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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이건 내가 기대했던 30대가 아니야

그림에 인생을 건 한 남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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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게 서른셋이야. 서른이 넘어서까지 동생에게 기생하고 있지. 찬란한 젊음은 내게 없어. 거울 속 나는 항상 울고 있다고.” 위대한 예술가 반 고흐도 거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단다. 130년 전, 나와 비슷한 또래의 반 고흐가 그 무대 위에 있었다.

찬란한 젊음은 내게 없어. 항상 울고 있다고

‘이건 내가 생각했던 30대의 모습이 아닌데?’ 궁상스럽기 짝이 없지만, 요 며칠 전 잠에서 깨자마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정말 뜬금없는 생각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바랐던 일은 모두 20대 때 이뤄지길 바랐던 일이었고, 애초에 30대 이후의 삶이라는 그림이 없었다. 그냥 어렴풋이 적어도 30년 넘게 살았으면, 삶을 가늠해보는 통찰력이 생겨서 심리적으로 단단히 안정된 모습일 줄 알았다. TV 속 커리어우먼 언니들과 같은 직업은 아니더라도 뭔가 전문성 폴폴 풍기는 비슷한 표정쯤은 짓고 살 줄 알았다.

헌데 어떤 날은 20대 초반 한창 철이 없던 시절보다 더 철없는 짓을 하고, 20대 때도 하지 않았던 한심한 짓도 일삼는다. 40대 이후의 삶은 어떨까? 별로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지금과 비슷한 느낌일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분에 휩싸여 있을 무렵이라 그랬을까, 충무아트홀 중극장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반 고흐의 입에서 이런 대사가 내게 화살처럼 꽂혔다. “어떻게 이게 서른셋이야. 서른이 넘어서까지 동생에게 기생하고 있지. 찬란한 젊음은 내게 없어. 거울 속 나는 항상 울고 있다고.” 위대한 예술가 반 고흐도 거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단다. 130년 전, 나와 비슷한 또래의 반 고흐가 그 무대 위에 있었다.


최소한의 무대로 그려낸, 최대한의 반 고흐


창작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는 반 고흐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6개월 후, 테오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테오 역시 형의 죽음 이후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있다. 갑작스러운 치매 증상으로 기억도 흐려지고, 눈앞도 흐려지지만, 형을 위한 유작전을 준비한다. 그동안 형과 나눈 700통의 편지, 그리고 형이 보낸 그림을 정리하며, 형과 나눈 남다른 우정을 회고한다. 그렇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빈센트 반 고흐는 화랑의 수습사원으로, 견습 교사로, 광산촌의 설교사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지만, 어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돈다.

반 고흐가 편지에 곁들여 그린 그림을 보고 동생 테오는 형에게 화가의 삶을 권하고 지원해준다. 1881년, 반 고흐는 화가의 삶을 새롭게 시작한다. 동생 테오는 반 고흐에게 가족 이상의 친구고, 조력자이자 위로자였다. 반 고흐는 물질적으로만이 아니라 심적으로 동생 테오에게 많이 의존하고 있었다. 그렇게 반 고흐가 그림을 시작하는 과정이 무대 위에 배경을 가득 덮은 영상으로 펼쳐진다. 반 고흐가 사랑에 빠진 여인, 그에게는 천사였지만, 다른 이들에겐 창녀라고 불렸던 시엔의 그림도 스케치북 위에 영상으로 그려진다.

무대는 전환도 없고, 이동도 없다. 소품도 최소한으로 마련되어 있다.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는 소극장이지만, 다양한 영상과 자막을 활용해, 시공간을 효과적으로 넘나든다. 특히 반 고흐의 캔버스를 무대 위에 황홀하게 재현하는데, 3D 등 다양한 기술을 통해, 무대 위에 ‘별이 빛나는 밤에’와 ‘해바라기’ 등 그의 명작들을 펼쳐 놓는다. 전체 벽면과 무대 바닥까지 활용하고 있는 작품이라, 뒷자리에서 무대의 전체적인 풍경을 아우르는 것도 좋겠다.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간 것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는 무엇보다 형과 동생이 부르는 감미로운 노래가 매력적인 작품이다. 형을 그리워하는 동생의 아련한 발라드, 그리고 지친 삶 속에서도 그림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반 고흐가 부르는 낭만적이고도 애절한 넘버는 감미롭고 아름답다. 광기에 휩싸여 자신의 귀를 자르고 급기야 스스로 목숨까지 끊었다는 반 고흐. 그의 자화상을 보면, 그 특유의 거친 성미가 고스란히 느껴지지만, 무대 위의 반 고흐는 김보강과 라이언의 미성을 통해 훨씬 감수성 넘치고 고뇌가 깊은 남자로 그려진다.

대사 또한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 사랑하는 여인, 시엔을 두고 고흐는 이렇게 노래를 한다. “서로의 고통을 나누어 먹네/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힘든 거라고 서로 위로해.” 요즘 가요의 노랫말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근사한 시구처럼 다가오는 가사가 많다. 거기다 어쿠스틱 기타와 피아노 선율이 무대 위의 감미로움을 한껏 발산한다.

내가 ‘생각과 다른 30대’를 운운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고흐는 30대에 그야말로 출구 없는 궁핍함과 가난에 시달렸다. 게다가 게이에 이어 창녀를 사랑한다고 선언하면서, 목사였던 아버지에게 한없이 경멸을 당했다. 마음 약한 고흐는 아버지를 위해 사랑을 저버리면서, 결국 끝까지 아버지의 사랑도, 연인의 사랑도 얻지 못하고 괴로움만 떠안은 채 방 안으로 숨어버렸다. 게다가 그림은 좀체 팔리지 않았고, 동료들도 그의 ‘이상한’ 그림을 이해할 수 없다고 손가락질했다. 고흐로서는 미치지 않고는 버틸 재간이 없었달까.

무엇이 그를 자꾸만 삶의 벼랑 끝으로 밀어냈는지 뮤지컬은 섬세하게 짚는다. 고흐와 테오, 최소한의 등장인물과 최소한의 무대. 이 조건을 활용해 뮤지컬은 좀 더 고흐 내면에 파고들고자 애를 쓴다. 고흐의 절절한 슬픔에 공감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이 작품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창작의 고통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고흐의 대사 한 줄이 위로가 될 테지만, 예술가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면, 연이어 흘러나오는 그의 발라드가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 뮤지컬의 미덕은, 고흐가 삶과 예술 앞에서 한 없이 괴로워했다는 걸 보여주면서도, 그가 얼마나 예술과 삶을 사랑했는지, 얼마나 많은 순간 기뻐하고 감동했는지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생명력 넘치는 자연이 그의 가슴을 뛰게 했고, 그 생명력 자체를 캔버스에 옮기고 싶어, 고흐는 붓을 들었다. 고흐는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삶의 무게에 비하면 비할 바 없이 가볍고 하찮은 행복 속에서 그 아름다운 그림들이 만들어졌다. 그토록 작고 귀한 행복이어서, 고귀한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테오는 말한다. “그의 광기가 광고 거리가 되느냐”고. “광기 앞에 반 고흐의 진심은, 그림은 중요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광기마저 신화가 된 반 고흐. 지금과는 너무나도 달랐던 그의 삶을 이야기하는 뮤지컬은, 반 고흐의 그림 속에 담긴 진심을 전하고자 한다. 요즘의 대중들은 반 고흐에게 열광한다. 뮤지컬은 그 열광과 경탄이, 그저 반 고흐 신화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림 자체에서 느낀 것인지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내가 꿈꿨던 삶은 아닐지라도


비록 30대의 시간을 채 마치지 못했지만, 반 고흐가 바랐던 30대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림이 잘 팔려서 동생에게 빚진 것들을 갚고 싶었을 거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화가로 인정받고 싶었을 거다. 배고픔 없이 외롭지 않게 그림을 그리고 싶었을 거다. 대단히 허황된 것도 아닌데, 그의 삶은 그에게 그 어느 것도 허락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 같이 반 고흐는 거울을 보고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하나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반 고흐는 ‘별이 빛나는 밤’ ‘감자를 먹는 사람들’ ‘자화상’ ‘해바라기’ ‘까마귀가 있는 밀밭’을 그려냈다. 당시에는 누구도 반기지 않았지만, 자기 마음속의 풍경을 기어이 꺼내 사람들 앞에 내보였다. 그가 꿈꿨던 삶은 아니었지만, 그 속에서 그는 꿈꿨던 일을 해냈다.

이 뮤지컬을 보고 그래, 나 역시 내가 만족스러운 상황은 아니지만, 내가 꿈꿨던 일들을 이뤄내야겠어! 하는 건설적인 각오를 한다, 는 건 우스꽝스러운 일이고, 다만, 어떤 일들은 내가 기대하는 방식의 루트를 거치지 않고 진행되기도 한다는 것. 빗나간 화살일지라도 명중이 가능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당장은 크게 위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기억해 둘 만한 생각이다.

라이언과 김보강이 빈센트 반 고흐를, 김태훈과 박유덕이 테오 반 고흐를 맡아 열연한다. 테오 역을 맡은 배우는 극 중 아버지, 평론가, 고갱 등 일인다역을 맡아 연기하는데, 박유덕과 김태훈의 안정적이고 탄탄한 연기 덕분에 무리 없이 즐길 수 있다. <빈센트 반 고흐>라는 직설적인 제목이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반 고흐에게 관심이 있다면, 그의 삶과 그림을 들여다본다는 가벼운 마음으로도 즐겁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맨 처음 반 고흐 형제가 함께 부르는 노래이자 마지막 장면에 반복되어 반 고흐가 부르는 노래가 상당히 근사하다. 공연을 보고 나면 작고, 따뜻한 반 고흐의 다락방에 머물다 온 느낌이 든다. 온기가 있는 작품이다. 4월 27일까지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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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수영

summer2277@naver.com
인생이라는 무대의 주연답게 잘, 헤쳐나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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