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이 실제로 벌어지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오랫동안 바로 그 일을 기다려왔다는 사실 같은 것. 그 일이 온전한 현실이 되고나서야, 현실이 되길 바랐던 순간들이 벅차게 복구된다. 영희 페스티벌에서 마주친 많은 얼굴들도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바라던 거였구나. 그 얼굴 하나하나를 눈으로 찍으면서 기획자 오지은이 중얼거렸다. 저 얼굴들을 기다렸지. 그의 초대에 즉각 화답한 50여 팀의 여성 아티스트들은 각각의 무대에서 그런 순간을 여러 번 완성했다. 판매 하루만에 티켓이 매진되었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기는 했다. 모두가 준비되어 있었다. 여성이 중심이 되는 페스티벌의 아티스트와 관객이 될 준비. 이 글은 그 준비된 얼굴들의 환대와 웃음, 눈물이 남긴 진동의 영향 아래 쓰이고 있다. 페스티벌이 끝난 지 일주일, 우리는 어떻게 그 사흘의 진동을 기억하게 될까.
이름과 자리
토요일 첫 세션, ‘영희라는 이름과 호명의 역설’이라는 주제로 페스티벌의 기획 의도와 정체성을 나누는 자리가 내게 주어졌다. 이른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음악이 주가 되는 페스티벌에서 강연이라니(듣자마자 축제 때 주점에 와서 전공 이야기하는 노교수를 떠올림), 준비부터 조금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배제와 차별에 익숙한 탓에 자신의 자리를 확신할 수 없는 여성 창작자는 잘못된 자리에 와 있는 기분을 자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눈치껏 자리를 피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기획자의 제안에 “내가 함께해도 되는 자리인가요”하고 반응한 이들이 다수였다는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들처럼 나도 기획자의 감각을 믿어보기로 했다. 한국에서 19년차 인디 여성 음악가로 살아왔다는 것은 그에게 주어져온 자리든, 결코 주어진 적 없는 자리든 그것 자체에 민감해진 이력이 넘치면 넘쳤지 결코 모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테니까.
영희 페스티벌의 관객이 되는 것만으로 여성의 이름을 둘러싼 긴 저항과 싸움에 동참하는 셈이다.
페스티벌 날짜가 다가올수록 잠을 설쳤다. 종일 『로미오와 줄리엣』 2막 2장에 등장하는 줄리엣의 유명한 대사, “대체 이름에 뭐가 있길래?”를 중얼거렸다. 해보지 않고 영영 모르는 것보다 해본 후 너덜너덜해진 채 적어도 하나는 알게 되었다가 여성의 익숙한 성장담이다. 그런 각오로 당일 대기실에 도착했다. 정신없이 무대에 오르자 기대하지 않았던 환호와 박수소리가 울렸다. 마주 앉은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는지를 그냥 알 것 같은 울림이었다. 그때 직감했던 것 같다. 지금보다 몇 배나 큰 환호 속에서 많은 여성 창작자가 자신이 스스로 있어도 되는 자리, 오랫동안 자신을 옥죄던 어떤 호명들을 내려놓고 자유로울 수 있는 자리, 그러니까 ‘기다려온 제자리’에 서 있음을 확신하게 되리란 걸. 당신에게 당신의 영광을. 당신의 기쁨을. 그러니까 ‘영희(榮喜)’라는 이름 그대로의 자리에.
페스티벌의 이름이 된 ‘영희’는 새로운 의미이자 자리이다. 교과서에서 처음 호명된 여성의 이름으로 알려진 영희는 사실 1948년 첫 국정교과서에 등장한 ‘영이’가 잘못 전해진 이름이다. 영희가 일본식 이름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영이’로 고쳐 수록한 것이었는데 어떤 시간과 무관심과 곡절이 영이를 영희로 잘못 부르고, 전하고, 전달하면서 우리에게 왔다. 그 오인된 이름이 페스티벌의 이름이 되었다. 마치 20세기 내내 수많은 사진이 명성왕후라고 소개되었지만 곧 상궁이나 궁중 여인 혹은 신원미상의 얼굴로 밝혀진 것처럼. 테레사 학경 차가 자기 여동생의 얼굴로 알려지거나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자신을 연기한 한 여배우의 사진으로 웹상에서 유통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여성의 오인된 초상은 그들의 공식적 이름 없음과 자리 없음과 연결된다. 그러니까 ‘영희’라는 이름은 공식 역사와 기록에 아예 없거나 희박하게 남아 있는 탓에 진짜 얼굴과 이름이 부재해온 여성들의 자리이기도 하다. 비어있으므로 누구나 와서 자기 자리처럼 앉을 수 있는.
여성의 이름을 사회적·정치적 관계망 속에서 다시 부르기(강의 자료에서)
가능과 불가능의 증인들
페스티벌 장소인 마포아트센터 앞 광장과 층마다 살고 싶은 여자들이 있었다. 어쩌면 죽고 싶은 여자들도. 혹은 울고 싶은 여자들, 이해받고 싶은 여자들, 소리 지르고 싶은 여자들, 사랑하고 싶은 여자들, 어디에서나 이상하다는 말을 듣는 여자들, 그저 조용히 살아남고 싶을 뿐인 여자들… 이렇게 다르고 제각각인 이들을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호명할 때 우리는 언제나 그 ‘여성’이 누구를 포함하고 누구를 배제하는지 묻게 된다. ‘여성’이라는 이름 안에서 지워지는 존재들과 과대 대표되는 존재들의 문제는 언제나 중요하다. ‘여성’ 안에 역사가 있고, 기대와 관계, 억압이 있으며 무엇보다 균열의 가능성도 있다. 여성이 사회가 기대하지 않는 의미로 여성을 부를 때 그 균열의 틈으로 다양한 여성들이 발견된다. 영희 페스티벌은 자신에게 가장 멀리 있는 ‘영희’를 상상할 수 있는 장이기도 했다.
90년대 후반 여성 음악 페스티벌 ‘릴리스 페어(Lilith Fair)’를 향해 당시 “백인 중산층 여성 중심”이라는 내부 비판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후 다른 인종과 계급, 젠더의 자리를 확장하는 변화가 이어졌다. 언론과 음악산업이 여성들 사이의 경쟁 서사를 끊임없이 요구하던 시절, 경쟁을 거부하고 그 희소한 자리를 약자와 소수자를 포함한 공동체로 견인한 힘을 떠올려본다. 그것은 ‘여성’이라는 이름 아래 가려지는 많은 차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직면함으로써 얻은 힘이다. 차이가 창조성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는 오드리 로드의 말처럼. 영희 페스티벌은 어땠을까. 트렌스젠더 스탠드업 코메디언의 공연과 관련해 페스티벌이 끝난 직후 기획자 오지은에게 쏟아진 D.M은 “그것까지가 영희 페스티벌”이라고 한 그의 표현대로 페스티벌의 정체성을 한 번 더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서로 다른 여성들의 경험을 수용하는 정치적 언어의 부족함을 깨닫게 되는 데까지 페스티벌이다. 부족함을 인지한 이들만이 부족함의 증인이 된다. 같은 여성들끼리여서 좋았던 게 아니다. 서로 다른 여성들이 뒤섞인 곳이어서 웃기고 신나는 와중에 자신과 불화하는 여성성을 사유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그 시간과 사유의 증인이다.
왼쪽 릴리스 페어 포스터 오른쪽 영희 페스티벌 포스터. 위계를 없앤 이미지가 인상적이다.
더 많은 장면의 증인이 될 수도 있다. 여성 뮤지션과 남성 뮤지션을 ‘급’으로 나누던 말의 장면이나 여성의 무대를 시혜적으로 소비한 것이 아니냐는 표현의 장면 등은 여성들이 만드는 관계보다 남성의 인정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도록 사회화된 경험, 남성을 보편으로 상상하는 문화적 습관, 여성만의 공간을 결핍되고 부족한 곳으로 인식하는 구조 등이 어떻게 여성에게 내재화되는가를 잘 보여준다. 어떤 일이 지금 겨우 가능해지고 나면, 그동안 왜 그것이 그토록 일어나기 어려웠는지를 드러내는 현상이 즉각 뒤쫓는다. 축제는 끝났고, 여성들이 서로를 중심으로 한 세계를 상상하는 일이 어째서 그토록 힘든가를 질문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면들이 이어지고 있다. 질문하는 이들만이 그 실패와 어려움, ‘가부장제에는 젠더가 없다’는 말의 증인이 된다. 여성의 이름을 다시 부르고, 그들의 자리를 마련해보려고 맨 앞에 섰던 여성들 중 많은 수가 포기하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아름다웠던 첫 축제의 끝에 되새긴다. 이것 역시 여성의 익숙한 성장담이다.
그 세계가 이미 가능하다는 것
다음 페스티벌에 자리를 내어주고 싶은 여성들의 음악을 커버한 ‘존재 잇기’와 다음 이름들을 꼭 쥐고 그들의 자리를 상상한 관객들의 ‘기억 잇기’가 무언의 약속처럼 연결되던 마지막 날, 이번에는 의지를 담아 여러 얼굴들이 다음을 바라고 있었다. 1회의 영희가 더 멀리 있는 영희를 불러올 준비를 하면서. 언젠가 나와 가장 멀리 있는 영희까지 닿고 나면 그때는 또 다른 자리와 이름을 기대하게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분간 우리는 조금 더 영희이고, 날카롭고 부지런한 증인들이다. 어떤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게 된 여성의 꿈에는 세상에 없던 이야기가 가득하기 마련이다. 이제 그 이야기들이 전해질 차례다.
덧.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영희 페스티벌을 기획한 오지은에게 적어도 한 문장 정도는 헌정해도 좋을 것 같다. 개회사 자리에서 그가 “여러분이 뭘 살리고 있는지 지금은 모를 것”이라고 했던 말을 그에게 되돌려주고 싶다. 당신이 어떤 여성들을 살렸는지 당신은 모를 것이다. 오인 속에 갇힌 당신 자신을 스스로 구했다는 것도. 우리는 그렇게 다른 여자를 살리면서 자신을 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분노가 사랑을 점화시키기는 몇 번의 밤을 지나. 그래서, 다음 영희 페스티벌은…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김지승
경계 안팎의 유동적 위치성을 체현하는 작가이자 독립연구자. 문학, 문화이론, 정신분석학을 공부했고 현재는 제도 밖에서 여성적 읽기-쓰기의 공간을 짓고 허물기를 반복하며 다양한 여성 서사를 주제로 강의와 다매체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는 『100세 수업』 『아무튼, 연필』 『짐승일기』 『술래 바꾸기』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 『계절 쓰기』(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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