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누구나 소통을 기대합니다. 세상은 대화로 해결하라고 말하죠. 완벽한 소통이라는 환상이 개인에게도, 사회에도 존재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과연 진정한 소통은 가능한가? 소통의 문제가 “평생의 관심사”였던 정희진 선생님은 『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 – 소통 불가능성의 인문학』에서 이러한 질문에, 근본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한 구조를 분석하며 “언어가 다른 사람과 되도록 말을 섞지 않는 게 좋다”고 답합니다. 상호 배려가 없는 소통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폭력적이기까지 하다는 이야기죠.
똑같은 언어를 가진 개인은 결코 없다는 것, 소통에 반드시 위계가 존재한다는 것, 통념은 상식이 아니라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것, 어떤 목소리는 구조적으로 배제된다는 것. 이러한 조건 안에서 사회적 약자는 언제나 자신을 해명해야 하고, 부당한 질문에 답하기를 요구받습니다. “사람들의 입은 막을 수 없다는 ‘중구난방(衆口難防)’은 민주주의의 토대”(13쪽)임에도 ‘다수결’을 이야기하는 사회에서 소수자는 언제나 자신의 언어를 억압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해야 할 것은 소통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가 아니라 “나를 돌보는 소통, 나를 보호하는 침묵, 나의 언어를 만들어가는 데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쏟을 것”(24쪽)입니다.
완벽한 소통은 불가능하다
2015년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적대적인 상대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상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합니다.”라고 하신 말씀이 오래 남았는데요. 이번 책, 『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가 그에 관한 내용이었어요. ‘소통 불가능성’이라는 주제가 책이 되기까지 어떤 시간이 있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저를 노출하기 싫어서 책에 담지 못한 부분인데요. 이러한 책을 쓰게 된 이유는 저 스스로가 완벽한 소통을 원했기 때문이에요. 너무 완벽한 소통을 원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관계에서 ‘을’이 되고 상처받았습니다. 완벽한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상처받으면서 깨달았어요. 그러면서 공부를 해보니 이미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언어의 한계와 언어의 속성에 대해 말했더라고요. 언어의 의미는 이미 지연(遲延)되는 것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변할 수 없다 등의 내용을 공부하면서 소통 불가능성을 확신하게 된 과정이 있었어요.
강연을 기반으로 한 책이고요. 말글로 서술하는 선택도 눈길이 갑니다. 더 많은 대중을 고려한 것일까요?
일단 저는 ‘대중적’이라는 것을 조금 다르게 생각해요. 대중은 많은 사람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집중 호우 같은 것이죠. 짧은 시간 안에 좁은 지역에 많은 양의 비가 내리는 게 집중 호우잖아요? 그처럼 대중적이라는 것은 대중이 특정 시기에 관심 갖는 사안이에요. 대중의 관심 사안은 언제나 이동 중이죠. 예를 들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200만 부 팔렸는데요. 대중적인 책은 아니거든요.
소통은 모든 사람의 고민이죠. 심지어 자기 명령을 관철시켜야 하는 사람들도 소통을 고민하기 때문에요. 그냥 인간의 조건이라 봐야 할 텐데요. 기존의 소통 관련 책들은 대안 중심이었거든요. 저는 대안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소통이 안 되는 구조에 대해 쓰려고 했어요. 완전히 구조적인, 인문학 책을 구상했던 거고요. 근본적으로 말의 속성이나 언어 자체의 한계를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그러다 편집자님의 제안으로 대화 사례를 모아 뒷부분에 ‘나를 지키는 최소한의 소통법’ 챕터를 담게 됐어요. 사실 이 주제로 10여 년 동안 강의를 해와서 머릿속에 외울 정도인데, 글로 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작업이어서 저도 깨달아가며, 배워가며 새로운 글이 되었어요.
삶을 해명하는 쪽은 많은 경우 사회적 약자라는 것, 그리하여 사회적 약자에게는 마치 2개 국어가 필요한 것처럼 “기존의 언어와 자신의 언어가 모두 필요”(80쪽)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대화로 해결하라’는 사회의 언사는 그 자체로 권력의 언어, 억압의 언어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닿게 돼요.
그렇죠. 각자 가진 언어가 다르잖아요. 인간은 모두 사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성, 당파성, 정체성을 가지고 이 안에서 소통합니다. 그리고 기존의 언어는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정해진 것이지요. ‘주류’의 언어는 자신의 경험과 기존 언어가 일치하지만, ‘주변’의 경험은 기존 언어와 불일치하지요. 사실, 이 부분이 이 책의 요지입니다.
게다가 요즘은 미디어가 다른데 어떻게 대화가 가능하겠어요. 미디어가 메시지인데 말이에요. 예를 들면 이메일과 카톡은 다른 미디어이고, 다른 메시지예요. 어떤 미디어를 선택하는가에 따라 메시지가 이미 다른 것이죠. 저는 언어가 다른 사람과 되도록 말을 섞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원래 약자가 더 상대방을 고려, 배려해야 합니다. ‘흑인’이 ‘백인’의 무지를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요. 그러니 상호 배려가 없는 상태에서의 대화는 무의미해요. 또 개인 성향의 문제인데, 제가 시간낭비를 싫어해요.(웃음) 술자리 같은 모임을 싫어하는데, 시끄럽고 의미 없는 대화가 엄청 오가는 곳이잖아요. 그와 달리 두 사람이 집중적으로 어떤 주제에 대해서 얘기하면 얻는 게 많죠. 물론 그것도 의미 있는 대화여야 하고요.
그럼에도 완벽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환상’이 존재하는 것도 같거든요. 왜 이런 환상, 오해가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요? “소통이란 원래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소통의 실패를 나의 성격이나 태도 문제로 돌리지 말자”(23쪽)는 것을 이 책의 목표로 밝히셨는데요.
통치 시스템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경우 소통의 반대말을 폭력이라고 생각하지만 대화 자체도 굉장히 폭력적인 과정이에요. 호모 사피엔스의 오만이라고 할까요. 인간이 스스로를 언어적 동물이고, 사회적 동물이라며 다른 종과 구별 짓기 때문일 텐데요. 정찬 선생님의 소설에 인간의 최초 언어가 동물의 발자국을 쫓아다니는 것이었다는 구절이 나와요.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사냥을 위해 동물 발자국을 해독하던 게 인간 최초의 언어였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먹는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를 구성하고, 권력 관계를 만들면서 변화한 것이죠.
지금 말의 권력은 통치자가 갖고 있어요. 저는 서울 토박이고요. 부모님 모두 서울에서 사셨어요. 때문에 서울에 사는 것 자체가 기득권이고, 혜택받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 했어요.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남성과 똑같은 거죠. 그런데 강준만 선생님 책을 읽고 너무나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어떤 부분에서 굉장한 구조적 가해자구나, 엄청난 기득권층이구나 깨달았죠. 생각해보면 대학교 때 친구들이 저에게는 서울말을 썼는데 부모님과 통화할 때는 제가 못 알아듣거나 (제게는) 어색한 사투리를 썼어요. 두 개의 언어를 쓰는 거죠. 하지만 저는 서울말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잖아요. 그러한 위계가 있는 것이고요. 남성들이 자신이 남성이라는 사실을 의식할 필요가 있듯이, 소통에도 위계가 있다는 것을 의식할 필요가 있어요. 말로써 통치가 가능한데 그 말이라는 것은 백인, 중산층, 남성이성애자, 비장애인의 언어잖아요.
“전체, 객관, 중립이 있다고 믿”(142쪽)는, 이 착각과 오해 역시 완벽한 소통에 대한 환상을 부추기잖아요.
말은 어떤 의미에서든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똑같은 사람도 없고, 우리는 모두 사회 구조에 의해 다른 생각을 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공통점을 통념에서 찾아요. 사람들은 통념을 상식, 심지어 합리성이라고까지 말하는데요. 그렇지 않아요. 지배 이데올로기가 통념이에요.
완벽한 소통은 힘과 폭력으로 굴복시킨 상태와 대타자와의 대화, 둘뿐인지 모른다고 하셨어요. 웃음이 터지는 동시에 서늘해지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두 가지마저 따져보면, 소통이 아니죠. 폭력으로 굴복시키면 당장은 해결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 굴복 당한 상대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잖아요. 예를 들어 군대에서 상병이 이등병에게 폭력을 행사해도 이등병이 상병에게 동의하는 건 아니듯 말이에요. 근본적으로는 소통이 아닌 거예요. 대타자와의 대화도 마찬가지예요. 그건 결국 자기와의 소통인데요. 자기와의 소통도 잘해야죠. 자기가 누구인가를 모색하는 과정에서의 중얼거림이 테레사 학경 차의 『딕테』잖아요. 한편 중얼거림이 자신을 향하지 않고 밖으로 향해서 타인한테 강요하는 게 일부 기독교인들이 하는 종교에 대한 강요고요. 사실 성숙한 종교가 아니면 대타자와도 소통이 안 되는 거죠.

부당한 질문에 휘둘리지 않기
한편 선생님은 “‘현실 그대로 말하기’를 아주 좋아한다(173쪽)”고요.(웃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을 것 같습니다.
지배 이데올로기가 통념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사람은 그 속에 살기 때문에 착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어떤 현실은 통념과 다른 경우가 굉장히 많거든요. 저는 그냥 저의 현실을 말할 뿐인데도 상대는 당황해요. 내가 당황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당황하게 하는 말하기 방식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에피소드가 정말 많죠.(웃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 제가 입학한 학교의 여학생 비율이 9%였어요. 한 남자 동료가 아주 직접적으로 저한테 “너는 시집가도 되는데 왜 대학을 들어왔냐”고 말했어요. 덧붙여 “너처럼 대학에 안 와도 되는 애가 들어왔기 때문에 자기 친구가 재수를 한다”고 했는데요. 거기에 저는 “나는 결혼 안 하고 수녀 될 거다”라고 했어요. 그때 제 현실이 그랬거든요. 어머니가 수녀 지망생이셨고요. 저를 수녀로 만들고 싶어 하셨어요. “결혼을 안 하겠다”가 무슨 페미니즘 논리가 아니고요. 있는 그 사실 그대로 얘기한 거예요. 그런데 걔가 아무 말 못 하더라고요.
어떤 발화는 자신의 결핍을 고백하는 일일 뿐이라는 말이 떠올라요.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에서 나오는 말이기도 하고요. 아주 오래전에 어느 남초 대학에서 시간 강사로 일할 때였는데요. 한 남학생이 “제가 군대 가서 삽질하는 동안 선생님은 토플 봐서 시간 강사라도 하시잖아요”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20대였으니까, 2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공격한 거죠. 거기에 저는 “저는 토플 안 봤는데요”라고 했어요. 현실 그대로요. 물론 나중에 봤어요.(웃음)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 제일 좋아하는 대사가 있어요. 영화사 대표가 황동만에게 “네 인생이 한심하다”고 말하는 장면인데요. 그런 말을 들으면 보통 사람들은 기가 죽어요. 비참함을 느끼게 마련이죠. 그런데 황동만은 이렇게 말하거든요. “내 인생이 왜 네 마음에 들어야 하는데?”라고요. 그렇듯 소통을 어긋나게 함으로써 상대가 뭔가를 깨닫게 하는 거죠. 그러면 소통에 성공한 것 아닌가요?
전선을 옮기는 방식의 소통이네요.
어느 자리에서 남성분이 자기는 남성과 여성이 다르다고 생각한다고, 어떻게 양성이 평등할 수 있냐고 계속 물으신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양성 평등에 대해 잘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이 양성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어요. 『양성평등에 반대한다』라는 책도 냈다고 했더니 그 사람이 너무 충격을 받더라고요. 진짜 양성 평등에 반대하느냐고 되물으면서요.(웃음) “맞다, 나는 양성 평등에 반대하는데 이유는 인간이 양성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고 따라서 ‘양성 평등’이란 말을 쓰면 안 된다고 했죠. 그랬더니 뭔가 깨달은 듯했어요.
그러나 많은 여성들, 사회적 약자들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당황해요. 분노도 하고요. 때문에 그 질문에 휘말리게 되죠. 사회적 약자는 부당한 질문을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그냥 내 존재를, 나의 사회적 위치를 온전히 인정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말하면 됩니다. 현실 그대로 말을 하면 대부분 상대의 질문 자체가 틀린 것이기 때문에 질문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어요.
소통 불가능성을 인식하고 나면 분명히 찾아오는 해방감이 있더라고요. 자기 보호가 가능해지는 것이죠. “신문(訊問)에 답하”(65쪽)지 않고 “심리적 저지선을 정하”(72쪽)면서요. 이때 “언제나 스스로를 보호하는 선에서 실천해야 한다”(174-175쪽)고 강조하셨는데요.
왜냐하면 사회적 약자들은 늘 어떤 식의 폭력 상황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죠. 물리적 폭력이나 언어적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자기 보호가 먼저예요. 그런데 많은 경우 나 자신도 보호할 언어가 없으면서 누구를 설득하려고 하잖아요. 그때부터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어요. 비유하자면 한국 사람이 영어 원어민인 사람과 대화하는 것과 같아요. 상대의 논리가 틀렸어도 내 영어가 유창하지 못하니까 버벅거리게 돼요. 그런 의미에서 말을 섞지 않는 방식으로 소통할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권력은 듣는 자한테 있어요. 한국에는 아무한테나 질문하는 문화가 있는데요. 결혼은 했는지, 학교는 어디 나왔는지 마구 질문하죠. 지금의 혐오, 여성 혐오나 동성애 혐오 등은, 한편으로 말 걸기에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에 대해 무지하고 말을 걸 줄 모르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세상이 자기 편이라고 생각하니까 혐오를 하는 것 같고요. 그러니까 여유 있게 자기 품위를 지키는 방식으로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하고 대처하면 오히려 그쪽이 무시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겠죠. 혹은 내 질문이 잘못됐나? 생각해 보게 될 테고요. 대응 안 하는 것이 바람직할 때가 있다고 봐요.
“상대에게 굳이 자신의 내밀한 영토를 내어주지 않겠다는 자기보호”(167쪽) 차원에서 침묵에 관해 말씀해 주신 부분이 좋았습니다. 침묵의 가능성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침묵은 여성주의나 탈식민주의에서 매우 중요하게 연구하는 분야이기도 해요. 마를렌 고리스(Marleen Gorris) 감독의 〈침묵에 대한 의문(A Question Of Silence)〉이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어요. 여성학 교과서 같은 영화인데요. 그야말로 침묵에 대한 문제 제기죠.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The sound of silence〉 역시 침묵의 소리가 있다는 것이고요. 그렇듯 예를 들어 장애인 집단이 말을 안 한다고 해서 목소리가 없는 것이 아닌 거예요. 침묵을 선택한 것과 대응하지 못한 것은 완전히 다르고요. 어차피 못 알아듣는 상대에게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 침묵을 선택하는 거예요.

조율로서의 소통
철저한 ‘자기알기’(90쪽)가 필요하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쉬운 작업이 아니에요. 평생의 숙제이기도 할 테고요.
저는 그것이 삶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처음부터 자기 위치를 알고 삶을 살거나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유목적 주체, 과정적 주체라는 말이 나온 것 같아요. 그러니까 자기 포지션을 처음부터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알아가는 것이고요. 어느 순간에 잠깐 깨닫고, 때로는 잊기도 하는 거죠. 어느 때는 제 포지션이 여성이지만 어느 때는 나이 든 사람이고, 어느 때는 건강 약자인 것처럼 각자의 포지션이 어느 포지션의 누구를 만나서 대화하느냐에 따라 아주 달라진다는 걸 알면 돼요. 그런 차원에서는 언제나 자기 포지션을 알기 위해 노력한다기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기 포지션을 설정하는 사고하는 게 중요하죠.
제가 비판한 사건이기도 했는데요. 제주도에 예멘 난민 500여 명이 들어왔을 때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사람들이 ‘예멘 난민들이 제주 여자들을 성폭행한다’며 예멘 남성을 문제 삼았어요. 하지만 이건 한국에 사는 중산층 여성들이 예멘 난민한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죠. 예멘 여성과 예멘 남성 간에 젠더 문제나 폭력 문제가 있다면 우선은 ‘그들의’ 문제예요. 만약 예멘 여성들의 도움 요청이 있다면 그때 얘기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저 말은 난민에 대한 인권 침해죠. 그것이 대표적으로 페미니스트 포지션의 문제, 사건이었다고 봐요.
난민을 배제하고, 성소수자를 배제하는 페미니즘에 대해 입장을 분명히 하셨지요.
실제로 그런 페미니스트들이 있지요. 그들에게 저는 일명 ‘쓰까’(‘섞다’의 방언으로 교차성 페미니스트를 비하하는 말)고요. 하지만 인간이 쓰까, 하이브리드한 존재 아닌가요? 인간의 삶을 어떻게 한 가지 모순으로만 설명할 수 있겠어요?
완벽한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동시에 나를 바꾸려고 하는 소통이 필요하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나로만 머물지 않고 관계를 통해서 질적인 변화를 이루자고 하신 인터뷰도 떠오르고요.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는 말이 허무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한자 그대로 보면 인생에는 항상적(恒常的)인 상태가 없다는 의미잖아요. 즉 늘 변화한다는 뜻이죠.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예요. 늘 상황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죠. 소통이 저는 굉장히 중요하고, ‘똑똑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떤 상황, 맥락인가에 따라 자신의 위치를 다시 파악하는 것이 나를 변화시키고 상대를 변화시키는 것이지 고정된 내가 있어서 어디에 참여, 개입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관계 속에서 나와 상대가 서로 조율해 가는 상태가 소통이라고 생각해요. 자기 얘기를 떠드는 게 아니라 튜닝(tuning), 조율하는 것이 소통이죠.
“응답은 곧 책임”(146쪽)이라는 듣기의 윤리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고 싶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역사 왜곡 문제, 차별 문제 등을 떠올리면 어떤 목소리에 대해 책임 있는 듣기를 안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거든요.
모든 얘기에 응답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사회적 약자의 외침을 들었을 때는 다르죠. 저는 영어 케어(care)의 가장 좋은 한국어 번역이 좋은 의미에서 “신경이 쓰인다, 걱정이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신경이 쓰인다는 말이 참 좋아요. 저는 마음에 부담을 조금 갖는 것이 좋은 사회이고 윤리적인 사회라고 생각해요. ‘위안부’의 목소리라든가 4.3 피해자의 목소리, 사북항쟁이나 광주항쟁,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목소리. 이것은 소수자의 목소리라기보다 역사적 증언이기도 하고요. 증언에 의해서만 역사가 되는 경우에는, 정말로 그 목소리를 듣고 기록해야 할 책임이 그 사회에 있는 거예요.
그러나 한국 사회는 개별 희생자나 경험자의 목소리를 듣기보다 그걸 민족주의와 같은 거대 담론으로, 정치적 의제화하는 것으로 목소리를 동원하는 경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특정 담론, 예를 들어 민족주의 범주에 벗어나면 삭제하고요. 듣고 싶은 얘기만 듣는 것은 제대로 된 응답이 아니죠. 가장 첨예한 것이 ‘위안부’ 문제였지요. 피해자의 목소리가 듣는 사람의 인식 구조에 의해 전유된 경우가 많았어요.
“공동체의 인식구조가 바뀌어야 한다”(151쪽)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어요. 동시에, 그러나 그게 과연 가능할까, 하는 질문도 떨칠 수가 없거든요. 선생님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세요?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아요. 저는 기본적으로 역사는 비극이라고 생각해요. 홀로코스트로 600만이 죽었는데 사회주의 혁명 과정에서 소련에서 2천만이 죽고, 문화혁명에서 2천만이 죽었잖아요. 다만 이 생각은 해요. 시도해 보고 실패한 것과 시도도 안 하고 실패한 것은 다르다고요. 이걸 제주 강정에서 배웠어요. 당시 국방부 방침이 정해진 상태에서 강정마을에서 숙식하며 투쟁하는 분한테 비슷한 질문을 했거든요. 그랬더니 싸워서 지는 것하고, 싸우지도 않고 지는 건 다르다고 말씀하셨는데 인상에 깊이 남았어요. 지더라도 싸우면 그 경험이 역사로 남잖아요. 그러니까 뭐라도 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 낫죠.
한편으로 저는 정답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뭔가를 지향하는 자세에 가까워요. 당장 어떤 것이 실현되거나 정답이 있는 상황이라는 것 대해서는 원래 발상이 없는 편이에요. 사람들이 워낙 구조주의적 생각이 강하고, 사회 구조가 이렇다 보니까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는데요. 구조는 결국 개인이 바꾸는 거고요. 구조와 개인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봐요.

자신의 위치성을 고민해야
“대화의 목적은 합의도 맞대응도 아닌 제3의 목소리를 모색하는 것”(203쪽)이라고 하셨잖아요. 한편, 2020년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새로운 언어는 억울하고 우울해서, 무엇인가를 모색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만 탄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모색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두 이야기를 연결하면 제3의 목소리를 모색하는 일마저 쌍방이 아닐 수 있다는 것, 새 언어가 억울한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이 좌절이기도 희망이기도 한 것 같거든요. 이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저는 소통이 곧 합의라는 공식을 깨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소통을 합의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사회적 합의라는 것은 가장 폭력적인 말 같아요. ‘나중에’라는 것도 마찬가지인데요. 다수결이잖아요. 합의는 일종의 마녀재판이 될 수도 있어요. 새로운 언어는 가시화되지 않은 인간의 다종한 경험을 언어화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시화되지 않은 노동, 역사, 경험이 얼마나 많아요?
표현의 자유라는 패러다임에 “반대”한다고 하신 부분도 정말 중요하게 읽혔어요. 그보다는 “’표현의 책임’이 더 강조되는 사회가 바람직하다”(45쪽)고 하셨고요.
지금은 보수 진영이 시위에서 표현의 자유를 외치고 있잖아요? 한국은 근대성이 자본주의, 식민주의와 같이 왔잖아요. 식민주의를 극복하느라 근대성을 사유할 여유가 없었어요. 그런데 근대성의 핵심이 자유죠. 개인주의이고요. 게다가 군사 독재를 겪었기 때문에, 자유라는 말을 무조건 좋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그러나 자유는 폭력이기도 해요. 나의 자유가 어떤 사람한테는 대부분 폭력이에요. 저는 자유 패러다임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자유 패러다임으로는 아무 갈등도 해결할 수 없어요. 처음에는 봉건제의 억압적 신분질서와 신(神)에게 인간이 종속되었다는 질서로부터의 해방으로서 리버럴한 자유가 의미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그때와 반대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자유가 생겼고요. 그랬을 때 이 자유가 바람직한 것인가 생각해야 해요. 저는 근본적으로 자유라는 패러다임을 폐기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조건이 자유 대신 돌봄이나 상호 의존이라고 생각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를 진행하고 계세요. 한 인터뷰에서 “《정희진의 공부》에서는 지구가 이미 파산했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으리란 심정으로 공부할 겁니다.”라고도 말씀하셨거든요. 사실 『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 역시 공부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공부하시는 마음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공부하기를 권하는 마음에 대해 들려주세요.
2015년 《채널예스》와 인터뷰에서도 공부는 저항이고 성장이라는 말을 했는데요. 『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에서 말하는 공부는 자신에 대한 공부입니다. 자신이 말하는 위치성에 대한 고민. 자신이 사회의 어떤 위치에 있는가에 대한 고민. 그러니까 소통을 위한 고민이 아니고요. 소통 이전에, 자신이 남성인지 서울 사람인지 등등 그러한 자기 포지션에 대한 고민을 하는 책으로 읽어주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여성들은 자신의 여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데 남성들은 남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상대적으로 안 하죠. 자기가 보편이니까요. 십대 동성애자들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자살까지 하는데 이성애자들은 내가 어째서 이성애자로 태어났는가 하는 식의 고민은 안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자신의 위치성을 더 고민한다면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성숙성이 생길 거예요. 비로소 말이 통하는 사람의 범위가 넓어지겠죠. 모든 사람이 가장 바라는 것은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거잖아요. 그러려면 내가 일단 좋은 청자가 돼야 하고요. 좋은 청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주제를 알아야 합니다.
흔히 내가 가진 소수자성에 대해서는 많이 고민해요. 고민하게 하는 사회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나의 주류성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그에 대한 성찰이 더 기본적이어야 해요. 다시 말하지만 제가 여성이라는 것보다 서울 사람이라는 것이 어떤 면에서 더 작동하는 구조라는 점을 알아야죠. 젠더 문제는 개인의 능력으로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한 부분이 있는데요. 계급 문제나 장애 문제 등은 개인의 능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죠. 여성주의자들은 그 부분에 대해 굉장히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심지어 미국에 ‘파워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있거든요. 자유주의적 패러다임인데요. 여성이 출세하기 위해서는 모든 걸 동원할 수 있다는 거예요. 섹스도 동원할 수 있다고요. ‘아버지’의 파워를 쟁취하는 페미니즘이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다른 사회적 모순을 다 무시하게 되지요. 세상은, 인생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잖아요?
지금 선생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질문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일단, 가장 큰 관심사는 책이 많이 팔리는 거고요.(웃음) 길게 보면(?) 어떻게 나이 들 것인가의 문제, 지속 가능한 공부의 조건들입니다. 그리고 당장은 다음번 책이에요. 지금 쓰고 있는데, 『한국현대사와 남성성(가제)』입니다. 이후에도 선인세를 받은 책이 몇 권 있어서 계속 일을 해야 합니다. 사실 제가 소통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생각했겠습니까? 저는 평균 이하로 소통에 무능한 사람입니다. 독자들과 그리고 제 자신과 소통하는 문제가, 평생의 관심사였어요. 저는 제 일상이 실패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주된 원인은 제 사정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늘 제 이야기를 길게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번에 이 책을 쓰면서 깨달았어요.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독자는 저 자신이었어요.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출판 생태계, 저부터 안목 있는 독자 되기,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의 '역할' 같은 것이에요. 인문학은 언어(담론)의 역사잖아요? 인문학 기반 없이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인문학과 다른 분야의 위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요, 인문학 공부는 인간이 자신을 아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
출판사 | 창비
신연선
읽고 씁니다. 장편소설 『구름이 겹치면』, 에세이 『하필 책이 좋아서』(공저)를 출간했습니다.
표기식
사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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