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낯선 집』은 재일조선인 3세로 태어나 스무 해 넘게 한국에서 살아온 사회학자 조경희가,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경계 위에서 길어 올린 이주와 돌봄의 기록이다. 조선학교 시절 외운 할아버지의 고향 주소를 품고 처음 한국 땅을 밟았지만 정작 고향의 문턱에서 발길을 돌렸던 저자는, 이후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자리에서 오히려 여러 세계를 잇는 삶의 방식을 발견했다. 시민권의 안과 밖, ‘안전’과 ‘상식’이라는 점잖은 말로 옷을 갈아입은 혐오, 그리고 그 틈에서 서로를 돌보며 관계를 회복해가는 여성들의 실천을 가로지르며, 저자는 ‘집’이란 돌아가야 할 고향이 아니라 낯선 곳을 삶의 터전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단일한 정체성과 소속만을 요구하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이 책은 경계 위에 머무는 사람들의 ‘자리’를 엮어내며 진정한 환대와 연대의 가능성을 일깨운다.
『낯선 집』이라는 제목이 인상적입니다. 2001년 처음 한국을 찾으셨을 때, 본적지로 향하던 택시를 도중에 돌려세우셨다고 하셨죠. ‘고향’을 눈앞에 두고 돌아선 그 순간이 이 책이 말하는 ‘집’을 떠올리는 데 어떤 실마리가 되었나요?
제목을 ‘낯선 집’, ‘친밀한 타자’와 같은 중의적인 말로 짓고 싶었어요. 서로 상충되는 지향성이 안과 밖, 소속과 이탈의 경계를 끊임없이 오가는 디아스포라의 존재 방식을 잘 드러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향을 눈앞에 두고 중간에 돌아섰던 경험이 책의 출발점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해소되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었는데, 원고를 다듬으면서 그 장면의 의미가 조금씩 선명해졌습니다. 뿌리와 고향에 대한 당위성을 전제하는 대신, 하나의 목적지보다 이동의 과정과 중첩되는 삶에 주목하게 되면서, 당시의 어색한 선택이 오히려 저의 디아스포라 경험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해석은 제가 한국에서의 시간을 통과했기에 가능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디아스포라에게 여전히 뿌리에 대한 상상은 강한 향수를 자극하지만, 그것이 혈통주의 관념과 남성 중심적 서사에서 강한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낯선 곳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삶의 터전을 만들어가는 여성들의 경험으로 ‘집’의 의미를 다시 쓰고 싶었습니다. 이런 관점은 이 책에서 충분히 다뤄졌는지 자신은 없지만 향후 작업에서 더 구체화해나갈 생각입니다.
부제인 ‘재일 이주 여성의 자리를 엮다’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자리’는 책 전체의 주제를 관통합니다. 소수자를 이야기할 때 흔히 권리나 보호를 말하는데, 선생님은 ‘자리’라는 단어를 택하셨어요. 소수자에게 ‘자리가 있다’는 것은 ‘권리가 있다’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요?
이 책에서 많이 다루는 재일조선인의 삶은 여전히 식민주의와 분단의 역사와 분리될 수 없어서, 권리와 정체성을 둘러싼 투쟁은 지금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재일조선인들은 오랫동안 한반도 남북과 일본이라는 국가의 경계 속에서 국적과 소속을 선택하고, 그것을 통해 늘 자기증명을 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한국으로 이주하면서 경계선이 더 복잡해졌어요.
이 상황 속에서 국적, 시민권, 소속과 같은 사회학적 개념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한편에서는 제도적인 포섭이 곧바로 안정적인 정체성이나 사회적 인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주나 이산 경험으로 인해 제도와 정체성이 괴리할 수도 있고, 훨씬 다중적인 소속감을 가질 수도 있어요. 권리를 향유하는 자격을 의심 받거나 거꾸로 과잉 동일화를 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계에 선 사람들이라면 누구나가 경험하는 일이겠죠. 그래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자신의 존재를 존중받는 삶의 공간을 ‘자리’로 표현한 것입니다. 특히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제도적 권리를 획득하는 것만큼이나 일상에서 서로를 돌보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런 관계의 축적 속에서 비로소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재난은 늘 소수자에게 먼저 더 가혹하게 닥칩니다. 1부에서 선생님은 다수의 안전과 소수자의 인권이 언제든 충돌할 수 있다고 지적하셨는데요. 위기 상황에서 소수자의 자리가 가장 먼저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이고, 그럴 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재난 위기가 닥치면 원래 취약한 조건에 사는 사람들이 더욱 심각한 피해를 입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고 불렀는데, 실제로는 재난이 원래 있던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확대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취약집단이 겪는 피해는 부수적이거나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입니다.
코로나 당시 한국정부는 비교적 신속하게 방역대책을 마련했지만, 그 과정에서 공동체의 경계에 선 사람들의 삶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외부적 요인으로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주변부에 있는 소수집단에 대한 배려가 후순위로 밀려나는 건 물론이고, 극단적으로는 문제의 원인 제공자로 쉽게 낙인 찍힐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은 그러한 메커니즘이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의 원인을 타자에게 전가하고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로부터 더 배워야 합니다.
공동체의 경계를 좁게 긋고 안전을 배타적으로 설정하는 방어적인 태도가 점점 정당화되는 것 같습니다. 위기일수록 무엇보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상상하는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취약한 사람들의 안전이 보장될 때 공동체의 안전도 지속가능해질 수 있다는 감각을 더 키워갈 필요가 있습니다.
헤이트스피치 규제 이후 오히려 혐오가 ‘안전’, ‘상식’, ‘질서’, ‘국민의 권리’ 같은 점잖은 말로 옷을 갈아입었다고 분석하셨습니다. 한국 독자들도 어느새 온라인을 넘어 실제 현실에서도 익숙하게 접하는 풍경입니다. 이렇게 ‘정상화된 혐오’를 알아차리기 위해서 무엇을 눈여겨봐야 할까요?
책에서는 일본의 사례에 한정해서 다뤘지만, 이런 방식의 배외주의는 전 지구적인 흐름이고 한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노골적인 욕설이나 비하 발언에는 거부감을 갖지만, 국적이나 시민권 여부에 따른 제도적 차별은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원칙과 절차, 합리적 판단이라는 이름으로 통계적 차별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향은 우파들에게 많이 발견할 수 있지만, 꼭 그것만은 아닙니다. 이른바 K-민주주의라고 제시되는 여러 진보적인 움직임 또한 ‘한국인’이라는 동질적인 주체를 강화한다고 느껴질 때가 많아요. 민주주의 실천이 누가 그 공동체의 정당한 구성원인가를 다시 확정하는 과정을 수반한다는 것, 이 역설을 분단, 이주, 디아스포라의 관점에서 좀 더 긴장감 있게 짚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상화된’ 혐오를 알아차리려면 언어 그 자체보다도 작동 방식을 보는 것이 중요하겠죠. 얼핏 온건하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말이 실제로 누구의 자리를 좁히고 있는지를 계속 되묻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실과 결핍으로 얼룩지기 쉬운 디아스포라의 감정을, 재일 여성들의 위안부운동이나 미투, 문화번역 같은 실천이 관계를 회복하는 힘으로 바꿔내는 장면들을 보여줍니다. 식민주의와 젠더폭력이 겹치는 자리에서 이 여성들은 어떻게 자기만의 언어와 운동을 만들어냈나요?
재일 여성들이 결핍과 상처를 개인의 서사로 봉합하지 않고,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언어화해왔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경우도 개인으로는 감당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함께 아파하고 기억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해석되고 증언의 언어로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모리스 알박스가 말하는 ‘집단기억’은 개인의 기억도 순수하게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적 틀 속에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가부장적 틀 속에서는 고통 자체가 드러날 수 없다는 점에서, 특히 소수자나 피해자 문제에서 젠더 관점은 핵심적입니다. “왜 이제 와서 피해를 말하는가”를 따지는 사람들이 있지만, 침묵 자체가 오랫동안 공동체가 방치해온 폭력의 증거라 할 수 있겠습니다.
3부에서 다룬 여성들의 대항운동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번역’입니다. 번역은 다른 경험과 기억, 세계를 연결하면서 또 다른 실천을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늘 올바른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기도 하지만, 다중언어의 실천이 풍부한 언어감각을 만들고 연결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회 역시 여러 주체들이 잡다하게 부대끼며 공존할 때 훨씬 건강하고 열린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 말미에서 결국 한국을 선생님의 ‘집’으로 삼게 되었다고, 다만 그 집은 ‘경계 위에 머무를 수 있는 자리’라고 쓰셨습니다. 어떤 순간에 그러한 경계의 감각을 느끼시는지요?
저는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고, 오랫동안 조선적을 가지고 조선학교를 다녔습니다. 이후 한국으로 이주하고 국적을 바꾸면서 삶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혼란스러웠던 것은 경계를 넘을 때마다 언어와 문화, 기억과 정체성을 교정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였습니다. 책에서 충분히 다루지 못했지만, 분단체제의 경계 넘기는 그러한 교정과 자기검열을 수반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의 경험을 어떻게 지우거나 부정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물리적, 제도적인 이동이 반드시 정체성의 이동을 수반하는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정체성은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장소의 경험이 중첩되는 것이라고. ‘경계 위에 머무를 수 있는 자리’도 그런 의미입니다. 경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경계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절대적인 적대의 선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한 감각이 평화의 가치나 실천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불완전한 곳을 삶의 터전으로 바꿔가는 ‘집’의 상상이 지금 한국의 상황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여러 정체성 사이에서 자기 자리를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낯선 집’을 짓고 사는 일의 의미와 그 일에 필요한 용기를 전해주세요.
경계에 머문다는 것은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를 설명해야 하고, 때로는 의심받으며, 불안을 감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쉽게 용기라고 말하기는 조심스럽습니다. 다만 하나의 위치에 안착하지 못하는 삶은, 오히려 여러 세계를 오가며 각각의 세계와 조금씩 관계를 맺어가는 삶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쌓여온 관계들의 축적이 결국 자신의 자리가 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마다의 경계에서 서 있는 분들에게는 안전한 소속을 찾지 못한 상태를 결핍으로만 여기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책에서 말하는 ‘집’의 상상은 완전한 소속이나 순수한 정체성을 향한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명확한 경계를 긋고, 자타를 가려내려는 국민주의적 논리가 점점 힘을 얻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불완전한 곳에서 삶의 터전을 만들어가는 방식은 소수자들만의 특수한 경험이 아닙니다. 이제는 누구나가 조금씩 경계 위를 살아가고, 안정적인 하나의 정체성으로 자신을 설명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동질성을 확인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질적이고 다성적인 조건 속에서 서로 돌보며 공통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상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낯선 집
출판사 | 사계절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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