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상처에 걸맞은 회복과 생존의 서사 | 예스24
너른 세상의 밭에 삶도 죽음도 흩뿌려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자를 잘라 다시 심으면 감자가 되는 것처럼, 우리는 그걸 죽음이라고 부르고 삶이라고 부르는 것뿐이지 않을까 하고 소설을 쓰면서 어렴풋이 생각했습니다.
글: 출판사 제공 사진: 출판사 제공
202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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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승의 내장 같은” 산길을 달리는 오래된 다마스. 여기에는 기도원에서 만나 함께 자란 세 아이가, 죽은 친구가 남긴 땅으로 차를 몰고 있다. 트렁크에는 그 친구를 죽게 만든, 정확히는 그렇게 만들었다고 믿고 있는 한 남자가 결박된 채로 실려있다. 이들이 향하는 땅은 아이들을 어둠에서 구원해 줄 수 있을까. 

 

『우리들의 농경 사회』는 닭이 알을 품는 12월의 소한을 지나, 범이 교미를 시작한다는 11월의 대설까지 1년의 절기를 꼭꼭 씹어 먹으며 마침내 살아내는 소설이다. 아이들은 삽을 들어 과거를 묻은 땅 위로, 깻잎을 심고, 감자를 키워 나간다. 제3회 〈연세-박은관문학상〉 수상작인 이 작품은 ‘공통 감각이 사라져 가는 이 시대의 상처에 걸맞은 회복과 생존의 서사를 보여줌으로써 구원의 의미를 탐색했다”는 평을 받았다. 어디로 발을 내디뎌야 할지 혼란스러운 이들에게, 일찍 삶의 고난을 겪어버린 아이들이 땅 위에서 땀 흘리며 성장하는 모습이 하나의 생생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작품은 소한, 우수, 입하처럼 절기로 목차가 구성되었고, 각 챕터는 다시 단어와 그에 얽힌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작가님의 집필 과정이 궁금합니다. 절기와 단어가 먼저 떠올라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셨을까요? 아니면 이야기를 쓰다 보니 절기가 맞아떨어졌나요? 전반적인 집필 과정이 궁금합니다. 

농협에서 나눠 주는 달력이 있습니다. 숫자가 크고 그림이나 사진도 없이 직관적인 달력입니다. 음력 표기가 있고 절기가 나와 있는 달력인데, 아이돌 달력이나 무한도전 달력만큼 인기가 많습니다(정말요^^). 연말이면 이 달력을 받으러 가는 일이 중요한 행사처럼 느껴집니다. 꼭 그 달력이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농사 달력을 보며 자랐습니다. 이야기를 구상했을 때도 계절과 생장의 시간 감각이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뼈대가 될 목차를 자연스럽게 우리가 익숙하게 쓰는 양력이 아니라 음력과 절기로 떠올렸습니다. 절기를 설명하는 문장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우리는 왜 이런 리듬을 잊은 채 몇 월 몇 일이라는 단조로운 시간 속에서 살아갈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계절을 감각하며 생의 리듬을 따라 살아갈 수도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자 쓰려던 이야기가 더 생생하게 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제가 농사 달력을 보고 자랐듯이 농사 달력 속 절기를 따라 소설도 자랐는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은 ‘기도원’에서 자랍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이 아이들은 ‘어머니’를 섬기며 무릎을 꿇고 하염없이 기도하거나 울고, 벌을 받고, 기도로 로또 번호를 알아내라는 명령에 숫자를 읊기도 합니다. 세 아이가 만나는 공간으로 기도원을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누군가 이 소설을 리틀 포레스트 지하 버전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기도원의 절망이 농경 사회로 이어지는 이야기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는 구원될 수 있을까?’라는 소설의 질문을 좀 단순하고 보편적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기도원은 이런 질문을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큰 욕망이 있고 그건 극단적이고 맹목적이고 거대한 자본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도원을 나와 농경 사회로 들어가 인물들이 지금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것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멀리서 보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질문하고 싶었습니다. 성장이라는 것이 반드시 크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작게 여러 갈래로 천천히 뻗어 나가는 것에 가까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 로 질문을 바꾸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바로 ‘농사’, ‘농경’입니다. 감자를 심고, 완두콩을 심고, 여러 어려움을 겪지만 끝내 수확해 내는 정직한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졌는데요. 농사와 농경이 이야기의 큰 줄기가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불조심 포스터나 미래의 모습에 대해 그리기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시절 저는 집에 불이 날까 걱정했습니다. 저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무섭고 현실적인 걱정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미래는 너무 멀어서 빈약한 상상력으로 하늘을 나는 자동차, 바닷속에 지어진 아파트, 거리를 청소하는 로봇 같은 것을 그렸습니다. 미래는 멀었지만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미래에 대해서 불안하고 불행한 모습, 무기력하게 파괴되는 어두운 모습을 먼저 떠올리는 것 같더라고요. 미래가 불안한 아이들을 먼 농경 사회로 데려가 보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과거의 인류는 우리를 상상했을까요? 그들의 미래가 지금의 우리라면, 우리는 그 기대에 응답하고 있는 걸까요? 이런 질문 앞에서 오래된 과거로 가고 싶었습니다. 지금의 아이들은 매일 밥을 먹지만 쌀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르잖아요. 이삭과 모와 벼와 그루터기가 한 몸이라는 것도요. 아이들을 데리고 논밭으로 가서 땀 흘리는 사람들의 손길을 통해 잊힌 생존의 기술, 살아있는 리듬, 함께 사는 감각을 같이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은 모를 심고, 잡초를 뽑고, 계절을 견디며 스스로를 길러냅니다. 농사라는 가장 오래된 기술로 문명을 다시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 답게 만드는지. 기술이 아닌 삶의 방식으로요. 설령 그 질문이 해결되지 않는다 해도요.    

 

이야기 속 삶과 죽음은 끊임없이 함께 등장합니다. 주경의 죽음, 구제역으로 인한 동물의 죽음 등 여러 죽음 속에서 아이들의 생이 이어지는 부분에서 삶과 죽음이 마치 동전의 양면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 ‘죽은 사람의 흰 뼈를 태운 재’ 같이 환한 어떤 사실, ‘양수’를 연상시키는 비린내 등 삶과 죽음을 비유하신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작가님은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작품을 쓰시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특별히 더 고찰하거나, 생각이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저도 아직 다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죽어보지 않아서요.(웃음) 삶과 죽음의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직선의 과정이거나 시작과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너른 세상의 밭에 삶도 죽음도 흩뿌려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농사는 매일 죽고 매일 살아나는 일입니다. 그 안에 계절이 있고, 순환이 있고, 삽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이 동일하다고도 같은 크기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감자를 수확하면 크기나 모양이 제각각인 것처럼요.  감자를 잘라 다시 심으면 감자가 되는 것처럼, 우리는 그걸 죽음이라고 부르고 삶이라고 부르는 것뿐이지 않을까 하고 소설을 쓰면서 어렴풋이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계속 이어지는 일인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먹는 것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옵니다. 썩은 감자를 먹고 탈이 나고, 멸치만으로 허기를 달래던 아이들은 구순태를 만나 집밥을 먹고, 제철 채소를 맛봅니다. 그리고 세 주인공은 아이들처럼 끊임없이 치킨과 빵 같은 도시의 음식을 상상하고 열망하기도 하죠. 작가님은 작품 속 농경사회를 살고 있는 이 네 사람과 한 밥상에 앉는다면 어떤 음식을 어떻게 나눠 먹고 싶나요? 그 식사 자리에는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합니다.

농사를 지으면 참이라는 것을 먹습니다. 일하다 중간에 먹는 음식인데요. 다 같이 둘러앉아 일하다 말고 먹는, 국수일 때도 밥일 때도 있는데요. 반찬 가짓수가 별로 없어도 그게 기가 막히게 맛있습니다. 밥이 달아요 달아. 그건 일을 한 다음에 다 같이 먹는 음식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물론 약간의 음주도 곁들이지요. 

 

그렇게 푸지게 먹고 오전 내 일한 논과 밭을 바라보면서 다시 일을 준비하는 참. 그 참을 같이 먹고 싶습니다. 소설이 책으로 나오고 페이지마다 고랑을 넘기며 초보 작가가 초보 농사꾼처럼 참을 기다리는 마음에 군침이 싹 돌고 다 먹고 나면 오늘 못 쓴 것은 내일 더 쓰자는 마음이 차는. 소설 속 선지, 문복, 나, 구순태와 함께 문장과 문장 사이 그 고랑에 앉아 참을 참! 맛있게 먹고 싶습니다. (만약 2쇄를 찍는다면요. 제발! 멕시코 치킨에 사라다를 계속 리필하면서 맥주를 마시고 싶기도 합니다.^^)   

 

이 소설을 꼭 읽어 주었으면 하는 독자가 있다면 누구인가요?

이 소설을 처음 구상할 때 농촌에 대해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다루어지는 방식, 치유나 힐링, 서정과 목가의 낭만성에 대해 반감이 있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그렇게 평온하고 아름답기만 한 곳은 없다고요. 쓰는 동안에도 내내 시골이나 전경이나 인정 같은 것을 경계했습니다. 그런데 소설을 쓰는 동안 인물들이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더라고요. 종일 피를 뽑고 나서 우는 문복에게 구순태가 하는 말에서, 우리 아직 늦가을이라고 말하는 초로의 노인에게서, 갓 짜낸 들기름 냄새 같은 것에서 예상하지 못한 어떤 위로가 생겨났습니다. 

 

“이제 다 했냐? 할 만큼 해 봤냐? 이제 후회도 미련도 없냐?” 

 

어찌할 수 없음 앞에 있는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어주면 어떨까 했습니다. 끝내 해결되지 않는 일도 있고, 붙잡을 수 없는 마음은 늘상 있는 일이니까요. 그럴 때 누군가 무심하게 이런 말을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놔둬라, 너도 저것들도!”               

 

이 한 해를 지나보낸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에필로그가 짧게 등장합니다.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아이들의 뒷이야기를 더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선지는 기도원을 다시 일으켰을까요? 나는 영농 후계자가 됐을까요? 문복은 어떤 오지에서도 돌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됐을까요? 저도 가끔 생각해 봅니다. 소설 속에서 보호종료 아동이 된 내가 기도원을 나가기 전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결혼을 하면 좋겠고, 나무를 만지는 일을 하면 좋을 것 같고, 아주 작은 아이의 의자 하나 정도는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그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에 대해 문복은 솜사탕 같은 말이네, 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여전히 솜사탕 같은 말일까요? 그런 꿈조차 녹아 사라지고 없어지는 현실이 조금은 나아졌으면 하고 바랍니다. 누구에게나 평범과 일상이 가장 무서운 말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후덕하게 나이가 들어 일 년에 한 번쯤 장마철 논물처럼 불어난 가족들을 데리고 한 자리에 모였으면 합니다. 죽음의 빚 같은 것 없이 계곡 옆 닭백숙집에서 실한 닭다리를 서로에게 내밀었으면 합니다. 거창한 구원까지는 아니더라도 함께할 밥상 하나쯤은 가진 사람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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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농경 사회

<이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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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