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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새로운 이야기 <경성학교 : 사라진 소녀들>

<경성학교 : 사라진 소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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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적인 풍광에 사로잡혔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은 당시를 일제치하라 얘기했고, 그 시절은 변절자와 친일파가 득세한 우울하고 어두운 역사로 기억해야 한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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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적인 풍광에 사로잡혔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은 당시를 일제치하라 얘기했고, 그 시절은 변절자와 친일파가 득세한 우울하고 어두운 역사로 기억해야 한다고 믿었다. 누구도 쉽사리 그 시대를 모던하고 이국적인 풍광으로 가득했고 낭만적 풍취가 묻어나는 시기였다고, 낭만적 감성으로 그 시대를 기억해낼 수 없었다.  퇴폐와 허무주의, 애국주의는 그 시절을 말할 때 반드시 강조되어야 할 키워드였다. 그래서 당시를 담은 영화는 애국주의로 가득한 <장군의 아들> 혹은 퇴폐와 허무로 가득한 <금홍아 금홍아>로 대표되었다. 하지만 2007년 공포영화 <기담>은 그 시절, 경성시대를 소환해 냈다. 무서운 이야기라는 괴담이 아니라, 이상한 이야기 ‘기담’은 1940년대 경성의 신식병원을 무대로 기이한 시대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극으로 치달은 제국주의 속에서도 이상한 평화와 고요함에 사로잡힌 사람들, 모던 걸과 모던 보이, 그리고 외국의 신문물이 마구 뒤섞인 기묘한 시대, 기이한 풍광 속에서 무서움과 잔혹함의 아름다움을 건져낸 영화였다.

 

2015년 청년필름은 이해영 감독과 함께 1930년대 경성시대를 다시 현재로 불러온다.  그리고 그 결과는 꽤 효과적이다. 경성이라는 시대와 그 이국적 풍광 속에 비판적  시대정신도 놓치지 않았다. 경성, 소녀, 기숙사 괴담에서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이야기의 수순은 계속 배반되고, 연이어 1970년대 호러 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던 <캐리>, <서스페리아>, 한국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등 다양한 영화들을 연상시키지만 <경성학교>는 끝내 새롭다. 나라를 잃고, 무국적 속에 문화도 잃고, 심지어 부모조차 잃어버린 소녀들이 벌이는 생존의 이야기는 처연하게 아름답고, 아름다운 만큼 (정서적으로)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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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몰랐던 소녀들

 

어딘지 모를 산 속에 자리한 기숙학교에 폐병을 앓고 있는 주란 혹은 시즈코(박보영)가 전학을 온다. 교칙은 엄격하고, 덜 자란 소녀들은 그녀를 냉정하게 대한다. 오직 급장 연덕 혹은 가즈에(박소담)만이 그녀에게 호의를 베푼다. 그녀들은 자신의 본명을 묻어두고 일본식 이름으로 불린다. 덜 자란 소녀들만이 가득한 기숙학교, 나라도 주권도 이름도 빼앗긴 상황이 주는 섹슈얼리티의 혼란과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소녀들의 갈등과 사랑도 깊어진다. 주란은 연덕의 도움으로 학교에 적응하지만, 어느 날부터 이상한 기척을 느낀다. 주란의 눈앞에 사라진 소녀들의 흔적이 계속 보이는 것이다. 진심을 알기 어려운 딱딱한 미소로 위장한 교장(엄지원)은 도쿄 유학을 미끼로 학생들의 경쟁을 부추기고, 기숙학교에서 벗어나기 위한 소녀들의 경쟁은 드러나지 않지만 늘 팽팽한 긴장감 속에 매섭게 자리한다. 늘 병약하던 주란이 최고의 성적을 유지하던 연덕과 유카(공예지)를 제치고 우수 학생 후보가 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는다.

 

스릴러 장르로 구별되어 있지만, 으스스한 분위기와 사라진 소녀들의 흔적은 공포영화의 섬뜩함을 담아내고,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녀들이 모인 기숙학교에서 벌어질 법한 주란과 연덕 사이의 아슬아슬한 애정의 기운 사이, 은밀하게 주고받는 일기장과 비밀이 오가는 장면들은 충분히 예쁘다. 호러와 스릴러, 소녀들의 멜로 사이를 바쁘게 오가던 장르의 변주가 켜켜이 쌓이는 동안 <경성학교>는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다시 토해낸다. 상상 가능한 저주도 원혼도 아닌 시대적 비극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주란에게 생긴 초능력의 실체가 밝혀지는 시점부터 <경성학교 : 사라진 소녀들>은 끝을 향해 전력질주를 한다. 

 

갇힌, 예쁜, 버림받은 사춘기 소녀들이 겪을 법한 섹슈얼리티의 혼란과 질투가 오가던 전반부의 잔잔한 이야기는 처연하고 아름다운 호러의 얼굴이었다면, 나머지 한 시간은 더 격정적이고 파격적인 액션 영화의 틀거리 속에 담긴다. 이해영 감독은 아직 덜 자란, 버림받은, 그리고 살아남아야 하는 소녀들의 모습을 통해서 성장영화의 아픔과 잔인함을 유연하게 녹여낸다. <과속스캔들><늑대소년>으로 특정한 이미지에 갇혀있던 박보영이 병약한 소녀에서 파괴적으로 폭발하는 소녀로 변신하는 과정은 유연한 만큼 흥미로운 볼거리가 된다. 박보영은 나약한 마음과 수줍음, 욕심과 질투를 오가는 섬세한 감정선을 매끄럽게 이끌면서 다른 배우들과 조화를 이뤄낸다. 여기에 크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중심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박소담은 오묘한 매력으로 다음 작품을 벌써 기대하게 만드는 배우다. 그리고 교장 역할의 엄지원은 긴 팔과 다리, 그리고 단단한 옷에 조여진 몸 그 자체가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또 다른 연기가 되는 색다른 경지를 보여준다. <장화 홍련>에서 염정아가 이뤄냈던 연기에 필적할 만하다.

 

이해영 감독은 그 동안 쉽게 다루기 어려웠던 소재를 현재로 끌어들여 감동과 재미가 있는 영화를 만들어왔다. 성전환 수술을 하고 싶어 씨름선수가 된 소년의 이야기 <천하장사 마돈나>나 평범한 사람들의 섹스를 이야기한 <페스티벌>은 소란스러우면서도 잘 정돈된 영화였다. 소재주의로 빠지기 쉬운 유혹을 버리고 늘 자신만의 독특한 이야기를 공감 가능한 이야기로 직조해낸 감독 특유의 연출력은 <경성학교>에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사라진 소녀, 기숙학교의 미스터리는 이제까지 너무 익숙하게 봐온 소재다. 알게 모르게 영향력을 행세한 선배 영화들에 대한 오마쥬를 굳이 숨길 필요 없이  이해영 감독은 그 모든 이미지들을 직조해 또 다른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영화 속 소녀들이 옹기종기 수놓아 만든 벚꽃 지도처럼 조금씩 수놓았던 이야기가 익숙해질 무렵 이해영 감독은 이야기를 확 펼쳐 놓는다. 촘촘한 작은 이야기들이 시대적 비극과 담론으로 승화하는 순간, <경성학교>는 끝내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또한 비비 꼬았다가 ‘깜놀’하게 하려는 반전 강박에서 매끈하게 비껴나 있는 여유와 자신감이라니……. 그러니 끝내 신선하달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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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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