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야 할 일은 때가 되면 어떻게든 하게 되지만, 하고 싶은 일은 좀처럼 때가 오지 않는다. 『안식월 일기』는 그 ‘때’를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결심한 일본문학 번역가 권남희의 에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마스다 미리, 오가와 이토 등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겨온 저자는 생애 첫 안식월을 맞아 오래도록 품어온 버킷 리스트인 ‘도쿄 한 달 살이’를 실현하러 떠난다. 글로 옮겼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작품을 통해 맺어진 작가와 편집자, 독자들과의 인연이 여행 곳곳에서 이어진다. 그렇다고 낭만적인 순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번역은 베테랑이지만 길 찾기는 초보, 혼자 밥 먹기는 여전히 큰일인 저자의 좌충우돌이 더해져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해야 할 일에 치여 잠시 잊고 있던 ‘하고 싶은 마음’을 다시 들썩이게 만드는 유쾌하고 씩씩한 안식월의 기록이다.
『스타벅스 일기』 이후 거의 3년 만에 신작 에세이로 독자들을 만나게 되셨습니다. 『안식월 일기』를 출간한 소감이 궁금합니다.
아마 두어 시간이면 다 읽을 정도로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쉬운 글이었을 텐데요. 의외로 작업 기간이 굉장히 길었답니다. 그래서 후속작 출간이 늦어졌는데요. 마치 설국의 터널을 빠져나온 느낌이에요. 그 터널을 나와서 본 눈 풍경만큼이나 예쁜 표지를 만나서 기쁘고요. 저만 알고 있기에는 아까운 얘기들을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한 달간 떠나는 ‘안식월’은 누구나 꿈꾸지만 선뜻 실행하기는 쉽지 않은데요. ‘더 늦기 전에 가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을까요?
아무래도 ‘나이’이지 않을까요. 60이 되기 전에 가고 싶었어요. 집에서 곱게 쉬는 안식월은 앞으로 원하지 않아도 갖게 되겠지만, 어딘가로 떠나는 것은 살아 있는 날 중 가장 젊은 지금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58세에 떠났죠. 또 다른 이유는 책에도 썼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이니 마음먹었을 때 저지르자는 마음이 컸어요.
책 속에서 길을 정말 많이 헤매시더라고요.(웃음) 요조 작가님께선 “누군가의 덤벙거림이 세상에 이렇게 유익할 수 있다니”라고 말씀하셨더라고요. 여행 중 길을 헤매다 오히려 ‘의외의 행운’을 만났다거나 가장 기억에 남는 아찔한 순간이 혹시 있을까요?
요조님이 저의 덤벙거림을 그렇게 해석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길치에게 나보다 더한 사람이 있구나 하는 자신감을 주었으면 좋겠어요. 저보다 더한 길치는 실생활에서 만난 적이 없답니다. 길을 헤맨 덕분에 만나게 된 것이라면 인류애일까요. 다들 어여삐 여기시고 친절하게 대해 주어서 감동할 때가 많았어요. 아찔함은 가마쿠라에서 오는 길에 전철을 잘못 탔을 때, 좀 당황했어요. 가마쿠라에서 도쿄역까지 한 시간 걸리는데, 거의 두 시간 걸려서 돌아왔거든요. 가마쿠라 출신인 일본 편집자에게 라인으로 물어가며 더듬더듬. 길을 헤매다 드디어 목적지를 찾았을 때의 쾌감이 정말 크죠. 모르는 게 좋을 쾌감이긴 하지만.

이번 안식월을 통틀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장면이나 하루를 꼽는다면 무엇인가요?
질문을 듣자마자 한 달 동안의 기억과 장면이 수많은 컷으로 동시에 떠올라 고르기가 힘든데요. 가장 기억나는 것은 아침에 일어나면 행복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어요. 현실의 삶은 매일 아침 그렇게 행복한 느낌이 들진 않잖아요? 심지어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은 날도 있고. 그런데 매일 일어나면 오늘은 어디 갈까, 뭐 먹을까, 하는 생각에 즐거웠어요. 그리고 어떤 장면을 꼽는다면, 지금 문득 생각났는데 오가와 이토 씨 집의 책장에 제가 번역한 책들이 쌓여 있던 모습요. “와, 이거 다 제가 번역한 책이네요.” 그랬었죠.
책을 읽은 따님의 반응은 어떠셨나요?
딸은 제게 냉정한 비판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이어서 가장 두려운 독자이기도 한데요. 이번에도 딸이 방문을 닫고 혼자 책을 읽는 동안 수능 칠 때 시험장 밖에서 기다릴 때처럼 초조한 기분으로 기다렸답니다. 몇 시간 뒤, 문을 열고 나오며 “엄마, 정말 잘 썼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를 타선 없이 다 재미있었어. 그리고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이렇게 나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정말 존경스러워. 나 울었어”라고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최고의 찬사를 해주었어요.

책에는 여행의 설렘만큼이나 ‘나이 듦’에 관한 이야기도 솔직하게 묻어납니다. 그런데 작가님은 나이 드는 일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보다 그 안에서 재미를 찾아내시는 것 같아요.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예전보다 오히려 편해지거나 재미있어진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은 딱 한 가지인데요. 책에서도 과할 정도로 나오지만, 태생이 소심한 쫄보잖아요. 그런 주제에 불의를 보면 부글거리는 체질이에요. 당연히 부글거리기만 하고, 한마디 하지 못하고 와서 두고두고 혼자 씩씩거렸는데요. 이제 나이 믿고 좀 대담해졌어요. 마트에서 손님이 직원에게 부당한 시비를 걸 때, 나서서 편을 들기도 하고요.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낯선 사람에게 용기 내어 말도 잘 걸고요. 그런데 딸이 액면가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으니 주민등록증 걸고 다니래요.(웃음)
여행을 다녀온 뒤 여행 전과 달라진 것이 있나요?
살아오며 ‘돈 모아서 뭐 해야지’라는 생각을 별로 한 적이 없는데, 다녀온 뒤로는 ‘돈 모아서 여행 가야지’라는 생각을 계속하게 됐어요. 그리고 한 달 살기가 일생일대의 대단한 이벤트처럼 엄청 큰마음을 먹어야 하는 일이 아님을 깨달았어요. 떠나는 것에 주저함이 없어지더라고요. 실제로 도쿄 한 달 살기를 하고 온 그해 가을에 안동 한 달 살기를 하고 왔답니다. 뭐든 처음 한 번이 두렵지, 해보고 나면 별것 아니구나, 싶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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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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