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그렇다면 문학이란 무엇일까? ㅡ 마지막화 | 예스24
모든 것을 부수고 갈가리 찢고, 그 벗겨진 피부에 소금을 들이붓는 작가가 있다. 바로 아니 에르노다.
글: 유상훈 (편집자)
2026.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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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아니 에르노 저/윤석헌 역 | 민음사

 


읽고 난 뒤에 아무 기억도 안 나는 그런 책이 있다. 틀림없이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 충격적인 반전도, 사건의 진범도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이따금 그런 책들이 머릿속의 분진을 털어 내고 일말의 기쁨을 안겨 주지만, 딱 거기서 내 곁을 떠나 버린다. 가파른 눈밭을 내달리듯 시원하게 나를 저 아래로 밀어내는 책들, 그 어느 것 하나 내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지 않는다. 한편, 끊임없이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부리 같은 책들도 있다. 당장 책장을 덮고 멀리 물리고 싶어지는 책들, 내 온몸은 곧 상처투성이가 된다. 그렇게 깊게 팬 상처가 아문 자리에 영영 잊을 수 없는 책의 글귀가 돋아난다.

 

무엇이 더 낫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서가에서 흔히 마주치는 온갖 책 중엔 가시 면류관처럼 생살을 파고드는 고약한 것들도 있음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토록 나를 상처 입히는 책을 만나는 일은 아주 드문 행운이다. 비록 나를 매섭게 매질하고 괴롭히지만, 나의 안온한 일상을 결연히 파괴하는 그 책들이 얼마나 값진지 겨우 깨닫게 되었다.

 

우리 영혼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상흔을 남긴다는 것은, 결국 인생을 변화시킨다는 의미다. 유한한 삶 속에서 모든 것을 다 체험하고, 낯선 이의 세계를 진심으로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는 각자 ‘나’라는 감옥에 갇혀 있고, 되도록 그 자그마한 둥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쓴다. 뭔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은 대개 고통스러우니까. 솜털로 뒤덮인 감옥에서 바깥 세계를 자기 방식대로 꾸며 내고 합리화하는 일은 쉽고, 달콤하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부수고 갈가리 찢고, 그 벗겨진 피부에 소금을 들이붓는 작가가 있다. 바로 아니 에르노다. 내가 어렸을 적에 만난 에르노의 책은 『단순한 열정』이었고, 어른들이 “외설”이라고 수군대던 순간이 여태 기억난다. 그렇게 그는 한동안 ‘이상한 작가’라고, 내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읽어서는 안 되는 불경스러운 존재. 그러다 한참 뒤에, 대학교 도서관에서 에르노를 다시 만났고, 그는 내가 기억하는 ‘그런 부류’의 작가가 전혀 아니었다. 외설이라니? 오히려 공포스러운걸! 나의 무지와 수치심을 일깨우고, 그의 잔인한 고백이 불러일으키는 공모 감각은 그야말로 두려움을 가져다주었다. 혹시 이마무라 쇼헤이의 〈나라야마 부시코〉(1983)를 본 적이 있는가? 오로지 생존하기 위해 생존하는, 사실상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 그 야만을 소름 끼치게 그려 낸 그 영화만큼 나를 질리게 한 작품은 없었다. 에르노의 ‘칼 같은 글쓰기’는 마치 치아 신경을 자극하는 그 예리한 통증처럼 나를 잠 못 이루게 했다.

 

그러다 다시금 아니 에르노가 나를 찾아왔다. ‘찾아왔다.’라는 표현이 정말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논픽션팀에서 해외문학을 편집하게 되었을 때, 내가 첫 번째로 다짐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책만을 만들겠다.’라는 다소 건방지고 우스운 소망이었다. 물론, 편집은 일이고 책은 상품이다. 내 기호에 상관없이 팔릴 만한 책을 만드는 건 봉급을 받는 노동자의 미덕이다. 그러나 또 그저 일처럼 해서는 잘 굴러가지 않는 게 이 바닥의 순리다. 어찌 좋아하지도, 신뢰하고 공감할 수도 없는 작품을 최소 세 번씩 숙독할 수 있겠는가? 당장 내게 기획할 기회가 왔을 때, 나는 평소 보석함에 넣어 둔 작가들을 하나둘 나열해 보았다. 전부 열거할 순 없으나, 그중 ‘아니 에르노’가 일 순위에 있었음은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우리말로 에르노를 애독해 온 만큼, 새로이 계약할 만한 책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연락이 왔다. “아니 에르노의 『사건』이라는 책을 번역하고 싶습니다.” 바로 이 책을 번역한 윤석헌 선생님의 메일이었다.


『사건』은 임신 중지에 관한 책이다. 에르노가 자기 작품 속에서 ‘임신 중지’를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첫 작품부터 일관되게 자기 계급과 성(性)과 불편함을 자극하는 온갖 경험들에 대해 집요할 정도로 속속들이 얘기해 온 터였다. 그러나 『사건』은 가장 대담한 고백이었다. 그동안의 글쓰기가 대개 픽션 속에 자전적 요소를 뭉뚱그려 온 정도였다면, 『사건』은 그의 실제 경험이 픽션이라는 안전망을 뚫고 융기한 경악스러운(시쳇말로 ‘positive’하게 말이다.) 작품이었다. 그토록 거침없는 에르노조차 ‘임신 중지’가 더는 불법이 아니게 된 뒤에야, 그러고도 몇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이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하니, 그 용기를 감히 헤아릴 수 없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책을 계약할 당시에 우리나라에서는 ‘임신 중지’를 둘러싸고 법제적 쟁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건』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생각은 거의 의무감으로 발전했고, 주저함 없이 이 책을 펴내기로 결심했다.

 

내가 요약한 『사건』의 줄거리를 그대로 옮겨 적자면 이러하다. 

 

주인공 화자는 성병 검사의 결과를 기다리며, 불현듯이 1963년 10월의 한순간, 일주일 내내 “생리가 시작되기만을” 간절하게 소망했던 그 절망적인 시간 속으로 거칠게 휩쓸려 들어간다. 주인공은 한 남자 학생과 관계를 맺은 뒤,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절박한 심정으로 평소 자유연애를 지지하고 여성 인권에 민감한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지만, 그들조차 ‘임신 중절’을 예외적인 일탈로 낙인찍으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낸다. 결국 주인공은 ‘임신’과 ‘중절’이 암시하는 신분 추락, 학업 실패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아무도, 심지어 제도마저 보호해 주지 않는 최후의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물론, 이 사이사이에 더 끔찍한 일화들(가령, 임신한 상태이니 잠자리를 하기에 가장 안전한 여자라며 접근해 오는 남자의 이야기는 너무 불쾌한 나머지 잊히지 않는다.)과 임신 중지를 위해 (목숨을 걸고) 갖가지 방법을 시도하는 절박한 상황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에르노는 “저급한 진실이란 없다.”라고 선언하며 그 ‘사건(L'événement)’의 절대성을 폭로하고, 우리에게 계몽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 심지어 임신 중지라는 ‘사건’에 계급까지 얽혀 있음을 통찰한 그의 문장은 읽는 이로 하여금 수치심으로 전율하게 한다. “막연하게 내가 태어난 사회 계층과 내게 일어난 일을 연관 지어 생각했다. 노동자와 작은 가게를 하는 가정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첫 번째 사람이었기에, 나는 공장이나 상점 계산대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칼로레아 합격도, 프랑스 문학 학사 학위도, 알코올 중독자와 마찬가지로 임신한 여자아이가 상징하는 그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운명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몸뚱이 때문에 나는 다시 따라잡혔고, 그때 내 안에서 자라나던 것은 어떻게 보면 사회적 실패 그 자체였다.”(『사건』에서)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우리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게 하고 연약한 무릎에 훈장 같은 상흔을 남기는 그런 작품이 있다. 문학의 효용은 우리의 좁은 시야를 깨부수고, 분연히 다시 일어서게 하며, 부상(負傷) 따위에 겁먹지 않는 용기를 심어 주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은 언제나 내 뺨을 때린다. 잠들지 말라고, 안주하지 말라고. 요컨대, 그의 경험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에르노의 작품은 그의 삶에서 길어 낸 진실을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일종의 숭고한 희생이다. 

 



지금까지 유상훈 편집자의 해외문학 리뷰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2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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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m1859

2026.06.29

알베르 카뮈가 장 그르니에의 <<섬>>을 벼룩시장 헌책방에서 만났을 때의 느낌을 묘사한 글이 떠오르는 멋진 글이네요. <<단순한 열정>>을 읽고 꽤 많은 문장을 메모한 기억이 있는데, 이 책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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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ttyghil

2026.06.29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책을 확실히 좋아하는데, 정말 읽는것만 좋아해요.. 이제 책을 정말 잘 꿰뚫어 보고싶네요!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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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아니 에르노> 저/<윤석헌> 역

출판사 | 민음사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저/<최정수> 역

출판사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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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훈 (편집자)

책을 읽고, 책을 만들고, 좋은 책을 찾아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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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

1940년 9월 1일 프랑스 릴본에서 태어나 노르망디 이브토에서 성장했다. 프랑스 작가이자 문학교수이다. 루앙 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한 뒤 중등학교 교사, 대학 교원 등의 자리를 거쳐 문학 교수 자격을 획득했다. 자전적 요소가 강한 그녀의 작품들은 사회학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를 노르망디의 소읍 이브토Yvetot에서 보냈고, 노동자에서 소상인이 된 부모를 둔 소박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루앙 대학교를 졸업, 초등학교 교사로 시작하여, 정식 교원, 문학 교수 자격을 획득했다.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사회에서 금기시 되어온 주제들을 드러내는 '칼 같은 글쓰기'로 이를 해방하려 노력해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4년, 자전적인 소설 『빈 장롱Les Armoires vides』으로 등단했고, 1984년, 역시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남자의 자리La place』로 르노도상을 수상했다. 2008년, 전후부터 오늘날까지의 현대사를 대형 프레스코화로 완성한 『세월들』로 마르그리트 뒤라스상, 프랑수아 모리아크상, 프랑스어상, 텔레그람 독자상을 수상했다. 2011년, 자신의 출생 이전에, 여섯 살의 나이로 사망한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인 『다른 딸L'autre fille』을 선보였고, 같은 해에 12개의 자전 소설과, 사진, 미발표 일기 등을 수록한 선집 『삶을 쓰다Ecrire la vie』를 갈리마르 Quarto 총서에서 선보였다. 생존하는 작가가 이 총서에 편입되기는 그녀가 처음이다. 2003년 자신의 이름을 딴 아니 에르노 문학상이 탄생했다. 2020년 『삶을 쓰다』에 실렸던 글들을 추려서 재수록한 『카사노바 호텔』을 발표했다. 데뷔 시절부터 아니 에르노는 노르망디의 소읍 이브토의 카페-식료품점이었던 자신의 유년 시절로 구성된 자전적 소재에 몰두하기 위해 모든 픽션을 포기했다. 역사적 경험과 개인적 체험을 혼합한 그녀의 작품들은 부모의 신분 상승(『남자의 자리』, 『부끄러움』), 자신의 결혼(『얼어붙은 여자』), 성과 사랑(『단순한 열정』, 『탐닉』), 주변 환경(『밖으로부터의 일기』, 『바깥세상』), 낙태(『사건』), 어머니의 치매와 죽음(『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한 여자』), 심지어 혹은 자신의 유방암 투병(『사진의 사용』, 마르크 마리 공저)을 소재로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해부하였다. 그녀는 “판단, 은유, 소설적 비유가 배제된” 중성적인 글쓰기를 주장하면서 “표현된 사실들의 가치를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는 객관적인” 문체를 구사, “역사적 사실이나 문헌과 동일한 가치로 남아 있기를” 소망한다. 에르노에게는 “자아에 내재된 시적이고 문학적인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글쓰기는 “문학적, 사회적 위계를 전복하려는 의도에서 출발, 문학과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대상들 ― 슈퍼마켓, 지하철 등 ― 에 대해, 이것보다 고상한 대상들 ― 기억의 메커니즘, 시간의 감각 등 ― 을 서술하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그 둘을 결합하여” 글을 쓴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나와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생각할 때 썼던 그 단어들을 되찾는 일이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은 “개인의 기억 속에서 집단의 기억을 복원”하려는 사회학적 방법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개인성의 함정”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노력의 산물인 그녀의 작품은 자전의 새로운 정의를 부여했다. “내면적인 것은 여전히, 그리고 항상 사회적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순수한 자아에 타인들, 법,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아니 에르노는 사회학자의 방법론을 채택, 자신을 집단적 표본과 특성을 체득한 한 체험자의 총합으로 간주한다. “나는 나를 특수한 존재로서, 절대적으로 특수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나 자신을 생각한 적이 거의 없다. 나는 나를 사회적, 역사적, 성적 경험과 판단의 총합, 언어의 총합, 또한 세계(과거와 현재)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하나의 특수한 주관성을 형성하게 된 총합으로 간주한다. 나는 나의 주관성을 보다 일반적이고 집단적인 메커니즘과 현상을 되살리고 그것을 밝히기 위해 사용한다. ” 그녀에 따르면 사회학적 방법은 전통적으로 자전적인 ‘나’를 넓힐 수 있는 방법이다. “내가 사용하는 나는 비인격적 형태를 띄고 있다. 성별도 애매하고, 종종 나의 말이기보다는 타인의 말일 수도 있는, 전체적으로 다인격적 형태이다. 그것은 나를 픽션화하는 수단이 아닌, 내 체험 속에서 현실의 지표들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로써 그녀의 작품은 자신의 궤적의 “사회적 이종교배”(소상인의 딸에서 학생, 교수, 이어 작가가 된)와 그에 따르는 사회학적 메커니즘을 다루고 있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사망을 접하고 [르몽드]지에 애도의 헌사문 「부르디외, 회한」을 기고하면서 사회학적 방법론과 자신의 작품 사이의 유대감을 밝혔고, 부르디외의 글이 그녀에게 “자유와, 세계 펼에서의 실천이성과 동의어”였다고 밝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