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경 작가님의 본격마감일상충격실황중계만화 『사각사각』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장면은 바로 마감 장면이다. 주인공인 만화가는(아마도 김나경 선생님 본인은) 마감을 앞두고 누워 있거나 아무것도 안 하고 있거나 전혀 상관없는 딴짓을 하고 있다가 말 그대로 ‘데드(Dead)’라인이 다가오면 편집자의 불호령(‘이번엔 안 늦는 거 맞지? 제대로 그리고 있는 거 맞지?’)을 듣고 그때부터 만화를 그리기 위해 펜을 들어(‘아~ 완전 하고 있지, 걱정하지 마, 연락도 하지 마~’) 어떻게 하면 공정을 최소화할 수 있을지 머리를 싸맨 후, 그런 거 없다, 내가 다 그리는 수밖에 없다 하는 깨달음을 얻어 초필살 마감 치기 끝에 원고를 완성한다.

방금 옆에 놓여 있던 전 8권 중 아무 권의 아무 페이지나 펼쳤는데도 “28일이면 일주일 후잖아. 잘됐네, 잠도 안 오는데 슬슬 시작하면 딱 맞추겠어. 지금 당장 시작을… 꼭 지금 해야 하나? 어차피 막판에 밤새고 몰아칠 텐데. 차라리 지금은 살짝 자두는 게… 그래, 아침부터 시작하자! (아침에 일어남) 에잉, 저녁부터 시작하자!×5일 반복”이라는 장면이 나와서 경악과 감탄을 했다. 만화는 왜 이렇게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인 걸까? 혼자 할 수 있는 서사 예술 중에서는 만화가 물리적 노동 강도 또한 가장 높은 편이지 않나 싶다.
마찬가지로 『사각사각』 속에 많이 등장하는 또 다른 장면 중 하나는, 먹칠을 하고 스크린톤을 붙이는 등 작화의 보조 작업을 하는 어시스턴트들과 작가의 티키타카다. 요즘엔 이런 공정, 그러니까 종이에 직접 색을 칠하고 톤을 오리고 깎으며 붙이는 일은 잘 없다. 프로그램에서 페인트 부으면 먹칠, 브러시로 톤질 완성이다. 물론 지금의 만화가와 웹툰 작가들 또한 그때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높은 업무 강도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사각사각』이 출간된 2004년에서 22년이 흐른 지금에도 마찬가지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참고로 『사각사각』의 제목 앞에 달린 진짜 부제는 ‘본격마감일상충격실황중계만화’가 아니라 ‘해피컬트개그’ 만화다. 그래, 웃자. 힘들 때 웃는 자가 일류라 하더라…
『사각사각』은 만화가와 만화편집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제시간에 원고 내놔 VS 그 시간엔 원고 못 줘)을 실감나고 코믹하게 그린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만화편집자인 내게 인상 깊은 장면이 하나 있다. 주인공 만화가가 원고를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거의 기적처럼) 완성해서, 뿌듯한 마음으로 당당하게 편집부에 직접 원고를 들고 가 납품하는 장면이다. 원고를 ‘들고’ ‘가서’ ‘준다’고? 현재로선 그 어떤 웹툰PD, 만화편집자에게도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일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 원고는 공유 서버를 통해 전달받는 PSD, JPG, TIFF 파일 형식의 ‘데이터’다. 몇 번 정도 작가님이 직접 그린 그림을 스캔해서 굿즈에 사용해 본 적은 있지만 아직까지 원고 자체를 ‘만져본’ 적은 없다.
일본만화업계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기회가 되어 여쭌 적이 있는데, 일본만화 편집자 역시 현재 담당하고 있는 작가는 모두 디지털 작업 중이고, 아날로그 작업 방식을 고수하는 작가가 있다면 담당이 아니더라도 알 정도로 소수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몇 해 전에 『최유기』의 작가 미네쿠라 카즈야가 아날로그 흑백만화 원고의 어시스턴트를 공개적으로 모집한 것이 떠오른다. 그 『최유기』의 미네쿠라 카즈야 선생님이 어시를 못 구하다니!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이 디지털 작업을 하는 시대다 보니 아날로그 원고를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작업자가 이제 업계에서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작업 세대 사이에 걸쳐 있는 창작자들 중에는 선화 작업은 종이에 펜으로 한 뒤 톤, 채색, 보정 등의 작업은 프로그램을 통해 하는 식으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적절하게 섞어 취하는 사람도 있다. 이를테면 〈만화 탐독〉 1화 "내 인생만화가 절판만화라니"에서 가장 좋아하는 만화가라고 언급한 토요다 미노루 선생님의 경우, 종이에 펜으로 그린 그림을 스캔, 스캔 후 출력, 출력물에 마커 펜으로 채색, 그것을 다시 스캔해서 컬러 일러스트 작업을 완성한다고 한다. 공정을 듣고 나니 선생님의 일러스트에서 느껴졌던 굵은 선의 깔끔함, 텍스처의 자연스러움이 이해가 갔다.
성률 작가 원화전 〈여름을 닮은 우리〉
‘원화’라는 것을 앞으로 얼마나 더 볼 수 있을까? 어쩌면 앞으론 원화의 개념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고(NFT? 그게 이런 개념 아니었나? 잘은 모르겠지만…) 디지털 원화라는 것도 있다더라. (그것 역시 잘은 모르겠지만…2) 하여튼 내가 여기서 말하는 원화는 사람이 실재 종이에 대고 펜을 쥔 손으로 그린 선과 칠과 같은 것을 말한다. 요즘 그렇게 그리는 사람이 없다는 건 아니다. 지난 4월부터 한남동 그라운드시소에서 원화 전시를 하고 있는 성률 작가님의 『여름 안에서』는 종이에 붓으로 물감을 칠해 그린 수채화 작품이다. 원화전에 가서 원고가 된 컷들의 실물을 보니 감동이 있었다. 동시에 작가님의 그림은 상당히 큰 편인데 그걸 어떻게 일일이 스캔하나 싶기도 했다. 그렇게 큰 그림을 스캔하면 용량이 너무 커지는 것도 문제다. (원고를 클릭한 디자이너님 “파일이 열리고 있어요. 기다려주세요…”) 하물며 실물의 원고를 보관하는 것도 일이다. 180쪽 만화책이라면, 원고를 양면으로 그리진 않으니 최소 약 360장의 원고가 쌓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든 쌓이면 짐이 된다. 굉장히 존경하고 좋아하는 작가님으로부터 모아뒀던 종이 원고를 더 이상 둘 곳이 없어 정리했단 이야길 들었을 때는 ‘차라리 저한테 버리시지 그랬어요!!!’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를 비롯해 공정의 효율화, 간소화를 위해서 아날로그 방식을 취하는 창작자가 많이 사라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흠… 아쉬운가?
처음으로 갔던 원화 전시가 생각난다. 2016년 9월 도쿄 이케부쿠로 파르코(PARCO) 백화점에서 열린 만화가 안노 모요코 선생님의 첫 대규모 원화전이었다. 사실 나에게 안노 모요코라는 만화가는 그림을 잘 그리는 작가는 아니었다. 인체 비율이 약간 비현실적이고(너무 말랐다), 눈도 과장되게 크고(물론 순정만화니까), 선도 좀 거칠고 투박하다. 순수하게 그림 자체로 나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는 만화가는 아니었던 것이다.
『사쿠란』 1부 마지막 장면, 주인공 키요하는 마음을 품고 있던 소우 님의 단호한 미소를 보고 강가로 달려간다. 늘 당당하고 오만했던 키요하였지만 자신을 향한 애정이나 집착이 느껴지지 않는, 그저 너그럽기만 한 그 미소의 뜻을 곱씹던 그녀는 헝클어진 매무새와 산발이 된 머리로 강물에 서서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린다. 한 마디 대사도 없이 그려진 그 장면을 원화로 보는 순간 나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야 했다. 원화 속 키요하의 얼굴에는 하얀 수정액이 길게 가로지르며 칠해져 있었다. 아마 처음 안노 모요코 선생님은 키요하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줄기를 그리고 싶으셨던 걸지도. 수정된 키요하의 얼굴에는 몇 개의 땀방울이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이어서 바로 다음 컷엔 키요하의 콧대를 그려보았다가 지운 수정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그리고 지우고 고치며 완성한 장면이 내가 알고 있는 『사쿠란』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덧붙여 『사쿠란』은 모든 페이지의 배경에 검은 먹이 칠해져 있는데, 원화로 보니 그 먹의 농도는 전혀 일정하지 않았고 재단선 바깥 영역은 (인쇄되지 않는 영역이니) 성글게 칠해져 있기도 했다. 선의 떨림, 채색의 번짐. 'Ctrl+Z'(실행취소)를 할 수 없는 고작 종이 한 장 안에는 창작자의 고민과 선택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샅샅이 볼 수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 너무 당연한 생각이 들었다.
이 장면 사람이 그린 거구나. 사람이 하나하나 긋고 칠하고 고쳐서 그린 거였어.
안노 모요코 작가 원화전, 『사쿠란』 1부 마지막 장면 (김해인 편집자 촬영)
가장 최근에 다녀온 원화전은 지난 6월 초 요코하마 아소빌딩에서 열린 이와아키 히토시 선생님의 〈기생수전〉이다. 안노 모요코 선생님의 원고에선 수정액이 삼분의 일은 되지 않나 싶을 정도로 꼼꼼하게 고치고 더 예쁜 선을 찾아가는 과정이 돋보였다면, 이와아키 선생님의 원고는 거의 수정이 없어서 인간미 없는 그 깔끔함에 혹시 이와아키 선생님이 기생수인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심지어 수많은 인물들이 모여 있는 떼샷에서도 흔들림 없이 그려진 선들…! 원화전에 가면 은근히 기대하며 관찰하게 되는, 덕지덕지 칠해진 수정액이라든가 편집자에게 남긴 편집 지시 사항 같은 것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없었다. 그나마 눈에 띄었던 것은 식자에 관한 의견. “白フチ付スミノセ(대사에 흰 아웃스트로크 처리 후 먹자로 얹기)”…
이와아키 선생님의 원고를 보면서는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망설임 없이 선을 그을 수 있다니. 선에 당찬 힘이 실려 있다거나 자신감이 담겨 있다기보다는, 그저 심플하고 아주 분명하게 그어진 선들이었다. 마치 그렇게 그리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알고 그린 듯한 그림처럼 말이다. 사람이 이렇게 한 번에 깔끔하게 그리려면 대체 얼마나 연습하고 수많은 그림을 그려야 했을까. 그리고 그렇게 한 장 두 장 그린 원고들이 모여서 한 화가 되고, 한 권이 되고, 하나의 작품으로 완결되려면, 마찬가지로 얼마나 많은 시간과 수고가 필요했을까. 1988년부터 1995년까지 7년 동안 연재를 한 후 완결된 지 21년이 지나 처음으로 독자들에게 공개한 400장의 원화를 보면서, 나는 지금의 이와아키 선생님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건강이 안 좋아져 아날로그 방식으로 만화를 그리는 것이 힘들어진 선생님은 지금 육십이 넘은 나이로 만화 학원에 다니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 디지털로 만화 그리는 방식을 배우고 계신다고 한다.
이와아키 히토시 작가 원화전 (김해인 편집자 촬영)
솔직히 예전엔 더 이상 종이에 그린 원화를 볼 수 없다는 게 좀 아쉽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한데 지금은 그런 걸 아쉬워하고 있기엔 시대도, 그 시대를 사는 사람도, 그 사람이 하는 창작도… 그냥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느낀다. 애초에 나부터가 원화로 원고를 받아본 적도 없으면서 그걸 아쉽다고 생각하는 게 경험해 본 적도 없는 것에 대한 거짓된 향수와 텅 빈 낭만을 좇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와아키 선생님이 손이나 허리가 아프면서까지 기존의 방식대로 만화를 그리시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변화라는 건 단지 무언가를 계속하다 보니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수도 있다고. 사족보행을 하다가 이족보행을 하게 되는 게 아쉽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듯이 말이다. (이족 보행은 인간의 손에 자유를 주어 비약적 발전을 낳았지만 동시에 인간의 허리에 무리를 주어 각종 관절을 조져버리는 비약적 퇴행을 낳기도 했다. 뭐가 더 낫고 그르다 할 문제 역시 아니란 뜻이다. 아이고 허리야…) 게다가 이제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넘어 AI라는 무자비한 프로그램이 단 몇 초 만에 그럴싸한 그림을 내놓는 시대마저 되어버렸다. 바로 방금까지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했으면서 이 거부할 수 없으며 심지어 너무 빠른 변화의 흐름이 조금 두렵고 막막한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대체되지 않는 인간의 무언가? 그런 게 정말 있을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지. 정말로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지만 내가 수백, 수천 장의 원화 앞에서 숨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이것만은 틀림없다고 확인하고 온 사실 하나는 있다. 나는 원화전에서 예쁘고 멋진 그림을 보고 온 게 아니라, 누군가가 그것을 그렸다는 사실을 보고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예쁘고 멋진 그림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그것을 그렸다는 사실 그 자체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김해인
만화 편집자. 출판사 스위밍꿀에서 에세이 『펀치: 어떤 만화 편집자 이야기』(2024)를 냈다. 집 가서 만화 보고 싶다.
![[그림책 특집] 권정민 “이 사랑을 계속하려면 더 치밀한 탐구가 필요합니다” | 예스24](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6/07/20260701-cece0210.jpg)

![[김해인 칼럼] 내 인생만화가 절판만화라니 | 예스24](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6/04/20260408-0dc681ac.jpg)

![[김해인의 만화절경] 한국 출판 만화를 위하여, 가 아니고](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6/01/20260105-f2179576.jpg)
louis
2026.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