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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무력해질 때

『고슴도치 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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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들어보면 거대한 벽이 나를 가로막고 있을 때가 있다. 우리를 둘러싼 벽은 여러 가지다. 부패할 대로 부패한 제도의 벽일 수도 있고 폭력적인 사회 현실의 벽이거나 해묵은 차별의 벽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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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

 

눈을 들어보면 거대한 벽이 나를 가로막고 있을 때가 있다. 우리를 둘러싼 벽은 여러 가지다. 부패할 대로 부패한 제도의 벽일 수도 있고 폭력적인 사회 현실의 벽이거나 해묵은 차별의 벽일 수도 있다. ‘내가 싫어? 그럼 어디 한 번 해보든가.’ 모든 벽은 비아냥거리듯이 우리에게 도전해보라고 말한다. 내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증거는 벽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 벽을 향해서 달려든다는 사실에 있다. 험한 세상에 던져진 이상 우리는 노를 저어야 하고 그 파도를 넘어설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가능성에 매달리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실존적 한계 상황은 우리의 삶 앞에 항상 버티고 있지만 그 한계 상황을 돌파하려는 나 같은 사람도 어딘가에 또 있을 거라는 믿음이 가끔 힘이 된다.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부지런히 달려왔는데 나만 빼고 세상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는 것 같다 싶으면 무릎에서 힘이 빠진다. 크고 강력한 세계의 구조가 결국은 나를 제압할 테고 이렇게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질 것 같다는 회의가 찾아오기도 한다. ‘남들도 다 포기했으니까 너도 이제 그만 포기해.’라는 회유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그렇게 나서면 남들이 싫어해’라든가 ‘너만 멍청하게 왜 그래?’라는 협박도 끊이지 않는다. 시스템은 언제나 우리를 ‘수많은 한 사람 중의 누군가’로 묶어두려고 한다. 그래야만 통제와 관리가 쉽기 때문이다. 촘촘하게 배치된 수많은 금기는 전체의 이름으로 명령을 선포한다. ‘말 잘 듣는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환상은 ‘무엇을 위한 착한 사람인가’를 잊게 만들면서 언제나 우리를 규율과 처벌의 빗으로 가지런히 빗어 내린다.


『고슴도치 엑스』는 집에서, 학교에서, 일터와 다른 삶의 현장 곳곳에서 거대한 벽에 갇혀 답답해하는 사람에게 건네주고 싶은 이야기다. 이 작품은 한 작은 고슴도치가 온갖 금기의 벽을 넘어 전체주의의 망령으로 가득한 안개 숲을 헤치고 자신의 길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그림책을 펼치면 푸른 숲으로 가득한 면지 오른쪽에 거대한 분홍빛 구체가 놓여 있다. 수상한 위성 안테나가 달려있고 털실로 칭칭 옭아맨 것으로 보이는 이 기묘한 구체는 ‘고슴도치 엑스’가 살고 있는 도시다. 이 도시의 이름은 ‘올’인데 그것은 두 가지 숨겨진 의미를 가진다. 이 도시가 모든 사람의 삶을 한 올 한 올 감시하고 정렬하고 얽어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전체가 하나처럼 움직여야 하는 규율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른바 ‘All’의 도시인 것이다.


어떤 존재의 어떤 행위도 전체적인 시스템의 명령으로 규정되어 있는 이 도시에서 발랄하고 씩씩한 어린 고슴도치 엑스(x)는 이질적인 존재다. 이곳은 고슴도치들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아침마다 가시를 부드럽게 하는 비누로 몸을 씻어야 하는 규칙이 있기 때문에 그 어디에서도 날카로운 존재를 만날 수 없다. 날카로운 것을 소지한 사람은 당장 도시가 운영하는 일종의 특공대인 가시처리반에 끌려가 조치를 당한다. 학교는 모든 학생을 줄 세워서 가시 검사에 몰두하고 시민은 아침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전한 도시 올’이라는 도시의 찬가를 불러야 한다. 전체의 목소리와 다른 목소리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슴도치 엑스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따르지 않는 유일한 존재다. 등굣길에 뾰족한 가시를 제대로 다듬지 않아서, 친구들과 쨍쨍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해서, 자꾸만 충돌을 빚고 무거운 훈육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고슴도치 엑스가 벌청소를 하던 도서관에서 발견한 것은 날카로운 가시를 단련하여 숲속 동물들을 위기에서 구한 어느 선조 고슴도치의 역사적 기록이었다. 실로 꽁꽁 묶여 있던 그 금서의 내용을 읽고 고슴도치 본연의 삶과 가시의 의미를 깨닫게 된 고슴도치 엑스는 남몰래 가시 단련에 돌입한다. ‘올의 지배’에서 벗어나 진짜 고슴도치가 되는 외로운 훈련을 거친 고슴도치 엑스는 마침내 위장된 세계의 거짓 부드러움을 돌파할 자신만의 가시를 갖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용감하게 옳지 않은 도시 ‘올(All)’의 거대한 벽 앞에 당당히 선다. 그가 겹겹의 털실 공을 뚫고 마침내 개인의 존엄성을 인정받는 푸른 숲으로 나온 순간 그림책 속 세상은 그동안 보여주었던 희미한 모노톤의 색감을 벗어던지고 선명한 채도와 명도를 회복한다.


이 그림책은 한 사람의 어린이가 정체성을 지닌 자기 자신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시련과 그 뒤에 만나게 되는 벅찬 순간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수많은 고슴도치들이 막연한 두려움 속에 소유하지 못했던 날카로움이라는 가치를 획득하고 마침내 고슴도치 본연의 삶을 찾아나가는 엑스의 모습은 큰 감동은 안겨준다. 하지만 이 책이 단순히 성장 서사가 아닌 이유는 우리가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은폐와 금기의 목록 앞에 누구나 용감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완벽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도시 올의 시스템은 성인이 된 우리들을 더욱 교묘하고 가혹하게 몰아붙인다. 위장된 평화 안에 부드럽게 안주하라는 주문은 우리를 더욱 무기력한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모든 생명은 자신의 폐로 한껏 숨을 쉬어야 살 수 있으며 그것은 힘들더라도 순간순간 세계와 호흡하려는 용기와 도전정신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고슴도치 엑스의 도전은 인공 호흡 장치를 거부하고 자신의 폐를 되찾아 살리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시스템이 강력하게 지배하는 사회에 살다보면 우리는 숨은 죽이는 일에 익숙해진다. 다 같이 숨을 죽이다보면 언젠가 모두 숨이 끊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조용히 조용히’만을 되뇌게 된다. 그러나 호흡을 통로를 만들고 이 숲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다. 고슴도치 엑스는 그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응원의 그림책이다.


생명이 싹트는 봄은 한편으로 나른한 계절이기도 하다. 위장된 세계의 벽은 여전히 두텁고 부딪혀 돌파해야 할 문제들은 삶의 곳곳에 포진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세상은 원래 그래.’라는 무기력이 찾아올 때 고슴도치 엑스를 펼쳐보기 바란다. 섬세하게 설계된 책 속의 이미지 안에서 엑스를 대신해서 장렬하게 세상을 떠난 귀여운 존재의 정체를 잘 찾아보는 것은 흥미로운 덤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뛰어라 메뚜기

다시마 세이조 글,그림/정근 역 | 보림

다시마 세이조는 우리 곁의 살아있는 ‘고슴도치 엑스’였다. 그림책 작가로 일찌감치 큰 명성을 얻었으나 ‘자신의 책이 오직 상품으로서만 잘 팔린다는 사실’에 회의를 느끼면서 베스트셀러를 직접 절판시키기도 했고 작업실이 있던 마을에 쓰레기 폐기물 처리장이 들어오면서 생긴 고민이 계기가 되어 누구보다 치열한 환경운동가의 삶을 살게 되었던 사람이 바로 그다. 거대한 것 앞에 서 있는 내가 한없이 무력하다고 느껴질 때 이 그림책 속 메뚜기의 날갯짓은 큰 위로와 격려가 되어 준다. 메뚜기는 다시마 세이조 본인의 삶이면서 우리가 꿈꾸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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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 엑스노인경 글그림 | 문학동네
참신한 스토리와 개성적인 표현 기법으로 주목받는 작가 노인경의 이번 신작은 명랑하고 씩씩한 고슴도치의 이야기입니다. 전작보다 한층 더 어린이 독자의 감정에 친근하게 다가간 『고슴도치 엑스』는 흥미로운 설정과 탄탄한 서사 구조, 섬세하고 다정한 그림을 통해 성장의 본질을 은유하는, 활기 가득한 그림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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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은 (동화작가)

김지은. 동화작가, 아동문학 평론가. 어린이 철학 교육을 공부했다. 『달려라, 그림책 버스』,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을 함께 썼고 EBS '라디오멘토 부모'에서 '꿈꾸는 도서관'을 진행했으며, 서울시립대, 한신대, 서울예대에서 아동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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