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중 ‘묘사하기’의 방법론은 한 문장으로 요약되곤 한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것이다. 글쓰기 수업을 하다 보면 설명하기와 보여주기가 무엇인지부터 헷갈리는 사람이 태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말이다. 그런데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말은 소설과 영화의 차이를 이해하기에도 제법 유용한 말이다. 선명하게 보여주는 묘사도 줄글로 이루어지니까. 묘사가 선명하고 풍성해질수록 문장은 더 많이 필요해진다. 그런데 이것을 구구절절한 설명인 듯 느끼는 사람이 제법 많더라는 말이다. 주먹쥐듯 손으로 꽉 움켜쥔 의자 팔걸이 부분의 장식이라든가 커튼의 무늬, 창밖의 떠오르는 태양, 밤새 고뇌한 주인공의 흐트러진 모습 같은 장면을 묘사한다고 상상해보라.
그리고 같은 장면을 영화로 상상해보라. 영화에서는 한 장면이면 그 모든 그늘과 뉘앙스를 담을 수 있다. 한 문장도 필요하지 않다. ‘창밖에 차가 지나가고 있다’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사람은 방 안에 있으며 창밖은 커튼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차의 엔진 소리가 부드럽게 커졌다 다시 작아지고, 한 방향에서 다른 방향으로 빛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면 우리는 ‘창밖에 차가 지나갔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영화에서 빛은 당연하게도 움직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도구이며(사물이 그대로 있어도 빛만 움직여도 충분하다) 소리는 거리감을 보여주는 유용한 도구이며, 이 둘이 합쳐지면 (과장을 좀 보태) 무엇이든 신이 되었다 슈퍼 히어로가 되었다 할 수도 있다.
책과 영화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자주 설명된다. 영화가 기본적으로 책(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나리오는 책이라고 불린다)에서 시작하는 매체라는 점을 빼고 이야기할 순 없지만 더 중요하게는 정말로 책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가 많아서다. 소설의 경우 ‘영화화 결정’ 같은 문구를 띠지에 넣을 수 있고 없고는 홍보에 제법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무조건 잘 팔린다는 뜻은 아니지만...
같은 이야기를 두 가지 매체로 즐길 수 있다면, 게다가 둘 다 감상했다면 비교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이 인물은 여기서 이렇게 달라졌다든가, 그 장면이 삭제되었다든가 하는 단순비교는 얼마나 쉬운가. 하지만 두 매체를 정말 다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소설과 영화가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면서도 ‘동일한 작품’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소설도 영화도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라는 점을 첫 번째로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이야기로서의 소설, 이야기로서의 영화는 소설과 영화를 즐겁게 만드는 요소 중 일부일 뿐이다. 장편소설을 읽다 보면 가끔 중반부에 별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는 대목이 별로 짧지도 않게 들어가 있을 때가 있다. 장면을 읽는 독자들의 호흡을 생각해, 모든 페이지를 촘촘하게 구성하지 않고 흘려 읽을 수 있는 대목을 넣기도 한다는 어느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렇구나 한 기억이 있다. 한숨 돌리는 장면들. 가족끼리의 여상한 대화. 창밖을 날아가는 새의 움직임. 독자의 눈이나 카메라의 렌즈가 잠시 목적 없이 움직이는 순간들. 목적 없어 보이는데도 사실 돌아보면 큰 이야기의 일부로 기능하는 순간들. 매일 크게 의식하지 않고 행하는, 일어나 씻고 외출하고 식사하는 과정 사이에 명멸하는 존재에 대한 의구심 같은 순간들. 이런 부분을 어떻게 표현하는지야말로 그 감독의 인장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예술비평가이자 소설가이자 영화 감독이었던 수전 손택은 『영화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소설과 영화의 상관관계에 대해 몇 번 글로 적었다. 수전 손택의 말에 따르면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일종의 용기일 것이다. 원작이 되는 소설에서 거리낌없이 벗어나야만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충실할 필요가 없으며, 완전하게 충실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영화를 장황하게 만든다고 썼다. 이 말은 소설이 영화보다 언제나 더 낫다고 믿는 독자들에게는 지지선언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손택의 말은 애초에 온전히 원작에 충실할 수 없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하니까. 하지만 원작이 되는 소설이 그렇게 온전히 충실하고 싶은 걸작이기만 할 리 없다는 말을 꼭 해야 할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사례처럼 소설에서 층위가 얇았던 미란다 프리스틀리같은 인물이 시나리오의 재해석과 배우의 호연으로 호불호를 뛰어넘는 아우라를 갖게 된 사례가 있는걸. 영화로 훌륭해질 여지가 있어서 뜯어고치고 싶은 소설로 있기 마련. 하지만 더 많은 경우는 소설이 멋지기 때문에 영화화 판권이 팔린다. 김초엽 작가는 단편소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개봉한 뒤 있었던 관객과의 대화에서, 각색에 관해 의견을 물어오는 경우가 있지만 전적으로 제작진의 자유로 일임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유는, ‘다른 매체’여서다.
수전 손택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영화로 만들기 좋은 소설의 특징은 서술방식이 외면화된 경우다. 외적인 경향이 강할수록, 액션이 많을수록 그렇다.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는 이 사례로 언급할 수 있을까? 이 소설에서 주인공 파이는 인도 폰디체리에서 살다가 열여섯이 되던 해 캐나다로 이주하기 위해 커다란 화물선에 오른다. 동물원을 운영하던 부모님은 물론 동물들이 함께 배에 오르지만 바다 한가운데서 배가 좌초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파이는 간신히 구명보트에 오르지만 파이와 네 마리 동물, 다리가 부러진 얼룩말과 오랑우탄, 하이에나, 그리고 커다란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함께 배에 있다. 그리고 이내 파이와 호랑이 둘만 남는다. 망망대해에서 먹잇감과 포식자 관계인 소년과 호랑이가 한 척의 구명보트에서 생존하는 이야기인 『파이 이야기』는 소설이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는 중에도 영화로 만들기는 쉽지 않으리라는 말이 돌곤 했다. 인도인 소년과 호랑이 한 마리가 이야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은 이 소설에서 장면 전환을 할 장소는 없고 오직 바다만이 그들 앞에 있으니까.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영화화에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안 감독이 2012년에 <라이프 오브 파이>로 만든 것이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아바타>를 만들어 발표한 후 3D 아이맥스 상영이 가능한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치솟던 시기였는데, <라이프 오브 파이>는 망망대해를 보여줌으로써 당시 3D 상영 영화 특유의 시야가 좁아지는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화면이 넓어지는 동시에 깊어지는 경험을 제공한 것이다. 특수상영관을 찾지 않았다 해도 이 영화는 멋지다고 말하고 싶은데, 말 없는 호랑이의 존재가 어떤 위협인지 또 어떤 위안인지 알 수밖에 없는 시각적 충격(한 소년이 굶주린 호랑이와 바다를 표류한다)에 더해, 바다가 어떤 곳인지 체험하게 하는 영화로도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바다를 무대로 하는 이야기는 폭풍우를 만난 어선의 이야기를 다룬 <퍼펙트 스톰>부터 다이빙 투어 중 바다에 남게 된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오픈 워터>까지 다종다양한데, <라이프 오브 파이>는 독보적으로 ‘바다의 50가지 그림자’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바다의 수많은 비밀과 거짓말을 이야기의 중심에 둔다. 수많은 생명이 그 안에 존재한다. 위협적이다. 아름답다. 두렵다. 속인다. 위장한다. 글로 읽고 상상하면서 신기한 이야기였던 여러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보면, 이곳이 외계의 어느 행성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는 바다라는 사실에 새삼스러운 경이감을 느끼게 된다. 수전 손택 식으로 말해 ‘외적인 경향’이 이 작품을 단순히 재밌는 상상 이상으로 끌어올린 셈이다.
최근에 『잉글리시 페이션트』가 새 번역으로 재출간되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9개 부문 상을 받은 이 작품은 마이클 온다치의 소설을 앤서니 밍겔라 감독이 영화화하기도 했다. 마이클 온다치의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1992년에 출간되고 부커상을 받았는데, 부커상 수상작 가운데 최고를 선정하기 위해 특별히 제정한 50주년 기념 황금 맨부커상을 받기도 했다. 영화의 수상 경력도 만만치 않은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녀주연상, 촬영상, 각색상을 포함해 그야말로 ‘중요한’ 부문을 휩쓸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시나리오는 두 부문으로 나뉘어 시상된다. ‘Academy Award for Best Original Screenplay’는 각본상으로, ‘Academy Award for Best Adapted Screenplay’는 각색상으로 번역되는데, 이 중 후자가 소설이나 만화, 연극 등 다른 매체로 먼저 쓰인 작품을 영화로 각색한 사례에 주어진다.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소설과 영화가 완전히 같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기할 정도로 다른 작품들처럼 별개로 느껴진다. 도입부와 결말부가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은 물론, 좋은 부분들이 일치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야말로 보여주기를 잘할 수 있는 장면들을 완벽하게 그려낸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한 남자가 혼자 힘으로는 죽을 수도 없는 상태로 간신히 숨 쉬고 있다. 전쟁의 포화에서 잠깐 피해 있는, 반쯤 폐허이자 반쯤 병원이 된 수도원 건물에서 전신 화상을 입은 그 영국인 환자는 간호사 해나의 보살핌을 받는다. 여기는 두 사람뿐이지만 인도인 공병 킵이 여기 나타난다. 대체 영국인 환자는 어쩌다 여기에 누워 있게 된 것일까? 그가 살지 죽을지는 좀 덜 궁금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 있는 순간들에 충실하고 가끔은 행복을 느끼는 것도 같다. 추억할 수 있으려면 살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잉글리쉬 페이션트> 스틸컷
앤서니 밍겔라 감독은 각색을 직접 하면서 영화가 압도할 수 있는 부분을 정확히 포착했다. 바로 자연이다. 오프닝에서 낯선 언어로 된 노래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아마도 돌 혹은 벽돌 같은 무언가에 물을 묻힌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보인다. 무엇을 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림판의 붉고 까끌거리는 질감은 다음 장면으로 부드럽게 겹쳐지는데 이제 우리는 모래 둔덕으로 이어진 사막 위를 나는 경비행기와 그 안의 여자(눈을 감은)와 남자(여자를 바라보는)를 보게 된다. 경비행기를 향한 폭격이 이어지고 비행기는 불길에 휩싸여 추락한다. 그리고 다음 장면. 간호사 옷을 입은 여자가 기차 안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주요 등장인물들을 차례로 보여주면서 시작하는 셈인데, 그중 한 사람은 우리가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로 등장할 예정이어서 도입부가 더 중요해진다.
소설의 1장은 「빌라」라는 제목이며, 정원에서 일하는 ‘그녀’를 가까이서 포착하는 묘사로 시작한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그 남자’를 볼 수 있는데, 이 남자는 전신에 심각한 화상을 입었으며 그녀는 그를 몇 달 동안 간호해 온 참이다. 해마처럼 잠든 성기, 마르고 좁은 엉덩이. 그녀는 그가 절망에 빠진 성자라고 생각한다. 화상을 덜 입어 그나마 로션을 발라줄 수 있는 가슴팍, 갈비뼈 맨 아래에는 움푹 들어간 살결 속의 벼랑같은 장소가 있다. 이 묘사를 천천히 읽으며 영화가 보여준 사막의 둔덕들을 떠올려보라. 빛이 닿는 곳의 높음과 그림자진 곳의 물결치는 어둠.
소설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정보를 최소한으로 준 상태에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온몸으로 기어가는 듯한 속도다. 누구인지, 무엇 때문인지, 어디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주의 깊게 들어야만 한다. 소설 속 영국인 환자가 입은 화상은 그의 성대도 다치게 했기 때문이다. 모르는 상태에서 곁에 있기. 소설은 그것을 실천한다. 곁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조금은, 아주 조금은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가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동안 고동과 슬픔 외에도 조금은 음미할 만한 무언가를 선사할 수 있도록. 마이클 온다치는 이 과정이 지루하지 않도록 사막의 열기를, 열기 때문에 더 잘 느껴지는 바람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글을 썼다. 문장은 현재형과 과거형이 섞여 있는데, 현재형이 될 때는 언제나 사랑의 순간들이다. 성애는 물론이고, 살아 있음의 순간 역시 현재형이다.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읽으면 절절하게 와닿는다. 보고 싶은 사람이 내 눈앞에 살아 숨 쉰다는 일의 아름다움. 영원히 현재형으로 눈앞에 다시 되돌려 살려낼 수 있는, 바래지 않는 생생한 삶의 활기.
마지막에 다다르면, 이 소설에서 내가 아끼는 대목이 나온다.
새벽 세 시경, 그는 방에 누군가의 존재를 느낀다. 찰나의 순간 그는 침대 발치에서 벽에 기대 있거나 혹은 벽에 그려져 있는 듯한 형체를 본다. 촛불 너머 어둠에 잠긴 수풀 그림 속에서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던 무언가를 중얼거리지만, 정적만이 흐른다. 희미한 갈색 형상, 어쩌면 그저 밤의 그림자일지도 모르는 그 형상은 움직이지 않는다. 포플러. 깃털을 단 남자. 헤엄치는 사람. 그리고 그는 그 젊은 공병에게 다시 말을 거는 행운이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잉글리쉬 페이션트』, 김영주 번역, 을유문화사, 379쪽)
이 장면에서 우리는 꼼짝하지 못하고 누운 남자의, 고통에 익숙해진 몸에 갇힌 남자의 시선을 공유한다. 빛이 어른거린다. 무언가가 다가온다. 저기서 움직인다. 감각은 환영을 점점 닮아간다. 이것이 죽음에 가까워지는 징조라는 것을 그는 느낀다. 설명하자면 삶의 ‘주마등’ 같은 순간이다. 하지만 마이클 온다치는 그 순간을 저렇게 묘사한 뒤 “그는 그 젊은 공병에게 다시 말을 거는 행운이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문장을 더했다. 다시 말을 걸 수 없으리라는 감각.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 매 순간 겪은 바로 그 감각이다. 이 장면을 영화는 아예 포기해버렸다. 소설을 읽는 우리는 침묵 속에서 머릿속으로 문장을 전달받는다. 그런데 소설에서 저 부분을 선명하게 전달하려면 내레이션이라는 소리를 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여기는 소리없음, 움직일 수 없음, 그렇게 ‘명멸하듯 꺼짐’이 중요한데 어쩌고저쩌고 감상적인 말을 늘어놓는다면 우리의 영국인 환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문장은,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박현주 번역에서와는 조금 달라져 있다. 앞서 인용한 문단의 마지막을 박현주 번역가는 이렇게 옮겼다. “젊은 공병에게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다니, 이렇게 운이 좋을 리가 없어. 그는 생각한다.” 한숨같은 문장이다. 마지막이 되니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는 것이다. 운명적인 사랑만큼이나 그 모든 게 끝나고 끝난 뒤에도 남아있던 삶의 편린들이 이제 와서 새삼 떠오르는 것이다. 중요하지 않았지만 중요했던. 이 문장은 문장 하나만으로는 아무 감흥이 없지만, 이 소설을 여기까지 읽어온 내게는 매번 눈물이 터지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이제 끝이 난다. 안도감일까? 후련함? 아쉬움? 마이클 온다치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을 아른거리는 환영, 간신히 움직이는 손가락, 그리고 멈춤. 그렇게 이별이 온다.
지금까지 <이다혜의 어떤 이야기는 두 번 태어난다> 연재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 팟캐스트 <리딩 케미스트리> 진행.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몇몇 영화들이 얼마나 소설인지 얼마나 영화인지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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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Shiwol
2026.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