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그맨〉 | 영화
이명세
한때 1980년대 한국 영화에 빠져 살았다. 영화사적 관점에서 이 시기의 작품을 논할 지식과 소양은 내게 없지만 적어도 지금 우리가 앓고 사는 숱한 병증들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다. 1988년에 제작되어 이듬해 개봉한 영화 〈개그맨〉은 이명세 감독의 데뷔작이다. 찰리 채플린 흉내를 내며 야간 업소에서 희극 공연을 하며 살아가는 주인공과 어느 변두리 이발소 주인과 세상으로부터 반쯤 벗어난 젊은 여성. 그리고 무장 탈영병으로부터 얻은 소총. 이들의 목표를 영화를 찍는 것이다. 영화는 현실과 몽상을 부지런히 오가며 웃음과 비웃음을 만들어낸다. 쌍팔년도라는 말은 사실 1960년대에 통용되던 말이다. 단기 4288년, 즉 1955년을 가리키던. 비유적으로 낡고 고리타분한 과거를 의미한다. 지난 시간과 시간을 건너온 존재들을 분별없이 희화화하지 않았으면 한다. 생각해 보면 단기 4388년(2055년)도 그리 멀지 않았다.

〈페르시아의 왕자(Prince of Persia)〉 | 게임
브로더번드(Broderbund Software)
성 꼭대기에 갇혀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구해내야 한다는 설정. 286 컴퓨터로 구현되던 조악한 그래픽, 반복되는 전자음. 게임의 방법 또한 간단했다. 달리기와 뛰기로 함정을 건너고 벽을 오르고 또 중간중간 나타나는 적을 무찌르며 성의 꼭대기까지 가면 되는 것이었다. 여러 모험을 거치고 거의 정상에 올랐을 때 난관을 만났다. 이제껏 한 번도 뛰어넘어보지 못한 긴 허공이 등장한 것이다. 아무리 타이밍을 잘 맞춰 점프 버튼을 눌러도 게임 속 주인공은 벼랑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결국 허공을 건너는 방법을 알지 못한 채 게임을 그만두었다. 그러다 몇 해 전 지인과 게임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 과거 내가 알지 못했던 〈페르시아 왕자〉의 공략법을 뒤늦게 듣게 되었다. 게임 속 그 긴 허공을 건너는 방법은 멀리 뛰거나 높이 뛰거나 빠르게 달리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천천히 걷는 것. 걸으면 허공에서 절로 길이 생겨나는 것이라 했다. 게임 밖 현실에서 우리가 살아온 방법처럼.
진은영 글/이수지 그림 | 초록귤
‘시인은 오래 슬퍼하는 사람’이라는 진은영 시인의 말을 기억한다. 크게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슬퍼하는 것도 아니라 다만 오래 슬퍼하는 것. 어쩌면 슬픔은 주택담보대출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한다. 단번에 혹은 단기간에 절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것을 20년 아니면 30년이라는 길고 긴 시간에 기대어 조금씩 나누어버리는 것. 흩어지게 하는 것. 물론 그만큼 오래오래 슬픔과 이자를 짐처럼 안고 살아야 하겠지만 적어도 나의 하루와 평범한 일상을 완전히 짓누르게 두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슬픔의 진정한 반의어는 기쁨이 아니라 호들갑일 것이다.
정희진 저 | 창비
타자를 향한 인간의 표현 방식은 흔히 말하는 돌직구 화법 혹은 사이다 화법으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지식과 정보를 전달할 때는 어느 정도 필요하다. 예컨대 회사 업무 회의에서 “이번 기획은 마치 송편 같은 거잖아요.”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필연적으로 회의 시간은 마냥 길어진다. 어쩌면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식과 정보만 전하고 살지 않는다. 감정과 기억과 사유를 누군가에게 내보일 때도 많다. 이럴 때일수록 느리고 멀고 험한 길을 택해야 한다.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양궁으로 비유하자면 나의 화살을 상대의 정중앙에 쏘는 게 아니라 저 멀리 풀이 우거진 숲에 쏘는 것이다. 그러고는 상대방에게 내가 쏜 화살을 찾아낼 정서적 시간과 여유를 주어야 한다. 이때 비로소 소통과 언어가 내재하고 있는 폭력이 제거된다. 어렵고도 어렵게, 하지만 끝내 우리는 만나야 한다.
이상 저 | 민음사
오랫동안 나는 이상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비운의 천재라든가 식민지 근대인의 병약한 초상이라는 세간의 평가에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쉽고도 편한 방식으로 정의 내린 것이다. 오히려 금홍과 변동림 사이에서의 사랑, 화가 구본웅과의 교우 같은 신변의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1910년 태어난 이상은 어려서부터 미술에 관한 재능을 인정받지만 양아버지의 반대로 꿈이 꺾인 채 건축을 공부한다. 이상이 시인으로 산 시간은 5년 남짓이다. 물론 당대 사람들은 이상의 첨단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진 폐결핵과 이른 죽음. 어쩌면 이상 작품에 담긴 숱한 분열과 난해는 전근대는 물론 현대의 한계와 병폐까지 넘어서고자 한 선도적인 의지였을 것이다. 죽음을 두어 해 앞두고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난 이상은 그곳의 세련에 경도되거나 동화되기는커녕 이내 허상이고 가짜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비슷한 시기를 지나온 우리의 숱한 예술들과는 사뭇 다른 인식. 이상은 진짜 천재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박준
2008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마중도 배웅도 없이』,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계절 산문』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박재삼문학상, 편운문학상, 유심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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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lucia
2026.10.13
좀 호들갑스런 제가 송구하네요^^;...
ralahj
2026.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