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큐레이션 원고를 쓰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어떤 키워드나 주제를 떠올림 ②그와 어울리는시집을 떠올림 ③책장에서 떠올린 시집을 찾음 ④정리되지 않은 책장에는 시집이 없거나 시집 찾기를 포기하게 됨 ⑤재시도 ⑥발견한 것을 기뻐하며 재독 ⑦원고 집필 ⑧마감 지각
물론 떠올렸던 것과 다르게 시집이 읽힐 때도 있어서, ③의 과정을 자주 겪는다. 이번에도 떠오른 시집들을 추리다가 제일 높은 곳에 세워져 있던 동화책이 눈썹 위로 떨어져 상처가 났다. 그리고 찡그림 속에서 꺼낸 시집 한 권이 줄줄이 시집들을 불러 모았다. 이렇게 우연히 연쇄되는 과정도 있다. 여하튼, ‘시는 나의 온몸을 쓰게 만드는구나, 별수 없구나’ 혼자 시시하게 웃으며 세 권의 시집을 붙잡고 보낸 시간이 있었다.
눈썹 위에 난 상처 때문인지, 그 욱신거림이 시 읽기로도 번져 나는 ‘몸’에 대해 생각했다. 합평 시간에 호기롭게 “머리로 쓰는 시 말고 몸으로 쓰는 시”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시인 김수영이 시를 쓰는 일에 대해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한 「시여, 침을 뱉어라」는 나의 맨 앞줄 소년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시집들에 남겨진 몸에 대해 생각한다. 머리와 팔과 다리가 없는 토르소처럼 만져진다. 그리고 그 상상은 열매가 된다. 열매라는 몸. 온몸을 밀며 통과한 자리에서 향긋함과 썩음, 맛보기와 방치, 살려두기와 버리기의 그 미묘한 지점에서 진동하는 시들이라 할 수 있었다. ⑨한 권의 시집이 다른 한 권의 시집을 데려옴. 데려온 시집이 한 권을 마저 데려옴. 순서가 추가되었다.

『동트기 전 한 시간』
고이케 마사요 저/한성례 역 | 포엠포엠
감을 준 사람들은 친절한 척 감을 주었으나 실은 이 증가하는 감, 사악한 감을 내게 억지로 떠맡김으로써 내다버린 건 아니었을까.
감은 확실히 계속 증가하여 급기야는 감들이 상자 뚜껑을 밀어 올리고 마루로 넘쳐흘러 주방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우리 자매가 쇠약해진 건 분명 그 감의 번식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달 후 나는 죽었다. 여동생은 그보다 일주일쯤 먼저 죽었다. 둘 다 사인은 아사였다.
(고이케 마사요, 「감이 있는 주방」의 부분, 『동트기 전 한 시간』 120-121쪽)
얼마 전 시를 읽는 독서회에서도 이 시를 읽었다. 이 시를 유독 편애하는 편인데, 그 이유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감의 이미지들이, 그 속에서 굶어 죽어가는 자매의 목소리들이 나의 어떤 부분을 강렬하게 지나가기 때문이다. 이 시는 자매만 사는 집에 사람들이 이유 없이 감을 건네는 반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다. 화자는 죽은 후에도 주방에 남은 감들을 본다. 감즙이 뚝뚝 떨어지는 끈적하고 달큼한 가을의 분위기가 이렇게도 그려질 수 있구나 생각했던 첫 매혹을 지나 이제는 이 시가 어떤 육체성의 소멸로도 느껴진다. 그러니까 죽음. 죽어가는 시간 속에서의 풍요로움을 떠올리다 보면 누군가의 호의, 불필요한 친절, 늘 아픔으로 남는 동정 같은 것들을 돌아보게 된다. 고이케 마사요의 시에는 그런 시간들이 자주 흘러간다.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음을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천연덕스러운 장면들이 매혹적이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 「상자」에서는 긴바라 도키오라는 인물이 상자를 모으다가 빈 상자를 만든다. 좋은 상자의 조건을 세우고, 빈 상자로 넘쳐나는 집에서 자신이 만든 상자에 들어가 죽는다. 화자는 죽음에 대해 감정적으로 호소하지 않고, 그 죽음을 관측한다. 온전히 그 죽음까지도 당사자의 것으로 돌려주는 시선이 가을바람처럼 선선하기만 하다.
김개미 저 | 교유서가
얼마 전 한 여자가 아기를 낳고
태반을 들고 여길 지나갔다
우리는 며칠 동안 고양이들을 쫓아냈다
우리 중에도 여기서 태어난 아이가 있다
오래된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오늘 일도 알록달록하다
어제는 몸만 어른인 남자가 수음하는 걸 봤다
우리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다
벌레들의 소리가 커질 때
여기서 다시 만나자
오늘밤도 심심하지 않을 거야
가벼운 신발을 신고 와
(김개미, 「옥수수밭의 소녀들」의 부분, 『이 세상 모두가 적이라면』 28-29쪽)
김개미 시인이 시뿐만 아니라 동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몸’이 모자라 보인다. 이번 시집은 그 모든 몸의 원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특히 옥수수밭은 이번 시집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이기도 한데, 위의 인용된 시에는 요정 같은 존재들이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옥수수밭에서 태어난 아이를 지켜주려는 장면이 나온다. 알알이 빼곡하게 붙어 있는 옥수수처럼, 어떤 불우한 탄생을 목격하고 우리 또한 이곳의 시작과 다르지 않았음을 느끼는 이 시는 2부의 시 「옥수수와 그것」으로 옮겨가 엄마의 “이글거리는 얼굴”이 다시 태어나는 장소로 순환한다. 어떤 죽음은 탄생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고, 어떤 탄생은 탄생도 죽음도 모두 지켜주는 존재가 된다. 이번 시집은 그 존재가 신의 호명에도 귀를 막고 쓰는 시. “특별히 더 특별한 가을 되세요”라고 전하는 이 인사가 가을 풍경에 가려져 있던 것들을 발견하는 뜻밖의 시간을 기대하게 만든다. 여름에 매몰되어 있던 시의 영원성이 가을에도 흘러 우리의 어떤 이야기들이 말뚝 박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가을은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익어가니까. 열매가 돌아오는 시간이니까.
문저온 저 | 걷는사람
모과 버리러 가야 한다
쏘르락 쏘르락
모과의 내부를 뱉어 내는
거주자가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네가 사는 컨테이너를, 누가 달랑 집어서, 딴 데 갖다 두면 좋아?
달랑 집어 온
사랑이여 나는 딴 데처럼
갈 곳이 없다
거주자는 뒤쪽을 쏠아 내는 데 골몰하더니
앞쪽을 뚫기 시작했다 나란히
세 개의 바늘구멍 창문이 난
노란 잠수함
(문저온, 「모과 버리기」 전문, 『머리 없는 해바라기가 서 있다』 20-21쪽)
문저온 시인은 첫 시집 『치병소요록』을 통해 몸이 지나는 여러 통증을 서사시집으로 풀어낸 바 있다. 두 번째 시집에서도 ‘몸’은 삶의 치열한 현장이 되어 2부 전체의 시를 관통한다. 몸은 삶을 수행하는 주체이면서도 통제가 필요하다. 몸을 다 알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발현되는 통증, 삶의 다양한 사건을 처음 겪는 초행자로서 느끼는 고통들. 그 누적된 삶을 ‘몸’을 통해서 바라보는 시인에게 ‘모과’란 “함께 잠겨 있을 뿐”인 정체된 세계이다. 그러므로 숨 쉬기 위해 낸 바늘구멍 난 창문이 노란 잠수함이었을 때 가라앉게 만든다는 것, 떠날 수도 머무를 수도 없는 그 고약한 장소로서의 몸은 아슬아슬하게 죽어가거나 살아 있는 것이다. 그 미묘한 찰나를 몸이라는 풍경을 통해 집요하게 이야기하는 힘이 있다.
“너는 내 입에다 숨을 밀어 넣을 것이다/ 풍선처럼 나는 커질 것이다// 그리고 너는/ 터지기 전에 멈추어야 한다” (「몸, 인공호흡」)
나는 제멋대로 이 세 권의 시집을 읽으며 하나의 허수아비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이 가을에 폭탄처럼 익어가는 옥수수와 모과와 감이, 아슬아슬하게 살아 있는 이 시간으로부터 누군가에게 잡아먹히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머리 없는 해바라기가 서 있다
출판사 | 걷는사람
이 세상 모두가 적이라면
출판사 | 교유서가
서윤후
2009년 『현대시』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나쁘게 눈부시기』와 산문집 『햇빛세입자』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쓰기 일기』 『고양이와 시』가 있다. 시에게 마음을 들키는 일을 좋아하며 책을 만들고 있다.
[리딩런] 시라는 끝도 없는 트랙을 달리기
2026.08.04
[큐레이션] 꽃다발 프로젝트 | 예스24
2026.08.03
[젊은 작가 특집] 이희주 “그밖에는 대체로 최애의 생각을 합니다” | 예스24
2026.05.11
[큐레이션] 한 치 앞, 간발의 차, 탄두가 지나간 자리의 시 | 예스24
2026.04.09
[젊은 작가 특집] 신이인 “시의 순수하고 외로운 면을 애정합니다” | 예스24
2026.03.16
[큐레이션] 이 말을 전하기 위해 다시 태어나고 있잖아요 | 예스24
2026.02.10
지역마다 꼭 방문해야 할 ‘작가의 이름을 딴 미술관’
2025.11.27
[큐레이션] 방문을 굳게 잠그고 읽어야 하는 시집
2025.11.10
[김미래의 만화절경] 어제 뭐 먹었어?
2025.10.27
[인터뷰] 김민정 시인 “오롯이 시인으로만 한 권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꿈”
2025.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