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삭의 중화권 대중문화와 문학
[김이삭 칼럼] 나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ㅡ 타이완 국제 낭독극 페스티벌을 앞두고 | 예스24
혹시 6월 19일부터 28일까지 타이베이에 머문다면, 타이베이 퍼포밍 아트센터에 가보는 건 어떨까. 한-타이완 연극 교류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될 것이다.
글: 김이삭
2026.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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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모 정부 기관에서 주관하는 국제 문화 교류 사업에 지원했다. 해외로 파견되어 연구 수행을 할 기회를 얻는 지원 사업이었다. 나는 연구 분야는 “동시대 타이완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 의제인 ‘역사’, ‘디아스포라’, ‘본토 의식’, ‘양안 관계’, ‘퀴어’ 등을 다룬 타이완 희곡 작품”으로, 연구 주제는 “타이완 희곡은 ‘타이완 의식’을 어떻게 재현하며 형성하는가”로 잡아 신청했다. 

 

며칠 전 서류 단계를 통과해 면접도 보고 왔는데 그날 받았던 면접 질문 중에 아주 흥미로운 질문이 하나 있었다.

 

소설도 쓰고, 소설 번역도 하고, (화어권 한정으로) 국제 문학 교류도 하는 사람이 갑자기 연극계로 넘어와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생소한데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냐는 질문이었다. 

 

순간 나는 온갖 고민을 했다. 나는 뭘 하는 사람이지.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는 다리? 작가 섭외도 하고, 대학과 협력해 문학 행사도 열고, 행사 통역과 홍보도 하는? 희곡 번역도 하고 드라마터그도 하는? 지원금을 따오기도 하는? 뭐든지 다 하는 사람? 

 

국가 정체성이나 성 정체성, 혹은 작가나 번역가와 같은 프리랜서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은 고민해 본 적이 있어도 내 직업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처음이었다. (이때 나는 ‘판을 짜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또 아닌 듯하다. 판만 짜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대신 내가 요즘에 뭘 하고 있는지는 확실히 알고 있다.

 

요즘 나는 낭독극 페스티벌을 준비하고 있다. 작년 3월부터 비영리 기구인 타이완 프롤로그센터와 함께 1년 넘게 준비한 행사로 이달 19일에 타이베이 퍼포밍 아트센터에서 드디어 막을 올린다.

 

정식 이름은 ‘제1회 타이완 국제 낭독극 페스티벌’. 


제1회 타이완 국제 낭독극 페스티벌 도서전 주빈국처럼 매년 주빈국이 있어 국제 연극 교류에 방점이 찍힌 낭독극 프로그램이다. 첫 회인 올해는 한국이 주빈국으로 타이완 극단이 한국 희곡 여섯 작품과 타이완 희곡 한 작품을, 한국 극단(충북도립극단, 한예종 연극원)이 타이완 희곡 다섯 작품을 낭독극 형식으로 상연한다.1

 

사실 프롤로그센터로부터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고민이 많았다. 어쨌든 내가 주로 활동하는 분야가 소설이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키우게 된 뒤로는 공연을 보기가 어려워졌고, 충청도로 이사 온 뒤로는 상경하지 않고서야 공연을 볼 수 없었기에 (영화도 10km는 운전해 시내로 나가야 한다) 관련 업데이트가 전혀 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언어 소통이 잘되는 것 외에는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2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내가 주로 활동하는 분야가 소설이라 오히려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먼저 나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기에 권력형 성범죄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에 공연계 사람이 아니었기에 공연계 내부의 권력형 성범죄 문제에 단호하게 반응했다. 가해자가 미치는 업계 영향력 같은 건 말 그대로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개인적으로 아는 이가 정말 없다……) 나는 타이완 측에 한국 공연계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주었고,3 ‘연극계 성폭력'과 관련된 사람과는 협업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몇 번이나 밝혔다.4

 

또한 소설 번역가라는 신분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희곡 번역 지원금을 따오기도 했고,5 타이완 문학 기지 상주 작가로 있을 때는 일부러 극작가들과 함께하는 대담을 기획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연극계와 협업할 때조차, 나는 소설가이거나 소설 번역가였던 거다. 완전히 그렇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 어느 정도는 그러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굳이 규정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스스로를 규정한다는 건 그 역할을 정하기에 한계를 만들 수밖에 없으니까. 반면 내 역할은 언제든 변할 수 있었고, 수시로 교차하거나 포개졌다. 

 

아무튼 이렇게 역할을 한정할 수 없는 다중 신분으로 준비했던 일이 드디어 결실을 본다. 

 

혹시 6월 19일부터 28일까지 타이베이에 머문다면, 잠시 시간을 내서 타이베이 퍼포밍 아트센터로 가 낭독 공연을 보는 건 어떨까. 유례없는 한-타이완 연극 교류를 현장에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될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조금은 다른 형식으로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다. 한국어로 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2026년 타이완 국제 낭독극 페스티벌에 선정된 타이완 희곡 작품들이다.

 

 

『천년의 가려움』

천치아오롱 저/김이삭 역 | 연극과인간

 

2025년 타이완 문학상 희곡 부문 수상작. 인간의 피부 주름 사이에 기생하는 옴진드기. 기적처럼 수명의 임계점을 넘은 옴진드기 ‘태조’의 병상 옆, 후손들은 수백 년 동안 인간의 몸에 기생하며 겪어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타이완으로 건너온 한 군인의 배꼽에 스며든 향수와 분노, 밀레니엄 시기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만나던 연인의 손톱 틈에 감춰진 비밀 그리고 팬데믹 시기의 마카오 카지노까지. 옴진드기들은 미시적인 인간 신체의 지도를 가로지르며 서로 다른 시대 속 인간들의 사랑과 욕망, 그리고 집착을 냉소적으로 지켜본다.


『공습경보』

웨이위자 저/김이삭 역 | 연극과인간

 

타이완문학상, 타이베이문학상, 신베이시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웨이위자 작가가 그려낸 전쟁, 그 속에 담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전쟁의 기억에 관한 광기 어린 콜라주로, 서로 다른 시대의 생존 파편들을 한데 뒤섞는다.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학생들을 이끌고 폭격을 피해 방공호에서 지내게 된 린 선생에서부터 시작해 화면 앞에 앉아 드론으로 사람을 죽이는 한 부사관의 이야기로 전환되기도 하고 열대 정글에서 싸우며 화해하는 병사들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각국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여 축하 파티를 하는 황당한 장면이 펼쳐지기도 하고, 전기 충격 탐지기로 사용 언어를 감시당하는 한 가정과 군인의 피와 살을 먹고 자란 나무가 나오기도 한다. 작품은 언어의 번역과 오독 속에서, 극한의 공포에 놓인 인간이 갈망하는 ‘정상적인 삶’에 대한 비루한 욕망과 정신적 변이를 그려낸다.

 

『고등학생의 일상』

리청쥔 저/오수경, 박정훈 역 | 연극과인간

 

극단 복상공장(複象公場) 단장이자 대신예술상, 에딘버러 페스티벌 Summerhall Lastrum Award, 타이베이문학상 등을 수상한 리청쥔의 작품. 한 고등학교 3학년 학급의 일상 속 성추행, 학폭, 가정폭력, 왕따 등으로부터 학업 스트레스와 교우 관계까지 폭넓게 다룬 청소년 성장기. AB, BC, CD 방식으로 2인 간의 대화를 통해 총 39명의 학생이 학급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개개인의 인식과 전파 및 소통 방식을 보여준다. 

『망고나무 만세』

린 관팅 저/임미주 역 | 연극과인간

 

극작가이자 희곡 번역가인 린관팅의 데뷔작. 60년을 아우르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삼대 가족의 서사극. ‘군인 마을(眷村)’ 안에 서 있는 한 그루 망고나무를 중심으로, 나무의 시선을 통해 황씨 가문 3대가 대만 근현대사 속에서 겪는 갈등과 부침을 그려낸다. 가족 구조, 성 역할, 국가 정체성이 한 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고사관, 만약 이런 일이 생긴다면』

린 투안추 저/임미주 역 | 연극과인간

 

일제강점기 타이완에서 현대적 희곡을 창작하고 공연했던 린투안추의 대표작들. 「고사관」은 중일전쟁 이후 지룽항에 있는 한 낡은 여관인 고사관을 무대로 여관 운영자인 우위안과 아푸, 아슈 모녀, 그리고 주변 소시민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현대인의 이동, 기다림이라는 주제를 다룬 이 극은 여관을 통해 타이완의 운명을 은유한다.

 

「만약 이런 일이 생긴다면」은 1957-60년에 창작된 미완성 원고다. 작가가 위펑 영화사에서 학생들을 훈련하기 위해 쓴 연습용 극본 중 하나로 총 5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원래는 일본어로 창작되었다. 미국이 일본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 후 사람들의 성별이 뒤바뀌었다는 설정을 기반으로 한 이 극은 두 쌍의 부부와 연인의 이야기를 통해 젠더를 풍자한다.

 



1 이번 페스티벌에 선정된 한국 작품은 <그게 아닌데> (이미경), <먼 데서 오는 여자> (배삼식), <미친 극> (최치언), <벚꽃극장 1937> (문의영), <텍사스 고모> (윤미현), <왕서개 이야기> (김도영)이며 타이완 작품은 <천년의 가려움> (천치아오롱), <공습경보> (웨이위자), <고등학생의 일상> (리청쥔), <망고나무 만세> (린관팅), <고사관>(린투안추), <만약 이런 일이 생긴다면>(린투안추)이다. 타이완 희곡 중 <만약 이런 일이 생긴다면>만 타이완 극단이 상연한다. 한국어 공연일 경우 영문과 중문 자막이, 표준 중국어 공연일 경우 한글과 영문 자막이 제공된다.

 

그런데도 수락했던 건 나 외에는 딱히 할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타이완 소설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번역가가 한줌단이라면, 타이완 희곡을 번역하고 관련 협업을 함께하는 번역가는 학자 외에 전무하다고 봐야 한다. 또 타이완 기관이나 한국 기관에서 지원금을 끌어와야 했기에 양국의 번역 지원금 제도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타이완 연극계는 퀴어가 많은 편이라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에 의한 권력형 성범죄가 일어나는 일이 별로 없다고 한다.


내부 소식을 몰라서 피해 가지 못한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알면서도 안 피한 경우는 없었다. 내가 희곡 선정에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지만, 최소한의 필터링 역할은 하였다고 자부한다(?!). 


이때는 타이완 문학 기지의 상주 작가로 파견되기 전이라서 타이완 문학관에 교류하던 이가 전혀 없었는데, 작년 도서전 때 얻었던 관장의 명함에 적힌 주소로 염치 불고하고 장문의 메일을 보내 지원을 읍소했다. 타이완 희곡이 한국에서 (내가 알기로) 단 한 번도 번역 출간된 적이 없다는 점, ‘타이완 국제 낭독극 페스티벌’이라는 개최가 확실한 행사를 기반으로 양국의 연극 교류를 촉진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내가 타이완 소설을 번역하는 번역가이자 『1938 타이완 여행기』의 한국어판 번역을 맡고 있어 타이완 출판계에서 나름 유명하다는 점도 설득에 큰 영향을 미쳤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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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a lee

2026.07.04

이런 좋은 기회를 놓쳤네요 미리 알았다면 꼭 갔을거에요~ 김이삭 작가님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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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가려움

<천치아오롱> 저/<김이삭> 역

출판사 | 연극과인간

공습경보

<웨이위자> 저/<김이삭> 역

출판사 | 연극과인간

고등학생의 일상

<리청쥔> 저/<오수경>,<박정훈> 역

출판사 | 연극과인간

망고나무 만세!

<린 관팅> 저/<임미주> 역

고사관, 만약 이런 일이 생긴다면

<린 투안추> 저/<임미주> 역

출판사 | 연극과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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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삭

평범한 시민이자 소설가 그리고 번역가. 중화권 장르 소설과 웹소설, 희곡을 번역했으며 한중 작가 대담, 중국희곡 낭독 공연, 한국-타이완 연극 교류 등 국제 문화 교류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한성부, 달 밝은 밤에』, 『감찰무녀전』, 『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 등이, 역서로는 『여신 뷔페』, 『다시, 몸으로』 등이 있다. 홍콩 영화와 중국 드라마, 타이완 가수를 덕질하다 덕업일치를 위해 대학에 진학했으며 서강대에서 중국문화와 신문방송을, 동 대학원에서는 중국희곡을 전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