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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 앤이 있는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엄마와 함께 하는 캐나다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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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엄마는 늘 프랑스에 가고 싶어 했다. 오죽했으면 아빠는 파리가 엄마의 고향이라며 놀리곤 했다. 어렸을 때는 나이가 들면, 금방 돈을 벌어 엄마를 파리에 데려다 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살아보니 그냥 홀로 서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기회가 닿아 엄마와 함께 캐나다에 갈 수 있었다.

캐나다에선 일을 했는데 여기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로 가서 했던 말과 비슷하다.


 ‘호주에 와서 들은 건 양 소리 밖에 없어.’
 ‘왜?’
 ‘아무리 가도 풀이랑 양밖에 없어. 시내는 겁나 멀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워홀일 거 아냐. 같이 얘기 해보는 건 어때?’
 ‘우리끼리 말하고 있으면 주인이 싫어해.’


영어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일석이조일 것 같지만, 본질은 학생이 아니라 근로자다.

 

일을 하며 여름휴가 즈음에 엄마를 불렀는데, 딸이 캐나다에서 머물고 있으니 한 달 정도 엄마에게 해외여행을 선물하려고 했던 것이다. 다만 내 일은 전혀 줄어들지 않아, 엄마는 홀로 공원에 산책을 가거나, 버스를 타고 시내를 구경하곤 했다. 엄마는 한국에서도 버스를 많이 탔는데 마음이 복잡할 때면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종점까지 이동하며 멍하니 창밖을 보곤 했다. 어렸을 때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까먹었지만, 밤중에 갑자기 집에서 나와 엄마와 같이 버스에 탔던 기억이 난다. 버스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지만, 우리는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엄마가 마음을 기댈 곳은 이런 곳밖에 없구나 싶어 손가락을 꼬물거리면서도 얌전히 앉아 있었다.

 

나는 핼리팩스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리 크지 않은 도시엔 친절함이 가득 차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당연하다는 듯이 ‘하이’하고 인사가 오가는 곳이었다. 핼리팩스의 다정함에 취해 캐나다가 전부 이런 곳인 줄 착각했다가 나중에 토론토에 가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핼리팩스에서는 버스에 누가 지갑을 두고 내리면, 운전기사가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버스를 뒤로 돌려 주인에게 지갑을 도로 찾아줄 정도로 순박한 곳이었다. 엄마는 ‘헬로’와 같은 아주 간단한 영어밖에 못했는데, 나중엔 친구도 만들어왔다. 대한민국 아줌마의 친화력이란 그저 놀라울 다름이다. 게다가 핼리팩스에선 버스패스로 페리도 탈 수 있었는데, 엄마는 이 작은 배를 타는 것도 좋아했다. 느긋하고, 온화한 이 마을에서 엄마가 좋은 추억을 쌓았길 바랄 뿐이다.

 

분명히 가족이 캐나다에 온다고 얘기를 했음에도 오히려 일을 더 늘린 고용주 때문에 우리가 같이 여행을 떠난 건 엄마가 캐나다에 머무는 마지막 3일 뿐이었다. 우리는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PEI)로 향했다. 예전엔 세상에서 가장 긴 다리였던 컨페더레이션 다리를 지나 PEI에 도착했다. 낮게 비가 내리치는 날씨 덕분에, 시야엔 바다와 하얗게 피어오른 물안개밖에 보이지 않아 마치 바다 위를 날아가는 것 같았다. 숙소는 인터넷에서 사진을 보고 B&B를 골랐는데, 이제껏 내가 머무른 숙소 중에 가장 동화 같은 방이었다. 주인 내외는 무심한 편이라 머무는 동안 얼굴을 보기 힘들었지만, 동양인 모녀가 둘이서 달랑 여행 왔다고 하자 직접 픽업도 와주고, 드라이브하며 주변 명소를 소개시켜 주기도 하는 등 나름 환대를 받았다.

 

PEI에선 어디를 가나 빨간 머리 앤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빨간 머리 앤 뮤지컬, 박물관, 앤과 길버트가 살고 있는 마을, 저자인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일했던 우체국, 결혼했던 성당 등 상당히 많은 것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한 권의 책이 섬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엄마는 사랑스러운 수다쟁이 앤을 정말 좋아했는데, 내가 어렸을 때 같이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엄마가 더 팬이 됐다고 했다. 실제로 애니메이션을 만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스텝과 함께 PEI에 머물며 상세한 자료조사를 했고, 이 섬을 그대로 만화로 옮겼다. 그래서 그런지 PEI의 곳곳을 돌아 볼 때마다 마치 그림이 현실로 튀어나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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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I에서 가장 번화가인 캐번디시를 돌아다니다 보면 앤을 만날 수 있다. 이웃인 미국인들에게 패션 테러리스트로 놀림 받는 캐나다인들답게 외모는 중요한 게 아니다.

 

빨간 머리 앤의 원제는 Anne of Green Gables로 우리가 잘 아는 앤의 어린 시절 이후에도 많은 이야기가 있다. 결혼을 하고, 세계대전을 겪고, 할머니가 될 때까지 외전을 포함해 총 11권의 책이 출간되었다. 저자인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녀가 상당히 바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목사의 아내이자 세 아들을 키우는 엄마였으며 조부를 이어 우체국에서도 일했다. 그녀는 몸이 세 개라도 모자란 와중에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간 짬을 내어 꾸준히 소설을 썼다. 세기의 신데렐라로 불리는 해리포터의 저자 조앤 롤링도 많은 출판사에서 원고를 거절당했는데, 몽고메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몽고메리는 무려 3년 동안이나 모든 출판사에서 거절당했고 깊게 상심했으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 투고한 결과 세기의 스테디셀러를 남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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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I에서 만날 수 있는 앤들, 지난 100여 년간 수많은 앤이 있었을 것이다.

 

PEI에서 가장 마음에 든 곳은 빨간 머리 앤 박물관이었다. 녹색 지붕의 집의 모델이 된 이 곳은 몽고메리의 외사촌이 살았던 집으로, 집터만 남은 몽고메리의 생가와 달리 보존이 잘 되어 있다. 박물관은 소설 속 모습 그대로 재현되어 있어 매튜와 마릴라, 앤의 방 및 주방 등을 볼 수 있다. 각 방엔 소설 속에 나온 소품도 섬세하게 재현해 놓았는데 앤의 방에선 친구인 다이애나와 밤에 빛으로 대화를 나눴던 유리 램프가 창가에 놓여있고, 마닐라의 작업실엔 창가에 재봉틀이 놓여있고, 무뚝뚝한 매튜의 방은 성격대로 단출하다. 이곳에선 매튜의 마차를 타볼 수 있는 유료 체험이 있고, 아이스크림 등을 파는 작은 가게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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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브스터와 기념 촬영. 거리 한복판에 있어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핼리팩스에 머문 지난 한 달 동안 우리는 대부분 요리를 해서 먹었다. 주방이 있는데 뭐 하러 사먹느냐며 엄마는 낯선 재료들로 뚝딱 따뜻한 밥을 만들곤 했다. 그러나 PEI에선 우리도 주방이 없는 여행자였다. 거기다 이번이 마지막 일정이다 싶어 우리는 로브스터 요리를 먹었다. 해산물 요리가 유명한 만큼 다양한 요리가 있었는데, 우리는 로브스터를 쪄낸 뒤 차갑게 식힌 요리를 선택했다. 비닐로 만든 일회용 턱받이와 장갑을 받아들자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잘 먹긴 했는데, 그 날 저녁에 내가 탈이 났다. 밤새 엄마의 걱정스런 눈빛을 받으며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며 나는 토지의 첫 부분이 떠올렸다. 평소에 고기를 못 먹다 잔칫날이라고 고기를 잔뜩 먹은 노인들이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그 부분 말이다.

 

어쨌거나 엄마는 캐나다에 다녀 온 이후로 다른 아줌마들과 얘기를 할 때 큰 자신감을 얻었다. 누가 유럽여행을 다녀왔다며 ‘너네 아직 못 가봤지?’ 하며 자랑해도, 엄마는 며칠 여행을 떠난 게 아니라 캐나다에 한 달을 살면서 친구도 사귀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주에 역마살이 꼈는지 나는 해마다 어딘가에 자의로 혹은 타의로 떠나곤 했는데, 그러다보면 가끔 회의가 들곤 했다. 이 돈과 시간을 들여 내가 얻는 여행의 효용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 말이다. 하지만, 엄마를 보니 한 가지 확실한 효과는 있는 것 같다. 자신감 말이다. 해보지 않으면 타인의 말에 이리저리 흔들리기 마련인데, 일단 한번 저지르고 나면 ‘아, 나도 그랬는데’하며 흘러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그리고 사실 ‘해봤다’와 ‘아직 안 해봤다’의 사이엔 별 차이가 없다는 사실도 알 게 된다. 여행은 분명 많은 걸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바꾸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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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최은정

안녕하세요, 어쩌다보니 이곳저곳 여행 다닌 경험이 쌓여가네요. 여행자라기엔 아직도 어설프지만, 그래도 오래 다니다 보니 여행에 대한 생각이 좀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미국, 캐나다,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일본, 대만, 중국 등을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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