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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94>, 나정에게 보내는 편지

비로소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된 우리의 스무 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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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보며 그저 설레는 것도, 하염없이 아픈 것도, 미래를 생각해하며 답답해하는 것도…….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가버릴 거야. 내가 그랬듯 너도 나중에 깨닫게 되겠지. 너의 스무 살이 지나갔음을, 너도 모르게. 그러니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저 즐기라는 거야. 함께 울고 웃는 모든 순간들을 선물 같았다고 기억할 수 있도록.

안녕, 나정.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94년에 스무 살을 보낸 너는 이미 나보다 훨씬 나이를 많이 먹었을 텐데, 드라마 속에서 한창 스무 살을 만끽하고 있는 네게 ‘언니’라고 부르기도 좀 어색하고, 그냥 나정이라고 부를게. 안녕, 나정아.

요즘 머리가 많이 아프지? 아마도 무척 혼란스러웠을 거야. 이십 년 가까이 친남매나 다름없이 지내온 쓰레기 오빠가 갑자기 남자로 보인다니 말이야. 게다가 첫눈 오는 날 용기내어 고백도 했는데, 아무리 네가 어떤 말도 하지 말라고 했어도 어쩜 그렇게 좋다 싫다 말이 없는지. 지켜보던 나도 답답하더라. 좋아하지 않으면 잘해주지나 말던지. 툴툴대면서도 네가 하는 부탁을 모두 들어주고, 허리가 아픈 네가 잠을 못 이룰까봐 밤새 곁을 지켜주고, 무심한 듯 챙겨주는 모습이 사실 여자들을 더 설레게 한다는 거, 알면서 그러는 걸까? 사실 너도 쉬운 결심은 아니었잖아. 이십 년 가까이 죽은 오빠의 빈자리를 지켜온 쓰레기 오빠인데 사귀게 되면 가족을 잃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늘 쓰레기 오빠를 친아들처럼 생각하시는 부모님도 걸릴 테고.


갑자기 너에게 다가온 칠봉이도 네게는 부담이었겠지. 대학리그 A급 투수인데다 일본 프로야구팀에서 눈독까지 들이는 그 잘난 아이가 왜 너를 좋다고 하는지 몰랐을 거야. 그리고 네 생각보다 칠봉이가 훨씬 더 많이, 오래전부터 너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 또한 너는 몰랐겠지. 너를 고작 세 시간 보기 위해 왕복 열두 시간이나 걸리는 삼천포까지 버스를 타고 달려왔고, 배고픈 너와 함께하려고 먹었던 저녁을 또 먹고, 너는 끝내 풀지 못한 하트 모양의 매직아이를 찾아 보여주고, 고된 훈련 뒤에도 편한 제 집을 두고 너희 하숙을 찾아가고, 네가 쓰레기 오빠를 보며 짓는 미소와 눈빛을 뒤에서 아프게 지켜보았다는 사실을, 너는 모를 거야.

그래도 나는 네가 고백하길 잘한 것 같아. 그대로 두었다면 아마 네 마음은 점점 커졌을 거야. 그 진부한 말도 있잖아. 기침과 사랑은 숨길 수 없다는. 네가 직접 말하지 않았다 해도 쓰레기 오빠는 이미 알고 있었을 거야. 네 마음이 그저 동생의 마음이 아니라는 걸. 어쩌면 처음의 사랑은 대부분 그런 게 아닐까? 열감기처럼 몸이 달아오를 듯 아팠다가 또 뛸 듯이 기뻤다가. 그 사람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잔뜩 의미를 부여하고 내 식대로 해석하고 말이야. 그 사람 앞의 내 행동은 또 어찌나 바보 같은지. 잠이 드는 그 순간까지 백 번도 넘게 머릿속에서 반복재생해보잖니. 그래봤자 내일 만나면 또 엉뚱한 말만 늘어놓을 텐데. 쓰레기 오빠 앞에서 네가 그렇듯, 칠봉이 또한 네게 그런 마음일 거야. 누구나 처음은 기억하고 싶은 것보다 잊고픈 게 많은 법이니까.

하지만 스무 살을 이미 저만치 보내버린 지금의 나로서는 네가 참 부럽고 예쁘다. 스무 살이기에, 그 청춘의 시간 속에서만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너는 무척 답답하고 마음 아프겠지만 너도 머지않아 그 시간들이 빛났음을 알게 될 거야. 무엇보다 네게는, 친구들이 있잖아. 해태, 빙그레, 칠봉이, 윤진이, 장국영, 신촌하숙 사람들. 다들 각자의 짐을 끌어안고 낯선 서울 땅에 모여 어색한 동거를 시작했지만, 어느새 그 짐을 함께 나누어 메는 사이가 되었잖니. 의지할 곳 하나 없던 서울살이, 모두 깍쟁이들만 있을 것 같은 서울 땅에 특별한 ‘가족’이 있다는 건 얼마나 든든한 일인지.
위로란 진심이 나눠지는 순간 이루어지는 법이다.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다면 그저 바라보고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다행스럽게도 내겐 나도 모를 내 진심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
-<응답하라 1994> 9화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중에서
무엇보다 너희의 모습을 보며 나는 스무 살이 나를 훌쩍 통과해 갔음을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게 됐어. 사실 드라마를 보면서 내가 가장 많이 느꼈던 감정은 설렘도 부러움도 아닌 서글픔이었거든. 그때는 있었지만 지금은 내 옆에 없는 것들, 이를테면 너무 멀어져버린 관계들이나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이 함께 생각났던 거야. 너희들이 그토록 힘겹게 통과하고 있는 스무 살이 내게는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다시 오지 못할 시간이기에, 바로잡을 수도 없다는 사실이 서글픔으로 다가왔어. 물론 그사이 내가 갖게 된 것들도 무수히 많지만, 그저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는 것들이 분명 있거든.

그런 감정들에 휩싸여 드라마를 지켜보다가 문득, 스무 살이라는 시간에게 대해 어떤 ‘감정’을 갖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비로소 난 스무 살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어. 폭풍우 한복판에서 파도를 직접 볼 수 없듯, 우리가 어떤 시간을 통과할 때는 그게 내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잖아. ‘아, 그땐 그랬었구나’를 깨달을 때는 이미 그 시간을 보내버리고 난 후일 거야. 서글픔이라는 감정을 느낌으로서 나는 비로소 스무 살이 나를 통과해 지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그리고 이 문장이 생각났지. 내가 좋아하는 김연수 소설가가 한 산문집에서 했던 말이야. 너도 한번 들어볼래?
자고 일어났더니 햇살도 많이 기울고 피로도 풀렸기 때문에 우리는 빠른 속도로 출발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여름의 절정이 지나갔다면, 그날 낮에, 우리가 낮잠을 잘 때, 우리도 모르게 지나간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내 청춘의 절정이 지나갔다면, 그것 역시, 아마도.
결국 <길 위에서>는 출판되지 못했다. 7번 국도를 다녀온 뒤에도 내 삶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여름은 지나갔다. 되돌아볼 때 청춘이 아름다운 건 무엇도 바꿔 놓지 않고, 그렇게 우리도 모르게 지나가기 때문인 것 같다.
-김연수, <지지 않는다는 말> 중에서
누군가를 보며 그저 설레는 것도, 하염없이 아픈 것도, 미래를 생각해하며 답답해하는 것도…….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가버릴 거야. 내가 그랬듯 너도 나중에 깨닫게 되겠지. 너의 스무 살이 지나갔음을, 너도 모르게. 그러니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저 즐기라는 거야. 함께 울고 웃는 모든 순간들을 선물 같았다고 기억할 수 있도록.


Present라는 영어단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선물, 그리고 현재. 어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선물은 현재, 바로 지금 눈앞의 시간이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비록 늘 투닥거리고 지지고 볶아댔지만, 함께 기대며, 살 부대며 행복했던 시간들. 1994년, 우리는 선물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응답하라 1994> 6화, ‘선물학개론’ 중에서
그리고 고마워. 내게 스무 살과 마주할 시간을 주어서. 덕분에 비로소 작별을 고할 수 있게 되었어. 여태껏 놓지 못하고 있던 아쉬움과 미련까지도, 놓아버릴 수 있게 되었어. 이제 또다른 시간을 맞이하며 살아야지.

안녕, 잘 지내. 나와 너의 스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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