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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짐, 그래서 살아가는 힘이 된다

<길버트 그레이프>로 보는 우리 시대 ‘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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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의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 충격으로 어머니는 외부 세계와 단절하고 7년 동안 집 안에서만 지냅니다. 그 결과 몸무게가 거의 200킬로그램을 육박하는 거대한 고래처럼 되었지요. 한편, 정신박약아인 막내 어니는 매번 길버트를 긴장시키고 그를 시험합니다. 높은 곳만 보면 올라가려고 하지요. 그뿐만 아닙니다. 살림에 지친 서른네 살의 누나와 사춘기에 접어든 열여섯 살 여동생 앨런까지 누구도 길버트를 편안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골목길이 있는 풍경이 늘 그렇듯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도 꽤나 소란스러웠습니다.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붙은 집들 탓에 옆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대충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우리 앞집에는 욕쟁이 할머니네가 살았습니다. 좁은 골목길에 앉아 늘 욕을 해대서 욕쟁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는데, 그 할머니 아들은 동네에서 계를 하다가 돈을 들고 야반도주를 했고, 그 집에는 엄마가 다른 우리 또래 남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반도주했던 그 집 아저씨는 밤중에 살금살금 집으로 돌아와서는 어린 남매들을 모질게도 때렸습니다. 아저씨가 온 날이면 남매의 매 맞는 소리와 비명 소리, 악을 써대는 소리로 온 동네가 시끄러웠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마루에 앉아 동무가 매 맞는 소리를 들으며 ‘인생이 뭔가?’ 하고 고민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저렇게 맞으면서도 왜 저들은 도망을 가지 않는지 그것도 궁금했습니다. 하긴 나도 초등학교 5학년 때쯤 딸 아들을 차별하는 엄마가 미워서 집을 나갔는데, 갈 데가 없어서 골목길에 몇 시간 동안 앉아 있다가 집으로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물론 엄마는 내가 가출한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괜히 배만 고팠다는 기억이 납니다. 그들 남매도 배가 고플까 봐 집을 떠나지 못했던 걸까요?




가족이라는 이름의 굴레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를 보면서 동병상련의 마음이 들기도 했고, 특히 길버트에게 깊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길버트는 한 가족의 가장입니다. 마을 전체 인구래야 천 명이 조금 넘는, 한 작은 마을에 사는 길버트는 식료품 가게의 점원으로 일하며 박봉으로 가족들을 먹여 살립니다. 어릴 적에 우리도 방 두 칸에 열 명이 넘는 식구가 살기도 했습니다. 사촌 언니들까지 함께 살았는데 아침이면 전쟁을 방불케 했습니다.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를 보면서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일찌감치 ‘현실’이라는, 결코 만만하지 않은 인생을 만나본 사람만이 공유할 수 있는 아픔과 좌절 같은 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길버트의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 충격으로 어머니는 외부 세계와 단절하고 7년 동안 집 안에서만 지냅니다. 그 결과 몸무게가 거의 200킬로그램을 육박하는 거대한 고래처럼 되었지요. 한편, 정신박약아인 막내 어니는 매번 길버트를 긴장시키고 그를 시험합니다. 높은 곳만 보면 올라가려고 하지요. 경찰이 오고 늘 같은 경고를 들어도 어니는 철탑만 보면 타고 올라갑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살림에 지친 서른네 살의 누나와 사춘기에 접어든 열여섯 살 여동생 앨런까지 누구도 길버트를 편안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그런 암담한 상황에서도 빛이 나타납니다. 바로 캠핑족 소녀 베키의 등장입니다. 그녀는 차가 고장 나서 길버트가 사는 마을에 잠시 머무르게 됩니다. 철저하게 가족에게 발목이 잡혀 있는 길버트와는 달리 베키는 그야말로 자유분방합니다. 그런 그녀에게 친근한 감정을 갖게 되는 길버트, 베키는 길버트의 숨통을 틔워주는 존재가 되지요. 그리고 그에게 묻습니다. 뭐가 되고 싶으냐고 말이지요.
“그래서 넌 뭐가 되고 싶니?”
“나? 글쎄…”
“그냥 원하는 거 한 가지만 말해봐.”
“글쎄, 일단 새것이 필요해. 새 가구, 새 집, 그리고 어머니가 에어로빅이라도 하셨으면 좋겠고, 앨런도 빨리 커야 하고, 어니의 뇌도 새것으로 바꿔주고 싶어.”
“가족들 말고 너만을 위한 것 말이야.”

나는 가족에게 무엇일까

길버트의 머릿속에는 온통 가족밖에 없고 길버트 자신의 삶은 없습니다. 가족은 우리에게 무엇일까요? 우리가 어릴 때에는 한 집안에서 아들의 공부 뒷바라지를 위해 딸은 공장으로 가거나 학업을 포기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장남은 동생들을 위해 생계라는 무거운 짐을 졌고, 동생은 장남을 위해 양보했습니다. 형제의 성공을 위한 자신의 희생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지요. 부모님의 헌신적인 희생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좁은 방, 한 이불 속에서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몸보다 소중했던 형제들에게 아무런 계산 없이 줄 수 있는 사랑에 나는 ‘가족 순결주의’라는 이름을 붙여봅니다. 그리고 어려운 처지였지만 서로 위안이 되던 그 시절의 형제애는 옛사랑이 되어 우리 곁에 영원히 남을 줄로만 믿었지요.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나이 들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 에서 주인공 그레고르는 오로지 가족을 위해서만 살다가 어느 날 아침 벌레로 변합니다. 그는 이제 가족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돈을 벌어오지도, 자식 노릇도, 오빠 노릇도 할 수 없는 그레고르는 이제 정말로 한 마리의 벌레와 같은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가족들의 외면 속에 그레고르가 죽던 날, 식구들은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소풍을 떠납니다. 극단적인 가족 이기주의를 고발한 이 작품은 물론 길버트 그레이프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가족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합니다. 구성원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도 가족이라서 서로를 사랑한다고 믿는 그 ‘순결’은 지켜질까요?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묵묵히 무거운 하루를 견뎌내던 길버트에게도 변화가 옵니다. 은둔 생활을 하던 어머니가 어니의 생일을 계기로 조금씩 달라집니다. 열 살까지 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던 어니가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이한 것이지요. 생일 파티 후 어머니는 칠 년 동안이나 올라가지 않았던 2층 침대로 올라가고 그곳에서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길버트의 족쇄 하나가 풀리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의 삶의 무게까지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던 길버트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큰 슬픔에 빠집니다. 하지만 길버트에게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길버트는 어머니의 시신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될 것을 꺼려 집과 함께 시신을 태웁니다. 활활 불타오르는 집을 지켜보는 그의 표정이 내 마음에 남았습니다.


장남의 마음으로

두 여자 형제는 제 갈 길을 가고 어니와 길버트는 베키의 캠핑카에 올라탑니다. 이제 드디어 새로운 세상으로 걸어 나가는 길이지요. 하지만 길버트 옆에는 숙제처럼 어니가 함께합니다. 그 장남의 마음, 그런 마음이 사라진 세상이라 그런지 길버트의 그 묵직했던 어깨가 다시 안쓰럽기도 합니다. 요즘도 장남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이가 많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떤 재미교포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분은 “내가 잘 살고 싶어서 미국으로 간 것이 아니라 장남의 마음으로 간 것이다”라고 하시더군요. 우리가 한창 어렵던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돈을 송금하며 동생들을 공부시키고 부모를 부양했던 셈입니다. 그때 그 ‘장남의 마음’이라는 말이 참 와 닿았습니다. 길버트가 그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었다면 바로 그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물론 가족 구성원의 희생을 바탕으로 가족이 성립된다는 건 모순이지만 누군가의 그런 희생과 배려 속에서 가족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가족 해체는 어느 특정한 집의 일이 아닙니다. 가족 형태가 변형되고 다양화되어 가족 이데올로기는 더욱 큰 갈등의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어느 집이라고 해서 그 굴레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런 때에 장남으로서 가족이라는 짐을 지고 묵묵히 걷고 있는 길버트의 마음은 아직도 그 가치가 유효합니다. 가족은 나무와 같습니다. 뿌리는 하나지만 가지는 각자 원하는 방향으로 나며 때로는 약한 바람에도 부러져버리기도 합니다. 가족이 천형이라고 슬퍼하는 이도 더러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아득합니다.

어릴 적 골목길의 추억이 산산이 부서진 것처럼 많은 것이 형체를 잃어갔습니다. 욕쟁이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그렇게 매를 맞던 남매는 이제 중년이 되어 있겠지요. 골목길의 아버지 엄마는 노인들이 되었고 동네를 주름잡던 개구쟁이들은 모두 흩어졌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가족이라는 관계가 힘을 잃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길버트가 어니를 데리고 가는 모습에서 우리 시대의 ‘형’을 봅니다.




   함께 읽을 책과 영화


두려움에게 인사하는 법

김이윤 저 | 창비

『두려움에게 인사하는 법』은 상실의 경험을 통해 더욱 단단하게 성장하는 여고생 여여의 이야기로, 담담하면서도 당차게 시련을 이겨 내는 여여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책은 주인공 여여에게 닥친 여러 가지 상실의 상황을 보여 준다. 불치병에 걸린 엄마, 딸의 존재조차 모르는 아빠, 남자 친구와의 이별 등 열여덟 살 여여에게는 녹록한 일이 하나도 없다. 김이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루하루 꿋꿋이 살아내는 여여의 모습을 차분히 그려 냄으로써, 힘든 순간 또한 지나고 나면 아름다운 삶의 흔적으로 남는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위저드 베이커리

구병모 저 | 창비

기존 청소년소설의 틀을 뒤흔드는, 현실로부터의 과감한 탈주를 선보이는 작품이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집을 뛰쳐나와 급한 마음에 동네 빵집으로 뛰어든 소년을 기다리는 것은 놀라운 마법의 세계. 언뜻 보기엔 평범한 빵집인 것만 같은 ‘위저드 베이커리’에서는 인간들의 주문에 따라 마법의 빵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 소년은 이곳에 머물며 자신의 욕망에 따라 마법의 힘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행태를 목격한다. 또한 빵을 만드는 마법사와 그를 돕는 파랑새에게서 따끔한 충고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가족에게서 느껴본 적 없는 위안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위저드 베이커리’에 대한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면서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는데…….


인생은 아름다워

로베르토 베니니(귀도), 니콜레타 브라스치(도라) | Miramax

<인생은 아름다워>는 영화 역사상 가장 손꼽히는 명작중의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영화. 2차 대전을 배경으로 독일 나치들이 유태인 말살 정책을 펴는 사회 분위기를 배경으로 평범한 유태인 귀도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영화는 그동안 잔혹하게만 그려지던 2차 대전의 유태인 말살 장면을 아이러니하게도 아주 유쾌한 코미디로 담아내어 전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비극적인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냄으로써 나치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오히려 드러내 페이소스를 더하는 작품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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