록 더 강해지는 메시지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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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도 곱게 미치라는 말이 있다. 미친 사람에게 까지 ‘예의’와 ‘존엄’을 요구하는 우리사회의 보수와 차별이 이 말에는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도, 도저히 진창에 빠진 발 한 짝조차 옮기기 어려운 차별과 불평등의 사회에서 미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조차, 내 눈에 거슬리지 않게 ‘곱게’ 미치라니! 열심히 살았지만, 고작 나와 내 가족의 행복 하나 지키는 것조차 바튼 세상, 안국진 감독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통해 그 세상의 편견과 무지하게 느껴지는 강압을 비틀고 조롱한다. 사실 논리적인 관점에서만 보자면 비약도 심하고 단점도 많다. 하지만, 이 영화, 거칠고 과장될수록 더 강해지는 메시지를 품고 있다. 

 

공장에 취직해 여공이 될지, 고등학교에 진학해 엘리트(?)가 될지의 기로 앞에서 엘리트가 되기로 결심한 수남(이정현)은 자격증을 무려 13개나 따는 등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불쑥 닥친 컴퓨터 세상 앞에서 설 자리를 잃고 결국 공장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청각장애가 있지만, 성실하고 착한 남편(이해영)을 만난다. 남편의 소망은 빨리 집을 사서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것이고, 수남은 수술로 남편이 청각을 되찾기를 바란다. 하지만 수술 후유증으로 손가락을 잃은  남편은 하루하루 시들어 간다.  수남은 여전히 남편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싶다. 수남은 남편이 꿈꾸었던 ‘집’을  사면 두 사람은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녀는 밤낮없이 일 하고 또 하고, 더 빨리,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자기만의 기술을 연마한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집을 얻었지만 세상은 결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수남의 편에 서 주는 법이 없다. 

 

알려진 대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2015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기대한 만큼 이야기를 조이고 푸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사회적으로는 하층민의 삶에 가깝고, 원하는 대로 살아본 적도 없는 한 여성이 오직 자신의 남편과 함께 꾸었던 꿈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지금, 오늘, 여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견디고 그 속에서 살아내야 하는 서민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보편성을 지닌다. 수남이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은 절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수남을 둘러싼 서민들 역시, 권력 사이의 암투에서 이용당하는 순진한 하나의 덩어리에 불과하다. ‘재개발’을 둘러싸고 수남이라는 한 여인이 겪어야 하는 이야기는 그래서 관객들의 동감을 사고, 연민 보다는 슬픔이라는 공감대의 띠를 둘러낸다. 그래서 거듭되는 수남의 살인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남이 끔찍하다거나, 범죄자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남이라는 한 여성을 계속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물론 저예산 데뷔작인 만큼 아쉬운 점도 있다. 가끔 뭉텅뭉텅 이야기가 잘려나간 것 같고, 이가 나간 그릇에 덜 익은 찬으로 한 상 가득 받은 것처럼 어색한 순간도 있다. 하지만 주제의 축을 일관성 있게 관통시키는 안국진 감독의 연출력에 촘촘하게 잘 녹아든 배우들이 열연이 과장되고 어색한 순간도 덜컥 믿어버리게 만든다. 더불어 오롯이 원탑 주인공으로 이야기의 중심축을 흔들림 없이 끌고 가는 이정현 덕분에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끝까지 쫄깃쫄깃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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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돌아와 우리 앞에 선 이정현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면서 이정현이라는 배우가 가진 이미지, 지내온 흔적, 그리고 그동안 받아왔을 편견의 시선 등을 자꾸 되짚게 된다. 1996년 이정현의 데뷔는 충격이었다. 사람들은 어린 소녀가 얼마나 미친 연기를 잘하는지에 주목했다. 그렇게 <꽃잎>으로 ‘광기’의 아이콘이 된 이정현은 1999년 뽕짝 리듬에 국적불명의 의상, 새끼손톱에 마이크를 달고 ‘와’ 라는 노래로 가수로 데뷔했고 동시에 세기말의 아이콘이 되었다. 무당의 딸이라는 소문이 날 만큼 강렬한 도발이었지만, 이 강렬한 두 가지 데뷔는 이정현이라는 배우 혹은 가수의 발목을 끝내 움켜쥐는 족쇄가 되었다. 사실 사람들은 광기어린 이정현의 모습을 주목했지만, 감시자의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실생활에서 어긋나는 점은 없는지, 그녀에게 무당의 피가 흐르는 것은 아닌지, 여전히 앞으로도 쭉 잘할 수 있을지 바라보는 눈은 엄격했고, 그래서인지 그녀는 늘 주눅 들어 보였고, 생기가 없어 보였다. 게다가 1999년 김수용 감독의 <침향>은 호연에도 불구하고 주목받지 못했고, 2000년 공포영화 <하피>는 재앙이었다. 뚜렷한 대표작이 없는 시간이 이어졌다.

 

배우로서의 이정현을 언급하려면 여전히 <꽃잎>을, 가수로서의 이정현을 이야기하자면 끝내 ‘와’를 소환해야 하는 다소 맥 빠진 행보와 중국 활동으로 인한 공백기는 이정현이라는 배우의 ‘광기’ 뿐만 아니라 이정현이라는 배우 자체에 대한 기억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정말 아쉬운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이정현이 가진 독보적인 ‘광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건 단순히 미친 연기를 잘한다는 차원이 아니다. 말을 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순간, 이정현은 눈으로 텅 빈 진공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기억하는 사람이 적겠지만 <꽃잎> 이후 심혜진의 어린 딸로 출연한 <마리아와 여인숙>에서 이정현은 소녀와 여인의 중간에 선, 묘하게 신비롭고 밉지 않게 불량한 모습을 연기하는데, 그건 팽팽하게 당겨진 탄성 좋은 고무줄 같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박찬욱 감독의 2010년 단편 <파란만장>에서 무당 역을 맡기 전까지 이정현은 폭발적인 연기를 숨기고 사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독특하고 반사회적인 이미지로 한국 사회에서 배우로, 그것도 여배우로 살아간다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남들보다 더 성실했을, 그리고 실성한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 애쓴 시간들이 오롯이 이정현의 표정과 몸에 녹았다. 그래서인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통해 다시 돌아와 스크린 앞에 선 이정현은 이제 실성과 성실 사이를 유연하게 오가는 절대 경지에 오른 것처럼 보인다. 참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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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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