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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션] 때때로 같은 책을 두 번 산다 | 예스24
올해는 같은 책을 두 번 살 일이 유독 많았다. 한동안 절판되었던 책들이 새로운 제목과 표지와 번역으로 우르르 재출간됐기 때문이다.
글: 금정연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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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물은 흐르고, 우리도 흐른다. 그러니 우리는 같은 책을 두 번 읽을 수도 없는 셈이다.

 

같은 책을 두 번 살 수는 있지만.

 

지난 글에서 말했듯 나는 알렉산드라 호로비츠의 『On Looking: Eleven Walks with Expert Eyes』를 두 번 샀다. 한 번은 『관찰의 인문학』이라는 제목으로, 다른 한 번은 『이토록 지적인 산책』이라는 제목으로—같은 원서를, 심지어 같은 번역가가 번역한 책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그래도 제목은 다르니 조금 덜 부끄럽다고 해야 할까?

 

때론 완전히 같은 책을 두 번 사기도 한다. 이유는 다양하다. 책을 잃어버려서. 잃어버린 건 아닌데 어디에 뒀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나쁜) 친구에게 빌려줬다가 돌려받지 못했거나 (좋은) 친구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물론 가장 솔직한 이유는 ‘전에 샀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가 될 테지만, 다행히 우리 뇌는 그런 사실조차 잊어버리도록 진화해 왔다. 계속해서 살아야 하니까. 계속해서 사야 하기도 하고…

 

올해는 같은 책을 두 번 살 일이 유독 많았다. 한동안 절판되었던 책들이 새로운 제목과 표지, 새로운 번역, 나아가 새로운(증보된) 내용으로 우르르 재출간됐다. 코로나로 멀어진 관객들을 다시 극장으로 부르기 위해 검증된 과거의 명작들을 한동안 잇달아 재개봉했던 것처럼, 재출간 열풍(이라기엔 미적지근하지만)도 해마다 ‘단군이래최대불황_new_newnew_new333_이번엔진짜_사람살려.hwp’를 갱신하는 출판계의 불황 탓은 아닌가 하는 근심이 들기는 한다.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역시 반가운 마음이 훨씬 크다.

 

그런데 잠깐, 품절된 책을 중쇄한 것도 아니고 이것저것 바꿔서 재출간한 것을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나? 정당한 의문이다. 하지만 이건 철학 에세이가 아니다. 서지학 논문도 아니다. 그냥 신간을 소개하는 글—코너 이름부터가 ‘신간 큐레이션’이다. 그렇다면 ‘신간’이란 무엇인가? ‘소개’는 무엇이며, ‘큐레이션’은 또 무엇인가?

 

인생은 이토록 수많은 의문으로 가득하고, 그것이 우리가 책을 사는 이유다. 의문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산다. 살아간다. 그리고 이 글은 본론으로 넘어간다. 

 

*


언젠가 문학에 대한 초심을 찾고 싶을 때면 테리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을 읽는다는 누군가의 리뷰를 본 적이 있다. 내가 문학에 대한 초심을 찾고 싶을 때 읽던—과거형이다—책은 롤랑 바르트의 『글쓰기의 영도』다. 제목부터 영도(zero degree) 아닌가?


 

『글쓰기의 영도』가 『영도의 글쓰기』로 재출간됐다. 한국의 바르트 독자라면 모를 수가 없는(동시에 일종의 양가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김웅권 번역에서, 기 드보르의 『파네지릭』과 몽테뉴의 『몽테뉴 여행기』와 우엘벡이 쓴 두 권의 평전을 번역한 이채영 번역으로. 출간되자마자 샀는데, 후반부에 실린 비평 몇 개만 읽었다가 최근에야 ‘글쓰기’에 대한 이론적 논의가 있는 1부와 2부를 읽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지금까지 바르트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오해하면 안 된다. 나는 지금 번역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다. 까맣게 밑줄을 긋고 메모하며 내 멋대로 바르트를 오독하던 나의 지난 독서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물론 번역에 대한 말이기도 하고…

 

말이 나온 김에 몇 부분만 비교해 보자.

 

“한 시대 전체가 예컨대 문학적 소양을 통해 소설들을 구상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시대 전체는 분석을 통해 하나의 역사를 구축할 수 있다. 따라서 소설과 역사에 동시에 확장된 서사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말해 여전히 역사적 한 시기의 선택이나 표현이다”(김웅권, 31쪽)와 “한 시대에서는, 예를 들자면 서간체 소설을 구상할 수 있었고, 또 다른 시대에서는 분석을 바탕으로 하나의 역사를 실천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서사는 소설과 역사 모두에서 확장되는 형식으로서, 대체로 하나의 역사적 순간의 선택이나 표현으로 남을 뿐이다”(이채영, 35쪽)는 다르다. 전자의 문장이 (약간의 오역에 더해) 추상적이라면, 후자의 문장은 훨씬 구체적이다. 바르트가 문제 삼는 것이 ‘서사라는 형식의 역사성’이라는 사실이 선명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인공—혹은 현명한 자—이 발견된다 해도, 그 역시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라는 어떤 조작적인 거북함, 다시 말해 모든 초기의 어려움인 단순한 어려움을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실천적 모습의 동작으로서(텍스트 앞에서 수행하게 되는 최초의 동작) 이러한 어려움이 근대 언어학이 성립시킨 어려움 자체라는 점이다”(김웅권, 167쪽)와 “이 영웅, 또는 이 현자를 찾아냈다고 해도 그는 곧바로 실행상의 난관, 곧 첫 시작의 어려움이라는 어떤 단순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이 문제는 겉으로는 실용적이고 행위적인(텍스트 앞에서 취해질 최초의 몸짓을 말한다) 듯 보이지만, 사실 이는 현대 언어학을 낳은 바로 그 난제이기도 하다”(이채영, 204쪽)는 또 어떤가? ‘모든 초기의 어려움인 단순한 어려움’이 무엇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전자에서는 논리적인 인과 관계가 완전히 뒤집혀 있다.

 

전반적으로 새로운 번역본이 훨씬 이해하기 쉬운 한국어 문장을 사용한다. 복잡한 프랑스어 문장을 최대한 한국어로 풀어 쓴 듯한 느낌. 개념어의 번역에 있어서도 ‘형태-형식’, ‘도덕-윤리’, ‘특이성-단일성’, ‘담화-담론’, ‘실존-존재’처럼 새로운 번역(후자) 쪽이 대체로 더 합당해 보인다. 그렇다고 지난 나의 오독을 번역 탓으로 돌리는 건 좀 치사한 일이 될 것이다. 과거의 내가 바르트에게서 과거의 문학을 청산하고자 하는 욕망을 읽었다면, 지금 나는 단절과 동시에 언어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바르트를 본다. 그럼 나는 다른 책을 읽은 걸까? 아니면 다른 내가 책을 읽었다고 해야 하나?

 

*

 

필립 르죈의 『자서전의 규약』은 조금 다른 경우다. 번역자는 같다. 근데 번역이 다르고(수정) 심지어 내용도 조금 다르다(증보). 1998년 출간되었던 책에서는 빠져 있었던 미셸 레리스 부분을 포함했고, 프랑스 개정판에 실린 르죈의 발문도 추가되었다. 그 사이 레리스의 『성년』이 번역되었으니 잘된 일이다(지금은 품절이지만).

 


수정된 번역에 대해 말하자면, 생각보다 훨씬 전면적이다. 읽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루소의 『고백록』 챕터를 보자. 구판의 제목은 ‘아이들의 처벌, 루소의 고백록 읽기’이고 ‘읽을 수 없음’이라는 파트로 시작한다. 반면 신판의 제목은 ‘아이들 벌주기, 루소의 고백 읽기’이고 ‘읽기의 거부’라는 파트로 시작한다.

 

“랑베르시에(Lambercier) 양에게서 볼기를 맞은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루소는 “고백이라는 어두운 진흙탕의 미로 속으로 가장 힘든 첫발”을 내딛는다. 이 첫발은 가장 유명한 발걸음이지만, 어쩌면 그 어떤 것보다도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발걸음이며, 이것은 또한 가장 읽혀지지 않은 텍스트일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황당해서 독자로 하여금 어떤 것도 숙고할 수 없게 한다. 독자는 즉각적으로 반응을 해야 할 것처럼 느끼고, 그래서 읽을 시간이 없는 것이다. 그 순간 가장 우세한 것은 읽을 수 없음을 교묘히 감추어버리는 유머의 반응이다.”(구판, 73쪽)

 

“랑베르시에 양에게 볼기를 맞은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루소는 “고백이라는 어두운 진흙탕 같은 미로 속으로 가장 힘든 첫발”을 내디뎠다. 그것은 가장 유명한 발걸음이지만, 어쩌면 가장 이해받지 못한 발걸음이고, 가장 읽히지 않은 텍스트일 것이다. 상식에 너무 어긋나서 사고를 완전히 가로막는다. 독자는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할 것 같아서 제대로 읽을 틈이 없다. 결국 감정적 반응만 중요해지고, 읽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은 감춰진다.”(신판, 71쪽)

 

그건 그렇고, 혹시나 해서 말하자면 이 글은 번역 비평이 아니다. 신간 소개—정확한 이름은 ‘신간 큐레이션’이다. 『자서전의 규약』은 언젠가 자서전—정확히 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글쓰기—에 한참 관심이 있던 때에 읽은 책이다. 조금 딱딱하게 보일 수 있지만, 자서전이라는 장르나 루소, 지드, 사르트르, 레리스 등에 관심이 있다면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내 관심은 일기로 옮겨 갔고, 르죈이 일기에 대해 쓴 글들을 모은 선집인 『On Diary』의 원서도 사두었다. 물론 읽진 않았다. 『일기에 대하여』의 빠른 번역 출간을 촉구한다.

 

*

 

마지막은 세라 베이크웰의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이다. 2017년 『살구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지만 저조한 판매량을 기록하며 절판된 책이, 제목을 살짝 바꾸고 9년 만에 돌아와 화제의 베스트셀러—철학자가 와글와글 등장하는 640쪽짜리 책이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다니!—가 되었다. 어쩐지 ‘세상에 이런 일이’에 제보해야 할 것 같은 이야기다.


 

번역자는 같다. 제목은 거의 같지만 ‘살구’가 빠졌다. 가장 다른 것은 가격이다. 2017년 구판이 38,000원이었고, 절판 이후 중고가가 한때 16만 원까지 치솟았지만(거래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신판의 가격은—놀라지 마시라, 두구두구두구두구—26,000원이다.

 

여기에도 약간의 사연이 있다. 처음 인터넷 서점에 등록된 서지 정보를 본 어느 독자가 구판에 있던 주, 참고 도서, 찾아보기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출판사에서는 해당 자료를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게 조치할 예정이라고 밝혔지만, 독자들의 항의로 결국 판매 중지, 그리고 몇 주 후 삭제했던 부분들을 모두 포함한 형태로 책이 출간되었다.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 되었던 걸까? 아니면 중고가가 16만 원까지 ‘상한가’를 쳤던 책이 26,000원에 출간되었으니 ‘저점매수’를 해야 한다는 심리가 작용했던 걸까?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좋은 책이 잘 팔리는 건 좋은 일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나는 이 책의 구판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2012년에 출간된 베이크웰의 『어떻게 살 것인가-삶의 철학자 몽테뉴에게 인생을 묻다』(504쪽)를 갖고 있었고, 읽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같은 저자의 또 다른 ‘벽돌책’을 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자문했고, 답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동안 책은 절판되었다. 그리고 쭉쭉 오르는 중고가를 바라보며 ‘5만전자’, 아니 ‘10만전자’, 하다못해 ‘20만전자’에라도 샀어야 하는데, 하며 땅을 치는 개미 투자자처럼 방바닥을 긁는 대신, 2025년에 출간된 베이크웰의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652쪽)을 샀다. 물론 읽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재출간된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을 사서 사흘 만에 후루룩 읽어버렸다는 이야기. 잠깐, 그러면 구판과 재출간된 신판을 비교하는 이 글의 컨셉에 안 맞는 거 아닌가?

 

하지만 책이 주식은 아닌 것처럼, 이 글은 어떤 종류의 학술 논문도 아니다. 그러니 이 글의 본분에 충실하게 말하자면—이 책은 재미있다. 뭐랄까,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 정도로. 그리고 책장 구석에서 먼지 쌓인 메리 워낙의 『실존주의』와 게리 콕스의 『실존주의자로 사는 법』을 꺼내고,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1,296쪽)를 장바구니에 담게 할 정도로…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을 읽었다면 다음으로는 안드레아 울프의 『위대한 반항자들』을 읽어도 좋겠다. 18세기 말 독일의 예나에 모인 철학자와 시인들이 어떻게 ‘낭만주의’라고 불리게 될 사조를 만들었는지를 따라가는 이야기다. 그리고 704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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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의 글쓰기

<롤랑 바르트> 저/<이채영> 역

출판사 | 필로소픽

자서전의 규약

<필리프 르죈> 저/<윤진> 역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

<세라 베이크웰> 저/<조영> 역

출판사 | 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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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연

읽고 쓰는 사람. 『아무튼, 택시』, 『담배와 영화』, 『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 『한밤의 읽기』, 『모두 일요일이야』 등을 쓰고 『문학의 기쁨』, 『우리는 가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 등을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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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프랑스 북부 쉐르부르 태생. 출생과 성장과정에서 다양성에 대해 열린 태도를 체득했다. 청년시절 폐결핵으로 고등사범학교 진학과 교수자격시험을 포기한 바르트는 소르본느에서 고전 문학을 전공한 후 젊은 시절 루마니아와 이집트의 대학에서 프랑스어 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바르트가 프랑스 지성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53년 『글쓰기의 영도』와 1957년 『현대의 신화』를 잇달아 발표하면서. 문학비평에서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저작은 1970년에 발간된『텍스트의 즐거움』. 이 책에서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을 선언했다. 그 이전까지의 독서와 문학비평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저자가 던져놓은 문장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르트는 문학작품이란 완벽하게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선조들과 문화가 남겨놓은 것을 조립한 것에 불과하다는 관점에서 저자가 아닌 『필사자(scripteur)』라는 용어를 썼다. 바르트에 따르면 저자와 독자는 일방적인 생산자와 소비자가 아니라 텍스트 속에서 서로를 찾고 만나고 텍스트를 즐겨야 할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만화, 사진, 패션 등 현대 부르주아 사회를 둘러싼 신화를 읽어내고 그 베일을 벗겨내려는 노력을 기울이던 그는 1980년 미테랑 사회당 당수가 주최한 회식에 참석하고 걸어서 귀가하다 트럭에 치인 후유증으로 한 달 후 사망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 구조주의자, 후기 구조주의자 등 '현기증 나는 전이'를 통해 현대 프랑스와 세계에 가장 활력적인 사유 체계의 개척자로 손꼽힌다. 소설, 영화, 만화, 사진, 패션 등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다양한 상징들에 대한 『읽기』를 시도하며 1960년대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현대문학과 이론의 전위적 움직임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바르트의 저서 중『모드의 체계』는 바르트 기호학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대표적인 저술로 꼽히는 책이다. 그것은 1967년 그 자신이 기호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할 수 있다고 행복하게 생각하던 시절이 산물이기 때문에, 바르트 기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저술이다.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비판한 자서전이다. 20세기 후반 가장 탁월한 프랑스 지성 가운데한 사람으로 꼽히는 그는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문단의 표징(表徵)으로 자리잡고 있다. 문학비평가이자 구조주의 작가로서의 바르트의 문학관과 글쓰기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사랑의 단상』은 괴테를 비롯한 치열한 '사랑의 담론들'에 대한 지극한 글읽기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의 '사랑의 단상'은 '사랑의 이야기'나 '사랑의 철학'이 아니다. 저자가 한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이 책은 사랑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나 수필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극'화한 글쓰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