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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영원히 힘이 되어줄 문장들

죽을 것 같던 순간에 본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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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시간이 꽤 흘러 이렇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칼럼 소재로 우려먹고 있지만 그땐 죽는줄 알았다. 그 기간을 견디게 해준 것은 나의 정다운 지인들과 지금 소개할 문장들이 아닌가 싶다.


인생에는 여러 번의 이별이 온다고 한다. 연인과의 이별, 친구와의 이별, 혹은 부모님과의 이별 등등. 나 역시 이별을 여러 번 겪었다. 그날의 옷, 신발, 공기까지 기억나는 생생한 이별도 있고, 상대방이 누구였는지도 까먹은 이별도 있다. 그 중에서도 두 가지 이별이 내 삶의 어떤 터닝포인트가 되어주었다. 하나는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사람과의 이별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늘 바라보았던 사람과의 이별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2014년 12월 16일에는 그 둘의 흔적을 내 옆에서 아쉽게도, 혹은 다행히도 찾을 수 없지만, 어떤 ‘순간’에 그 사람들이 내 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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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시간이 꽤 흘러 이렇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칼럼 소재로 우려먹고 있지만 그땐 죽는줄 알았다. 그 기간을 견디게 해준 것은 나의 정다운 지인들과 지금 소개할 문장들이 아닌가 싶다. (이 기회를 빌어 지인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이별에 지쳤는가? 혹은 아직도 그/그녀를 잊지 못했는가? 그런 분들을 위해 나의 우려 먹을수록 구수하고 맛있는 ‘사골’ 같은 이별을 견디게 해준 아름답고 곧은 문장들을 공개한다.
 
(총 4권을 소개할 예정이다. 사진을 못 찍은 1권은 지인이 빌려가서 영영 돌려주지 않을 예정인가보다. 이 글을 보는 즉시 돌려줬으면 좋겠다.)


진은영의 <詩>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수록)

비가 후드득 떨어지기 전에
흔들거리는 풀잎이야
너의 부드러운 숨결이 닿기도 전
터지는 비눗방울
네 눈빛에 꺼지는 촛불이야
알 수 없는 깜박거림, 이 오래된 어둠 속에서

빙산의 가장 깊고 투명한 곳에서
터져나오는 열기
쩍쩍 갈라지는 얼음이야
알 수 없는 곳에서 날아와
심장에 정확히 꽂힌 칼
콸콸 쏟아지며 거즈를 적시는 피처럼
사막을 물들이는 저녁노을이야
발가벗은 낮의 하얀 유방을 감싸는
검은 어둠의 실루엣

너를 보려고
이제 눈을 감아야 하나
도시 재개발 지역에서 마지막으로
무너져내리는 담벼락,
폐허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이여
나를 위해 마지막으로 벌어졌던 입술
사이로 드러난 너의 희고 고른 이여
가벼운 한숨에도 날아오르던 깃털들
나풀거리며 책상 아래로 떨어져내리는 내가 오린 종잇조각이여
바람 속에서 흔들리던 나무 아래
내 얼굴로 쏟아지던 하얀 꽃잎, 꽃잎

내가 이름을 불러보기 전에
사라져버린 것들이여
내가 입을 열기 전에 숨어버린 모음들
손을 담그기 전에 흘러가버린 강물이여

너를
만나기도 전에

알 수 없는 폭풍 속에서
나는 그 많은 나뭇잎을 다 떨어뜨렸어

- 진은영의 <詩> 전문


시인에게 ‘시’란 어떤 존재 일까. 상상도 하지 못하다 이 시를 다시 만났다. ‘너를 보려고’ 혹은 너의 ‘이름을 불러 보’기 전에, ‘너를 만나기도 전에’ 겪어야 하는 무수한 좌절들과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서야 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은 찾아온다.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 앞에서는 여지없이 손에 쥔 모든 것들을 떨어뜨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시인에게는 ‘시’로 쓰여진 자리에 우리는 다른 목적어들을 대체할 수 있다. 그 상대가 언어로 구체화되고 명징해질수록 우리는 시 속의 상황을 눈 앞에서 생생하게 그린다.


심보선의 <도주로>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수록)


집을 나서는데, 아이 하나가 담벼락에 낙서를 하고 있다. 나는 옆에 선 채 가만히 지켜보기로 한다. "영철이랑 미영이는 사랑한대요. 씨발놈아, 미영인 내꺼다." 아이는 나를 보더니 주뼛거리다가 후다닥 달아난다. 너무 곧장 달음박질쳐서, 바로 앞에서 점점 작아지는 것 같다.
 
유심히 보면 담벼락 아래에는 잘게 부서진 백묵 가루가 수북하다. 아이는 정말 온 힘을 다 주어서 꾹꾹 눌러 쓴 것이다. 허리를 굽혀 손가락에 묻혀본다. 씨발놈아, 미영인 내꺼다…… 참 부드러운 증오다.
 
가방 속엔 빈 도시락 통이라도 들었는지 소리가 요란하다. 아이는 벌써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지만 아직도 들려온다. 수치심이란 저렇게 오래도록 덜그럭거리는 것일까. 발걸음을 옮기다 나는 문득 본다. 수많은 빛살들이 같은 쪽으로 도망치다가 컴컴한 그림자들로 길바닥에 와르르 넘어지고 있는 것을

- 심보선의 <도주로> 전문


처음 읽었을 때보다 오늘 읽었을 때 더 좋았던 시가 간혹 있다. 2011년 여름에 다시 읽었던 이 <도주로>란 시가 그러했다. 처음 시집을 샀을 때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단어들에게서 그 기나긴 여름날 내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별의 끝에는 항상 내 자신이 참 싫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어찌나 이별 전후로 옹졸하고 치기 어린 사람이 되는지 내가 참 지리멸렬하게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이 시 한 편이 유난히 위로가 된다. 시 구절을 종이에 쓰거나 타이핑하다 보면 내 애증도 줄어 들어간다. 당시 내가 느꼈던 수치심과 부드러운 증오는 어디로 도주해버렸을까? 나는 그것들이 내가 죽는 그날까지 따라다녔으면 좋겠다. ‘빈 도시락 통’마냥 내가 움직이고 떠돌 때마다 덜거덕덜거덕 소리를 내어주기를.


박형서의 『새벽의 나나』


타인을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14쪽)


태국 여행을 한 번이라고 해본 사람이라면 방콕의 홍등가 쏘이 식스틴 ‘나나’라는 지명을 들어봤을 것이다. 나 역시 방콕을 가기 전, ‘나나’를 지나갔다. 소설 속 화려한 ‘나나’를 눈 앞에서 보자마자 박형서의 『새벽의 나나』 속 구절들이 떠올랐다. 태국의 후덥지근한 날씨를 고스란히 담은 듯 어지럽고 몽롱한 분위기와 상황들, 그리고 그 속에서 움직이는 태국인 매춘부 플로이, 콴, 리싸, 한국인 레오, 미국인 에릭과 같은 인물들이 저 골목 어귀에서 살아 숨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당시 내게 큰 위로가 된 소설이었다. 어떤 한 구절이 아니라 몇 페이지에 걸친 ‘화면’을 발췌하고 싶을 정도로 인상적인 정밀화를 닮은 작품이 참 좋았다.


소설을 읽는 내내 평범한 레오가 ‘개연성 없는 농담’과 같았던 ‘나나’를 왜 떠날 수 없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소설의 중반부쯤 누구나 소설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레오가 ‘나나’를 떠날 수 없는 이유는 결국 우리 인간에게 ‘삶’이란, ‘인생’이란 가끔 ‘어쩔 수 없는 운명’과 맞닥뜨리게 되는 과정 속에서 이해된다. 소설은 후에 돌아갈 진짜 남루한 현실과 사진첩 같은 환상 사이의 간격에서 번뜩이는 운명을 무미건조하지만 섬세하게 다뤄낸다. 그리고 끝내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말한다. '지금 사는 인생이 내 몫의 최선이라 믿고 싶어.’


권여선의 『분홍 리본의 시절』


다시 이삿짐을 쌀 때쯤 내 혀는 원래대로 곱게 접착되어 있었다. 현실은 한 입 속에 두 혀를 갖지 않는다. 나는 노끈을 리본 모양으로 단단히 묶으면서, 그래도 혀가 한쌍었다면, 비록 고통 속에서라도 철판 위의 곰을 춤추는 듯 보이게 하는 한쌍의 곰발바닥처럼 내 혀가 번갈아 내디딜 수 있는 찰나의 유예를 허락하는 한쌍의 분기하는 욕망이었다면, 내 삶은 지금과 아주 많이 달랐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서른살의 반이 지나가고 반이 남아 있는 갈림길에서였다, (77쪽)
- 권여선의 <분홍 리본의 시절> 중에서


대학시절 우상처럼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권여선 작가의 문장을 좋아했다. 그녀의 작품인 『푸르른 틈새』는 우리들의 청춘 교본 같은 존재였다. 소외되고 고립된 청춘들이 모순과 혼돈을 지나치는 과정이 지금 생각하면 웃기게도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그 시기를 지나치고 나서야 얼마나 그 작품을 어설프게 읽었는지 알았다. 권여선의 단편집 『분홍 리본의 시절』 도 매 해 다르게 읽힌다. 하지만 매번 같은 점도 있다. 소설을 읽으며 느끼는 ‘불쾌’의 정도가 짙어질수록 나를 견디게 한다.


*

위에 소개한 문장들 덕분에 나는 더 이상 몇몇 사람을 잃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이 두렵지 않다. 사실 사골 끓이는 재미도 나름대로 쏠쏠하다. 다만, 두려운 것이 새로 생겼다. 내가 잃은 사람이 다시 나를 찾아오는 일이다. 이 새로운 두려움을 떨쳐버릴 문장을 찾아 나는 또 다시 책을 뒤지고, 다시 읽고, 고쳐 읽는 과정을 겪어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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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유리(문학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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