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형태를 바꿀 뿐이다. 어떤 기억은 말로 꺼내지지 못한 채 몸에 남고, 어떤 기억은 끝내 타인의 이야기로 되돌아온다. 김희재의 연작소설 『우리는 한때 같은 성에 살았고』는 그런 기억의 구조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작품이다. 한 공간, 한 사건,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삶들. 서로 다른 자리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과거를 견디고, 때로는 외면하고, 때로는 반복한다.
이 소설에서 ‘성’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보호와 억압이 동시에 작동하는 장소이며, 빠져나왔다고 믿지만 여전히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인물들은 그 안에서 고립되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향해 미세하게 연결된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언어는 침묵인데,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관계를 규정하고, 말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 오래 지속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끝내 질문한다. 우리는 어떻게 그 성을 빠져나올 수 있는가. 혹은, 정말로 빠져나올 수 있는가. 소설가 김희재에게 이 이야기를 물었다.
『우리는 한때 같은 성에 살았고』는 연작이면서도 하나의 장편처럼 읽힙니다. 이 구조는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었나요?
구조를 의도하고 쓰진 않았지만 같은 경험과 다른 기억으로 연결된 네 여자의 이야기를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작이면서도 장편 같은 소설이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책의 첫 번째 소설이자 표제작인 「우리는 한때 같은 성에 살았고」에는 기억을 잃어가는 한 여자가 나오는데요. 그 여자가 끝내 잃지 못하는 단 하나의 기억을 중심으로 다른 인물들이 얽혀 있습니다. 여자의 조카인 이소와 여자의 새언니인 강주연, 그리고 여자의 간병인인 안성희입니다. 이 세 인물의 이야기를 연작으로 이어 쓰며, 첫 번째 단편에서 미처 다 그려내지 못한 어떤 기억과 사건을 완성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성(城)’은 매우 중요한 은유로 작동합니다. 작가님이 생각하는 이 ‘성’은 어떤 공간인가요?
저는 예전부터 외양과 쓰임새가 완전히 상반된 공간이나 건축물에 무척 흥미를 가져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옥으로 쓰이게 된 오래된 성’을 꼭 한번 소설 속에 녹여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성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상반되는 관념으로 치환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예를 들면, 안락함과 불편함, 억압과 해방, 기억과 망각, 상처와 회복, 절망과 희망, 그리고 삶의 붕괴와 구원 같은 것으로요. 무엇보다, 과거의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소설 속 네 여자의 삶과 개인적인 역사는 여러모로 ‘성’과 비슷한 지점이 있습니다.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쌓아 올린 벽 안에 스스로 갇혀버렸고, 그곳에서 간신히 빠져나왔으나 여전히 상흔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요. 어쩌면 사람들은 저마다 그런 성을 하나씩 갖고 있고, 지금도 자신만의 성을 쌓으며 살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과거의 폭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폭력은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보다 기억과 감각의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서술한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이 소설이 어떤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생존에 대한 이야기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소설 속 네 여자는 각기 다른 고통의 시간을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입니다. 그 고통의 시간은 인물들의 현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지요. 그럼에도 그들은 계속 살아갑니다. 자신에게 남은 폭력의 흔적을 부정하지도, 용서하지도 않은 채로 묵묵하게요. 저는 그러한 삶의 태도를 그리고 싶었고, 그래서 과거를 구체적으로 재현하기보다 인물들이 감내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기억과 감각, 즉 과거의 흔적이 남은 지금의 현상과 증상에 더 집중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침묵’입니다. 말하지 않는 것 혹은 말할 수 없는 것이 관계를 규정하는데요. 작가님에게 침묵은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침묵이 이미 말해진 것과 앞으로 말해질 것들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어떤 양감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쓸 땐, 문장과 문장 사이의 행간이 침묵의 기능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일부러 문장을 덜어내기도 했습니다. 이미 쓰인 문장들에 더욱 다양하고 풍성한 의미가 실리기 위해선 빈자리가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일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온전하게, 원형 그대로 기억되기도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어떤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을 때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침묵을 택합니다. 가끔, 침묵을 도피처럼 쓰기도 하는데요. 겁이 날 때, 불안할 때,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거나 혹은 감정이 널뛰어 가라앉히기 힘들 때 입을 닫고 소리가 없는 곳으로 숨는 편입니다. 그렇게 정적 속에 가만히 있다 보면 다시 밖으로 나갈 용기가 생겨나기도 하더라고요. 어쩌면 침묵은 제게 일종의 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물들은 서로를 통해 자신을 비추고, 때로는 구원받는 순간에 가까워집니다. 작가님이 생각하는 ‘구원’은 이 작품에서 어떤 형태로 존재하나요?
예전부터 ‘구원’이란 단어를 두고 자주 고민하고 생각했는데요. 그건 그 단어가 명확하게 정의하기에 너무나 많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믿음에 대한 소설을 쓸 때는 구원을 일종의 희망과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쓸 때는 구원을 ‘생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감’, 혹은 ‘계속 살아갈 것을 스스로에게 허용함’과 같은 의미로 정의했습니다. 소설 속 여자들이 폭력의 기억을 안고서도 계속 자신의 인생을 덤덤하게 살아가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크나큰 고통을 겪었지만 끝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것, 스스로에게 계속 살아갈 것을 허용하고 오직 자신에게만 중요한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런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야말로 제가 이 소설에서 빚어내고 싶었던 구원의 형태입니다.
소설에는 기억을 붙잡는 인물과 기억을 지우려는 인물이 동시에 등장합니다. 작가님은 이 두 태도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요? 혹은 둘 사이를 오간다고 느끼시나요?
저는 매 순간 둘 사이를 정신없이 오갑니다. 사실 기억을 지우려는 것도, 기억을 붙잡으려는 것도 어떤 감정이나 일을 의연하게 처리하지 못해 생기는 방어기제라고 생각하는데요. 자신에게 생기는 일을 자연스럽게 넘기다 보면, 굳이 기억을 붙잡을 필요도 없고 지울 필요도 없는 법이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습관처럼 반추하고 후회하고 불안해하고 의심하고 곱씹는 유형의 사람이라 온갖 기억을 다 붙잡고, 그걸 또 애써 지우려고 합니다. 그럴수록 기억은 더 강하게 남아서 존재감을 드러내지요. 다행인 점은, 그렇게 지우지 못한 기억도 또 다른 새로운 사건에 맞닥뜨리면 자연스레 밀려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매일 크고 작은 기억들과 싸우다 보니, 기억과 망각이라는 주제의 소설을 쓰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가장 오래 남기를 바라는 감정이나 질문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를 바랍니다. 삶에서 도망치고 벗어나는 대신 버텨야겠다는, 그 무엇이든 붙잡고 끝까지 할 수 있는 것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를 바랍니다. 이소의 엄마 강주연이 이소에게 말했듯이요.
“네가 할 수 있는 걸 끝까지 해. 그걸 붙잡고 살아.”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우리는 한때 같은 성에 살았고
출판사 | 다산책방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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냥
2026.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