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연의 장면의 전환
[이자연 칼럼] 슬픔을 릴스하는 사람들
모두가 둥글게 둘러앉아 각자의 사연을 이야기하는 집단 심리 상담처럼, 릴스와 숏츠를 중심으로 사람들은 마음의 짐을 내려둔다.
글: 이자연
202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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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를 하다 보면 문득 새삼스러운 질문이 떠오른다. 일면식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온라인상에서 관계(Social network)를 맺는 것일까? 믿음과 신의, 응원과 지지 같은 고등한 감정이 어떻게 화면 너머로 형성될 수 있을 것일까? 이에 답하기 위한 재미있는 실험이 하나 있다. 한 연구진이 인플루언서를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에는 결함과 결점을 공개하도록 하고, 또 다른 그룹에는 온전한 모습만 보이도록 했다. 이후 대중에게 진정성 평가를 요청했는데, 결과적으로 긍정적 자기 공개를 한 경우보다 부정적 자기 공개를 한 경우가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결과야 다소 예측 가능한 부분이지만, 그것보다는 일반인이 이렇게 선택한 이유가 무척 흥미롭다. 선망하는 유명인이 자기 흠집을 스스로 드러내는 경우 전략적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줄어들고, 진짜 '자기다움'을 보여주는 것 같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축약하면 이렇다. 슬픔을 고백해야, 진짜 내가 된다.

 

 

결핍을 콘텐츠화하는 사람들

 

'일상 브이로그'라는 이름으로 평일과 주말을 막론하고 평범한 매일을 소개하던 브이로그는 이제 감정의 사각지대까지 가닿기 시작했다. 전세사기 피해 같은 범사회적 사건은 물론, 이별·이혼이나 그동안 공개적으로 언급되기 껄끄러웠던 사별까지도 숏츠로 콘텐츠화된다. 어떤 고통이 자신을 침범했는지, 지금 감정이 어떤지, 그 슬픔을 어떻게 이겨내고 있는지 비디오의 주인공은 낱낱이 말한다. 이제는 에세이 도서마저도 ‘tmi‘처럼 느껴져 거리낀다는 오묘한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tmi’적인 숏츠 콘텐츠들은 왜 이렇게 각광받는 걸까. 심지어 생애주기적인 고통만 노출되는 게 아니다. 한때 아이돌이었거나 아이돌을 준비했던 지망생들은 자신의 실패담을 담담하게 수면 위로 올린다. 

 

물론 릴스가 존재하지 않던 과거에도 많은 사람들은 얼굴 모르는 이들에게 자신의 결핍을 말하곤 했다. 블로그에서, 네이트판에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그러나 이것들 대부분이 익명의 취기를 빌렸다면, 숏츠는 자신의 얼굴, 이름, 현재 지위 등을 구체적으로 알린다. 결핍은 어느새 그 사람의 사건이면서 정체성이고, 삶이자 개인 브랜딩이 된다. 이토록 주관적인 경험이 개인의 영역 안에만 머물지 않고 공공연한 공유물로 전환될 수 있는 이유는 이 안에 세대적으로 통용되는 '슬픔에 매몰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7년간의 장기연애 후 이별을 맞았다는 크리에이터는 그럼에도 출근하고, 밥을 '많이' 먹고, 동료가 커피를 사줬다는 일상을 전한다. 고민 끝에 파혼했다는 이는 베이킹을 하며 사연을 말하고, 첫사랑에게 실연당한 사람은 닌텐도의 ‘저스트 댄스’로 시름을 잊는다. 어떤 이의 슬픔은 웃기고, 어떤 이의 슬픔은 귀엽다. 어떤 이의 슬픔은 무겁고, 어떤 이의 슬픔은 애틋하다. 하지만 릴스로 만들어지는 이 기록들은 하나같이 공통된 동시대적 태도를 보인다. 슬픔에서 딱 반 발자국 나와있는 것.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슬픔 곁에 머무는 것. 그리고 오늘 해야 하는 일을 일단 하는 것.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한평생을 노력해온 아이돌에 최종 발탁되지 못해도 (혹은 어렵사리 데뷔까지 했건만 마음처럼 잘되지 않더라도), 이별을 하고 파혼을 해도,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도 우리의 삶은 지겨우리만치 계속된다. 권진아의 “뭔가~ 잘못됐어~”가 흘러나오며 헛웃음 짓게 하는 릴스 세계관에는 기어코 웃음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인간 본연의 힘이 있다. 싸이월드 문화권에서 ‘눈물 셀카’를 지적해 온 세대에겐 다소 낯설 수 있다. 울면서도 카메라를 켠다고? 이혼·파혼·사별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낸다고? 인생 망한 걸로 자기를 팔아먹네? 부정적인 것은 곧 수치스러운 것. 수치스러운 것은 곧 감춰야 하는 것. 이 오래된 사고 체계와 공식이 통용되었던 과거에 비추면 이 숏츠의 행렬은 영원히 이해받을 수 없을 것이다.

 

위쪽부터 순서대로 인스타그램 '괜찮아지길'(@soblychoo), '김도비'(@freedobbyalwayshappy), '레이지맘브런치'(@lazymombrunch), '육지담'(@6gdam), '정은우'(@j_e_w_w_w)


 

슬픔은 둥글고 옅어서 사라지지 않더라도 끝내 희미해진다  

 

하지만 이제는 고백의 사회적 가치가 달라졌다. 내가 겪은 비애를 말하면 말할수록 사람들은 공감하며 댓글로 하나의 광장을 만든다. 비슷한 경험을 통과해 온 또 다른 슬픔의 소유자가 나타나서는 동심원을 크게 키우기까지 한다. 바야흐로 자기 고백이 관계 형성의 근간이 된 시대. 모두가 둥글게 둘러앉아 서로의 중독 사연을 이야기하는 집단 심리 상담처럼, 릴스와 숏츠를 중심으로 사람들은 비로소 마음의 짐을 내려둔다. ‘오히려 좋아’, ‘가보자고’처럼 긍정적 사고를 환호하는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실패는 결론이 아니라 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서사로 작용한다. 더구나 누군가의 동경을 이끌어내는 성공담과 달리 실패담은 타인의 ‘동일시’와 ‘공감’을 자아낼 수 있기에 더 내밀한 친밀성을 높일 수 있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지점. 이 슬픔의 콘텐츠화 현상을 강화하는 건 다름 아닌 릴스라는 숏폼 형식이다. 만약 똑같은 이야기를 30분짜리 유튜브 영상으로 풀어낸다면 어떨까? 아마도 이야기가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풀어지면서 상당한 서사적 노동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긴 영상에 부합한 소재들도 물론 있다.) 하지만 릴스는 짧고, 간단하게 모든 곁가지를 쳐낸다. 만드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슬픔에 가까이 다가가긴 하지만, 우울의 늪이나 그 심연까지 빠져들지 않아도 된다. 건강하게 거리감을 두고, 그러나 감정의 온기는 확인하면서. 본래 길이가 짧아질수록 감정이 압축되는 이야기의 근원적 성향을 생각하면 릴스라고 해서 슬프지 않은 게 아니고, 2시간이 넘는 영화라고 해서 슬픈 것만은 아니다. 

 

누군가는 말한다. 불행이 전시되고 있다. 불행이 상품화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묻고 싶다. 그렇다고 한들, 그것이 무엇이 그리 문제적일까.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사치와 소비, 유흥과 오락이 콘텐츠가 되는 동안 슬픔은 자신도 주인공이 될 차례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길이 아니었던 곳도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면 점 같았던 발자국이 선처럼 이어지다가 이내 작은 오솔길이 되는 법이다. 이제 막 처음으로 앓고 있는 슬픔의 초심자는, 그 영상적 기록으로 저만의 회복하는 법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나보다 앞서 아팠던 이들의 말과 경험을 토대로. 조금은 깔깔 웃기도 하면서.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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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4186

2026.08.17

'슬픔을 고백해야, 진짜 내가 된다.'
그냥 나로 있어도 된다는 용기를 주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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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연

가족들이 일터로 떠난 빈집에서 텔레비전과 한 몸처럼 지내다가 어느덧 대중문화 비평을 말하는 어른이 됐다. 페미니즘 미디어 비평서 『어제 그거 봤어?』를 썼고, 한겨레신문 칼럼니스트 공모전에 당선되어 온라인 커뮤니티의 여성 문화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칼럼을 연재했다. 현재 《씨네21》>의 영화 기자로 활동 중이다. 목동불주먹이자 <슬램덩크> 사랑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