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책장
박준 시인의 책장 | 예스24
추억의 게임 〈페르시아의 왕자〉 속 긴 허공부터 정희진의 『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까지.
글: 박준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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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맨〉 | 영화

이명세

 

한때 1980년대 한국 영화에 빠져 살았다. 영화사적 관점에서 이 시기의 작품을 논할 지식과 소양은 내게 없지만 적어도 지금 우리가 앓고 사는 숱한 병증들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다. 1988년에 제작되어 이듬해 개봉한 영화 〈개그맨〉은 이명세 감독의 데뷔작이다. 찰리 채플린 흉내를 내며 야간 업소에서 희극 공연을 하며 살아가는 주인공과 어느 변두리 이발소 주인과 세상으로부터 반쯤 벗어난 젊은 여성. 그리고 무장 탈영병으로부터 얻은 소총. 이들의 목표를 영화를 찍는 것이다. 영화는 현실과 몽상을 부지런히 오가며 웃음과 비웃음을 만들어낸다. 쌍팔년도라는 말은 사실 1960년대에 통용되던 말이다. 단기 4288년, 즉 1955년을 가리키던. 비유적으로 낡고 고리타분한 과거를 의미한다. 지난 시간과 시간을 건너온 존재들을 분별없이 희화화하지 않았으면 한다. 생각해 보면 단기 4388년(2055년)도 그리 멀지 않았다. 



〈페르시아의 왕자(Prince of Persia)〉 | 게임

브로더번드(Broderbund Software)

 

성 꼭대기에 갇혀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구해내야 한다는 설정. 286 컴퓨터로 구현되던 조악한 그래픽, 반복되는 전자음. 게임의 방법 또한 간단했다. 달리기와 뛰기로 함정을 건너고 벽을 오르고 또 중간중간 나타나는 적을 무찌르며 성의 꼭대기까지 가면 되는 것이었다. 여러 모험을 거치고 거의 정상에 올랐을 때 난관을 만났다. 이제껏 한 번도 뛰어넘어보지 못한 긴 허공이 등장한 것이다. 아무리 타이밍을 잘 맞춰 점프 버튼을 눌러도 게임 속 주인공은 벼랑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결국 허공을 건너는 방법을 알지 못한 채 게임을 그만두었다. 그러다 몇 해 전 지인과 게임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 과거 내가 알지 못했던 〈페르시아 왕자〉의 공략법을 뒤늦게 듣게 되었다. 게임 속 그 긴 허공을 건너는 방법은 멀리 뛰거나 높이 뛰거나 빠르게 달리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천천히 걷는 것. 걸으면 허공에서 절로 길이 생겨나는 것이라 했다. 게임 밖 현실에서 우리가 살아온 방법처럼.  


『오늘은 나의 생일이야』

진은영 글/이수지 그림 | 초록귤

 

‘시인은 오래 슬퍼하는 사람’이라는 진은영 시인의 말을 기억한다. 크게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슬퍼하는 것도 아니라 다만 오래 슬퍼하는 것. 어쩌면 슬픔은 주택담보대출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한다. 단번에 혹은 단기간에 절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것을 20년 아니면 30년이라는 길고 긴 시간에 기대어 조금씩 나누어버리는 것. 흩어지게 하는 것. 물론 그만큼 오래오래 슬픔과 이자를 짐처럼 안고 살아야 하겠지만 적어도 나의 하루와 평범한 일상을 완전히 짓누르게 두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슬픔의 진정한 반의어는 기쁨이 아니라 호들갑일 것이다.

 


『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

정희진 저 | 창비

 

타자를 향한 인간의 표현 방식은 흔히 말하는 돌직구 화법 혹은 사이다 화법으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지식과 정보를 전달할 때는 어느 정도 필요하다. 예컨대 회사 업무 회의에서 “이번 기획은 마치 송편 같은 거잖아요.”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필연적으로 회의 시간은 마냥 길어진다. 어쩌면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식과 정보만 전하고 살지 않는다. 감정과 기억과 사유를 누군가에게 내보일 때도 많다. 이럴 때일수록 느리고 멀고 험한 길을 택해야 한다.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양궁으로 비유하자면 나의 화살을 상대의 정중앙에 쏘는 게 아니라 저 멀리 풀이 우거진 숲에 쏘는 것이다. 그러고는 상대방에게 내가 쏜 화살을 찾아낼 정서적 시간과 여유를 주어야 한다. 이때 비로소 소통과 언어가 내재하고 있는 폭력이 제거된다. 어렵고도 어렵게, 하지만 끝내 우리는 만나야 한다. 

 

 

『이상 시 전집』

이상 저 | 민음사

 

오랫동안 나는 이상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비운의 천재라든가 식민지 근대인의 병약한 초상이라는 세간의 평가에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쉽고도 편한 방식으로 정의 내린 것이다. 오히려 금홍과 변동림 사이에서의 사랑, 화가 구본웅과의 교우 같은 신변의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1910년 태어난 이상은 어려서부터 미술에 관한 재능을 인정받지만 양아버지의 반대로 꿈이 꺾인 채 건축을 공부한다. 이상이 시인으로 산 시간은 5년 남짓이다. 물론 당대 사람들은 이상의 첨단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진 폐결핵과 이른 죽음. 어쩌면 이상 작품에 담긴 숱한 분열과 난해는 전근대는 물론 현대의 한계와 병폐까지 넘어서고자 한 선도적인 의지였을 것이다. 죽음을 두어 해 앞두고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난 이상은 그곳의 세련에 경도되거나 동화되기는커녕 이내 허상이고 가짜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비슷한 시기를 지나온 우리의 숱한 예술들과는 사뭇 다른 인식. 이상은 진짜 천재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2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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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lucia

2026.10.13

슬픔의 반의어로 호들갑...
좀 호들갑스런 제가 송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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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ahj

2026.10.07

슬픔은 주택담보대출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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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2008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마중도 배웅도 없이』,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계절 산문』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박재삼문학상, 편운문학상, 유심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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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으로, 1910년 8월 20일에 태어났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현재 서울대학교) 재학 중 학생 회람지 [난파선]의 편집을 주도하면서 시를 발표했고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29년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수가 되어 근무하던 중 12월에 건축학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된다. 1928년 졸업 앨범에서 평생 동안 필명이 되는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는 1930년 [조선]에 첫 소설 『12월 12일』 연재를 시작하며 등단했다. 이후 『이상한 가역반응』 『파편의 경치』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내며 활발한 문학 활동을 펼친다. 1934년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를 연재했는데, 난해하고 파괴적인 형식에 독자들의 항의를 받고 연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오감도 작가의 말」은 연재 중단 후 쓰여 해당 잡지에는 발표되지 않았다. 1936년「날개」를 발표하여 큰 화제를 일으켰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날개」는 이상의 대표 소설이다. 이듬해는 1937년 2월 사상불온 혐의로 일본 경찰에 유치되었고, 같은 해 4월 17일 도쿄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사망하였다. 현대시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며, 1930년대에 있었던 20년대의 사실주의, 자연주의에 반발한 모더니즘 운동의 기수였다. 그는 건축가로 일하다가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전위적이고 해체적인 글쓰기로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사를 개척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겉으로는 서울 중인 계층 출신으로 총독부 기사였던 평범한 사람이지만, 20세부터 죽을 때까지 폐병으로 인한 각혈과 지속적인 자살충동 등 평생을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던 기이한 작가였다. 한국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시와 소설을 창작한 바탕에는 이런 공포가 늘 그의 삶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910년에 태어나 1912년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의 집에 장손으로 입양되었고,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신명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마쳤다. 손가락이 잘리고 빈궁하게 살았던 친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와 자신을 입양한 백부에 대한 증오심으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영민하여 학업 성적은 우수하였고,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질이 있어 학창시절, 직장시절 내내 그림에 꿈을 품고 열중하였다. 또한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유창한 일본어 실력이 있었고, 예술적 이상향으로 동경(도쿄)을 꼽았다고 한다. 스스로를 선각자이며, 천재, 모더니즘의 기수이자 전위예술의 선구자라고 자처했는데, 식민지 시대임에도 민족적인 자각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범세계적이고 현대적인 문명에 심취하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는 한국 고유의 색채를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유럽이나 일본 문학계에 유행하던 모더니즘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실제 생활은 나태하고 난잡, 무기력했다고 전해지며,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잡지 [조선(朝鮮)]의 1930년 2월호부터 12월호까지 9회에 걸쳐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이기도 한 『12월12일(十二月十二日)』을 」이상」이라는 필명으로 연재하였고, 1931년 『이상한 가역반응』을 발표하며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BOITEUX·BOITEUSE』 『오감도』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했고, 1932년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조선]에 발표하면서 비구(比久)라는 익명을 사용했으며,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하였다. 이후 [구인회]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고,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다. 미친수작, 정신병자의 잡문이라는 혹평을 받아 결국 30회로 예정되어 있었던 분량을 15회로 수정하여 연재가 중단되었지만 열화와 같은 찬반양론을 일으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소설 『지팡이 역사』 수필 『혈서삼태』와 『산책의 가을』 등을 발표하였고, 1935년에는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연재되는 동안 삽화를 맡아 그리기도 하는 등 창작 활동은 계속하였다. 친구인 구본웅(具本雄)과는 신명(新明)학교 동기동창일때부터 각별히 친했으며, 대학입학시 그가 선물한 스케치박스(사구상)에서 필명인 이상이 나왔다는 설이 전해진다. 화가 구본웅이 인쇄소 창문사에 이상의 일자리를 주선하여 근무하면서 1936년, 구인회의 동인지인 [시와 소설]을 창간하고 편집해 발간하지만 1집만을 발간하고 그만둔다. 이후 [중앙]에 『지주회시』 [조광]에 『날개』 『동해』를 발표하였다. 백부에게서 유산을 물려받고 가족들과 함께 살았으나, 가족들의 무지와 가난에 곧 질려서 보름만에 나와버렸다. 1933년, 무질서한 생활로 폐병이 심해져 각혈까지 한 그는 총독부 기사직을 그만두고 구본웅과 함께 황해도 백천에서 요양 생활을 시작했다. 그 곳에서 그의 연인인 금홍을 만났다. 서울에 올라와서도 금홍을 못잊고 방황 하다가 제비 다방을 마련해 그녀를 마담자리에 앉혔다. 그는 금홍과의 만남 이후에도 여러 여급들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이들을 무척 사랑하긴 했지만 그 행복이 오래간 적은 없었다. 다만 이들과의 관계에서 문학적 영감을 얻어 작품들을 집필하였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그는 금홍과 권순희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가면 『봉별기』, 『날개』, 『지주회시』 그리고 『종생기』등과 전문시 음화시, 문명 비평류의 수필 등을 산더미처럼 쏟아내었다. 이 수많은 작품들이 술에 절어있던 한밤 중에 쓰여졌다는 사실은 ‘천재 이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그러던 그는 이화여전 출신인 여류문인이자 친구 구본웅의 이복동생인 변동림(이상이 죽은 뒤 순화 김환기의 부인이 된 김향안 씨)과 결혼을 하였다. 그녀는 금홍과 달리 빈민굴에서 고생하는 그의 가족과 깊은 친분을 맺었다. 하지만 그녀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그녀는 카페의 여급으로 일하며 입에 풀칠을 하게 되었다. 건강악화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 등, 국내에서의 비참한 현실과 마주친 이상은 도피하기 좋아하는 그의 성격탓인지, 가족과 아내를 남겨둔 채 1936년에 동경행을 선택했다. 동경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가난을 절절히 겪던 그는 『종생기』, 『환상기』, 『실락원』, 『실화』, 『동경』 등의 수많은 작품을 엮어냈고, 『봉별기』를 [여성]에 발표하였다. 그의 마지막 여자인 변동림은 『동해』 『단발』 구필 『행복』 『종생기』의 『선』 『실화』의 『연』 등에서 지금까지 살아 숨쉬고 있다.이듬해 2월, 극도로 악화된 건강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이상은 1937년 불량선인(사상불온) 혐의로 운 나쁘게도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어 옥살이를 치렀다. 건강이 악화되어 거의 시체나 다름없게 된 그는 보석을 허가받아 평소 동경제대의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항상 여자와 문학에 빠져 살던 이상은 결국 날지 못한 채 변동림이 구해온 레몬의 향기를 맡으며 짧은 생을 마감했다. 유해는 화장하여, 경성으로 돌아왔으며, 같은 해에 숨진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유실되었다. 20세기 한국문학사에 내장된 최고의 형이상학적 스캔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집이 출간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