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면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가게 된다. 계절이 바뀌는 속도를 몸으로 확인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경상도는 다른 지역보다 봄이 조금 더 일찍 시작된다. 따뜻한 기운이 빠르게 올라오고, 벚꽃을 지나 철쭉과 유채꽃, 그리고 다양한 지역 축제가 이어지면서 계절의 흐름이 길게 이어진다. 짧은 순간이 아니라, 여러 겹으로 쌓이는 봄이다.
이런 계절 속에서 최근에는 외출의 방식도 조금 달라지고 있다. 단순히 꽃을 보러 나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루의 동선 안에 전시나 공간 경험을 함께 넣는 방식이다. 대구는 그런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도시 중 하나다. 대구의 온기를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예술 공간과 마주하게 된다.
《추사의 그림수업》 2026. 4. 7. ~ 2026. 7. 5.
2025년 26만 5천 명의 관람객이 방문한 대구간송미술관은 2026년 간송 전형필 탄신 120주년을 맞는다. 이를 계기로 대구간송미술관은 소장품 중심의 전시를 넘어, 한국 고미술의 흐름을 보다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방향으로 프로그램을 확장하고 있다.
©간송미술관
현재 진행 중인 《추사의 그림수업》은 그 출발점에 놓인 전시다. 조선 말기의 대학자이자 예술가였던 추사 김정희의 회화를 중심으로, 문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세한도〉를 비롯한 대표작과 함께, 제자들의 작품까지 이어지며 하나의 흐름을 만든다. 한 개인의 예술 세계를 넘어서, 조선 회화가 근대로 넘어가는 과정까지 짚어보는 구성이다. 이후에는 9월에는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을 조망하는 대규모 특별전이 예정되어 있고, 하반기에는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를 위한 단독 전시 공간도 공개된다. 특정 작품과 작가를 중심으로 한 전시들이 이어지면서, 미술관의 시간 축은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세한도(국보)는 5.10.(일)까지 전시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이와 함께 교육, 연구, 수리·복원 기능도 강화되고 있다. 특히 지류 문화유산 복원 분야에서 지역 거점 역할을 확대하며, 미술관의 기능을 전시 공간에 한정하지 않고 연구 기반까지 넓혀가는 모습이다. ‘미술관 옆 동물원’ 투어 등 대구 주요 관광지를 연계한 코스로 구성된 지역 기관과의 협력과 시민 참여 프로그램 역시 이어지면서, 미술관은 점차 지역 문화 인프라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길 건너에 위치한 대구미술관과의 관계도 흥미롭다. 고미술과 현대미술이 물리적으로 맞닿아 있는 구조는 흔하지 않다. 서로 다른 시간대를 다루는 두 공간이 하나의 동선 안에 놓이면서, 관람 경험 역시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이처럼 대구간송미술관은 단순한 전시 공간을 넘어, 축적된 시간과 현재의 감각이 함께 작동하는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 전통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현재의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에 놓여 있다.
《서화무진 書畵無盡》 2026. 3. 17. ~ 2026. 6. 14.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대구미술관은 전통에서 이어진 흐름을 현재로 확장하는 공간이다. 서로 다른 시대를 다루지만, 관람의 동선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2026년 개관 15주년을 맞은 대구미술관은 ‘시대정신을 품은 미술관’을 내세우며, 전시와 연구, 교육 전반에서 방향성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특정 장르에 머무르기보다, 동시대 미술의 흐름과 지역 미술사의 축을 함께 짚어보려는 시도다.
©대구미술관
그 출발점에 놓인 전시가 《서화무진》이다. 한국 전통 회화의 정신이 오늘의 작업으로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조망하는 전시로, 여러 세대의 작가들이 참여해 하나의 흐름을 만든다. 시·서·화라는 오래된 언어는 현대의 감각 위에서 다시 구성되고, 그 과정에서 한국화는 과거의 형식을 반복하는 장르가 아니라 현재를 담아내는 매체로 확장된다. 전시는 전통을 계승하는 지점과 그것이 변주되는 과정을 함께 보여준다. 붓과 먹, 한지라는 익숙한 재료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표현 방식과 시선은 현재의 시간 위에서 다시 구성된다. 여러 세대의 작가들이 함께 참여한 이번 전시는 하나의 결론을 제시하기보다, 이어지는 흐름 자체를 드러내는 데 가까워 보인다. 전통과 현대를 나누기보다, 하나의 축 위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방식이다. 간송미술관에서 시작된 시간의 축이 이곳에서 현재로 이어지며, 관람의 밀도는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Le Fil Rouge , 2025 Fil Rouge tressé / Braided red thread Installation In situ, Christie’s Paris ©Stéphane Thidet
이 흐름은 연중 이어지는 전시로 확장된다. 10월에는 프랑스 작가 스테판 티테(Stéphane Thidet)의 작업을 통해 자연과 시간, 물질의 변화를 감각적으로 풀어내는 프로젝트가 예정되어 있다. 이어 11월에는 피카소, 모딜리아니, 미로 등 서양 근현대미술의 거장들을 중심으로 한 국제전이 열리며, ‘인간’이라는 주제를 다양한 시선으로 조망한다. 지역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시선을 외부로 확장하려는 흐름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이처럼 대구미술관의 전시는 하나의 결론을 제시하기보다, 서로 다른 시간과 감각이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간송미술관에서 시작된 전통의 축이 이곳에서 현재로 확장되면서, 관람의 경험 역시 자연스럽게 넓어진다.
2026 사유원 모과&정향 축제 2026. 04. 10. ~ 2026. 05. 24.
대구의 예술 공간이 전시를 중심으로 이어진다면, 사유원은 그 흐름을 한 번 더 바깥으로 확장하는 장소에 가깝다. 작품을 ‘보는’ 공간이라기보다, 머무르며 감각을 정리하는 쪽에 가깝다. 군위 팔공산 자락을 따라 들어가면 만나는 이 공간은 수목원과 미술관, 건축 공간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렵다. ‘사유’라는 이름처럼, 걷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경험이 된다. 오래된 나무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고, 그 사이로 건축이 조용히 개입한다. 자연이 중심이 되고, 건축은 그것을 해석하는 장치처럼 놓여 있다.
사유원-소요헌 ©사유원
건축가 알바로 시자는 피카소의 <임신한 여인>과 <게르니카>를 전시할 마드리드 오에스테 공원의 가상 프로젝트를 사유원에 새롭게 만들었다. 피카소의 작품 대신 시자의 조각들이 설치된 소요헌, 한국 전쟁의 격전지였던 이 곳은 생명과 죽음의 순환이 새겨진 공간이다.
이 공간의 출발점에는 ‘지켜낸 것’에 대한 이야기가 놓여 있다. 1989년에 대구의 향토 기업인 태창철강 유재성 회장이 일본으로 밀반출될 위기에 처한 모과나무 108그루를 지키려는 의지에서 시작되었다. 수령 300년 이상의 노거수(老巨樹)들의 보금자리를 위해 경북 군위 팔공산 자락에 마련된 이곳은 21만 평으로, 단순한 수목원을 넘어갈 길을 잃고 헤매는 현대인들이 찾아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설계된 공간이다. 간송미술관이 문화재를 지켜낸 이야기에서 출발했다면, 사유원 역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축적해온 공간이다.
최근 사유원이 주목받는 이유도 분명하다. 자연과 건축, 예술을 결합한 형태로 2025년 ‘한국관광의 별’에 선정되며 하나의 목적지로 자리 잡았다. 포르투갈의 유명 건축가 알바로 시자와 국내를 대표하는 건축가 승효상, 최욱을 주축으로 조경 전문가 정영선이 함께하여 완성된 공간은 특정한 장르로 설명되기보다, 경험 전체로 기억된다.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풍경 속에서, 관람객은 단순히 공간을 소비하기보다 머무르는 시간을 갖게 된다.
풍설기천년 ©사유원
사유원 안에서도 정원 ‘풍설기천년’은 인상적으로 남는 장면이다. 바람과 서리,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견뎌온 모과나무들이 이 공간의 중심을 이룬다. 한때 외부로 반출될 뻔했던 나무들을 다시 들여와 가꾼 이야기까지 더해지며, 이곳의 풍경은 단순한 정원을 넘어선다. 수백 년의 시간을 지나온 108그루의 나무 사이를 걷다 보면, 시선은 자연스럽게 팔공산 능선으로 이어진다. 인위적으로 정리된 공간이 아니라, 자연의 흐름을 따라 만들어진 장면에 가깝다. 이곳에서는 무언가를 보기보다, 잠시 머무르며 시간을 체감하게 된다.
이처럼 사유원은 대구의 예술 공간 중에서도 결이 다르다. 전시를 통해 축적된 시간의 흐름이 이곳에서는 개인의 감각으로 전환된다. 앞선 공간들이 ‘무엇을 볼 것인가’에 가까웠다면, 사유원은 ‘어떻게 머무를 것인가’에 더 가까운 질문을 던진다.
이처럼 대구의 봄은 특정한 장소 하나로 설명되기보다, 서로 다른 성격의 공간들이 이어지며 완성된다. 꽃을 중심으로 한 외출이 미술관과 공간 경험으로 확장되면서, 하루의 밀도는 조금씩 달라진다. 사진으로 남는 장면보다, 그 사이를 오가며 느꼈던 감각이 더 오래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에는 전시를 ‘목적지’로 삼기보다, 하루의 흐름 안에 자연스럽게 포함시키는 방식이 늘어나고 있다. 꽃을 보러 나갔다가 미술관에 들르고, 다시 걷는 일. 그 단순한 동선 변화만으로도 익숙한 계절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기억된다. 좋은 봄날은 꼭 유명한 장소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람들로 가득한 길을 조금 벗어나, 전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걷는 하루. 꽃을 보러 나섰다가, 결국은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시간. 어쩌면 지금의 봄에는 그런 여유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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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예 (큐레이터)
성신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문화예술경영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각종 문화예술기관에서 큐레이터 활동을 통해 문화예술을 다양한 방식으로 폭넓게 전파하고, 예술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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