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담과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을 인정해야 했을 무렵 나는 꽤 심각하게 슬펐던 것 같다. 내 안팎이 빈궁한 데 비해 그에게는 이래저래 복이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용모가 수려하고 두뇌가 명석했으며 잘하는 게 수도 없이 많았다. 밥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말도 잘하고 연기도 잘하고 글도 잘 썼다. 올라운더? 종합 예술인? 육각형 아이돌? 뭐 그런 거였다. 그런 안담이 농담에까지 능하다는 사실, 그러니까 웃기기까지 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안담과 친구가 되고 몇 년이 지난 지금 내가 그에 대해 잘 알게 된 것이라곤 그가 대단한 울보라는 것뿐이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자주, 가장 많이, 가장 슬피 운다. 울면서 다시 하고 울면서 새로 한다. 누가 뭘 지나치게 잘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부러워하기보다 가여워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건 그 사람이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일러주는 지표일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을 나는 안담이 구사하는 농담들로부터 천천히 배워나갔다. 그가 때로 지나치게 웃기면 이제 나는 그를 걱정한다. 그것은 그가 엄청나게 슬펐다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영빈이 그에게 지어주었다는 아름다운 이름 ‘담‘은 ‘멜 담(擔)’이라고 한다. 안담의 삶은 그에게 자꾸만 메어야 할 것들을 준다. 복도 많이 주고 레몬도 많이 준다. 그걸 다 메고 지기엔 안담은 생각보다 좀 작다. 그걸 다 메고 져야 해서 작아졌나 싶다. 우리는 바람이 많이 불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차고 흐린 날 성북천 부근에서 만나 안담의 신간 『농담과 번복』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담에 대해서도 복에 대해서도 나눌 말이 많았다. 그러는 동안 비가 멎고 구름이 조금씩 걷히더니 맑은 봄볕이 들기 시작했다.
반복과 번복
은빈 이 책의 첫 번째 번복이 어디서 나오는지 아세요? 12쪽에 나와요. “그것이 나의 첫 번째 공연이었다. … 실은 아니다. 그렇다고 쓴다면 멋있겠지만… ”
담 진짜 빨리 나온다.
은빈 저라면 그 앞말만 하고 끝내고 싶은 욕망에 졌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첫 번째 공연”인 편이 더 멋지고 더 정합적이니까. 근데 그다음으로 밀고 가서 멋있었어요. 체면을 조금 버리면서까지 사실을 바로잡았잖아요. 아무래도 번복은 좀 모양 빠지는 일인데. 한 입으로 두말한다는 점에서.
근데 번복한다는 건 이동이 허락된다는 얘기처럼 들리기도 해요. 성장했거나 나아지지까지는 않았더라도 누가 어디가 좀 달라졌는데, 그러고 난 다음에도 큰일 없었다는 거니까. 혹은 없으리라고 믿으면서 변화를 감행한다는 거니까. 그러니까 번복한다는 건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변했지만 큰일 안 났다. 죽지도 죽임당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번복이라는 건 용서와 유관한 일 같기도 하고.
담 안 그래도 어제 있었던 북토크에서 사회자였던 소윤과 반복과 번복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농담과 번복」이라는 표제작을 가장 마지막에 썼는데 그 글에서 농담과 번복을 이렇게 연결 지어요. 농담이 언제 필요하냐? 우리가 번복을 할 때, 또는 번복하는 인간으로서 필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훌륭한 인간은 반복한다. 못 미덥고 못마땅한 인간은 번복한다”(198쪽)라는 문장이 나오게 됐어요. 근데 소윤이 딴지를 걸면서 이렇게 뒤집더라고요. “훌륭한 코미디언은 번복한다. 못 미덥고 못마땅한 코미디언은 반복한다.” 이 버전도 되게 맞는 말 같지 않아요?
은빈이 짚어준 문장을 처음 쓸 때, 그러니까 4년 전에, 내가 이 앞 문장의 기세 때문에 “그것이 나의 첫 번째 공연이었다”라고 썼어요. 그런데 솔직히 좀 떨면서 그렇게 했어. 왜냐하면 진짜가 아니라서. 거기서 끝내도 티가 나지 않았겠지만 잠깐 다시 생각해 보니까 근데 이거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려다가 되돌아가서 아니었던 것 같다고 썼어요.
그러니까 어떤 삑사리를 의도했거나 번복에 잘 맞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쓴 게 아니에요. 그때까지만 해도 번복이라는 단어는 전혀 제 안에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나중에 추천사에서도 그렇고 처음 조소정 편집자님께서 이 책의 제목을 제안해 주셨을 때도 그렇고, 이 책이 ‘번복’이라는 주제어로 표현될 수 있다는 걸 누가 찾아줬을 때의 쾌감이 있었어요. 적어도 내가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느낌이었던 것 같아. 일부러 의도했던 게 아니니까.
은빈 번복한다는 건 아무래도 거짓말쟁이라는 말 같잖아요? 믿음이 좀 패이는 일이고, 진실성이 의심되는 사람이 일삼는 행동 같고.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이 첫 번째 번복도 그렇고 이 책을 쭉 읽으면서 든 생각은, 번복한다는 게 조금이라도 더 진실되려는 사람의 일 같기도 하다…. 뭐가 진짜이고 아니고가 중요한 사람이 곰곰 생각해 보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돼요. ‘다시 생각해 보니까 이게 진짜인 것 같아’ 하고 굳이 돌아가서 고치는 거죠. 사실 안 고쳐도 큰일 없는데.
이 책의 영제가 Joking and Taking It Back이잖아요.
담 맞아요. 사직동 솔트(SALT)의 운영자인 마야가 지어준 거예요. 번복을 뭐라고 옮겨야 할지 모르겠어서 여기저기 물어봤어요.
은빈 번복을 ‘taking it back’으로 옮기셨는데, 그 번역에서 뭘 줬다가 도로 뺏는 사람의 궁색한 몸짓이 떠올라요. 왜 도로 가져올까? 소중한 거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어요. 줬다가 다시 갖고 올 정도로 되게 지키고 싶었던 거라서. 어떻게 생각하면 뭔가 소중한 것을 지키고 반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어떤 것을 불가피하게 수정하고 번복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번복하는 사람이란 무엇은 수정함으로써 다른 무엇은 계속하고 싶은 사람, 그러니까 어떤 것을 지켜내고 지속하기 위해서 뭐는 반복하고 뭐는 반복하지 않을지를 결정하는 사람인 거죠.
담은 어때요? 번복이 뭘 지키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해본다면, 민망해지고 면이 좀 깎이면서라도 지키고 싶은 게 있어요?
담 여기에서 ‘taking it back’이라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말이니까. 물을 쏟고서 그것을 다시 담아보려고 했을 때 깔끔하게 되돌려지는 게 아니고 언제나 얼룩이 남을 수밖에 없단 말이죠. 지킬 수 있는 것에 해당한다기엔 일단 줬다가 뺏는 순간에 저 사람한테 묻거나 젖은 부분이 생기는,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달성될 수 없는 무엇인 거니까요. 그러니까 저한테 ‘taking it back’이 지키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해도 그건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그 점이 우습고 재미가 있다.
그럼에도 지키고 싶은 게 있다면… 되게 중요한 질문인데, 왜냐하면 지키고 싶은 게 생겨서, 지키고 싶은 것의 크기가 커지고 가짓수가 많아져서 생기는 변화가 굉장히 큰 고민이거든요. 잃을 게 없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진보가 있고 잃을 게 있는 사람이 가질 수밖에 없는 보수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지키고 싶은 게 있어서 더 원칙에 엄격해질 수 있다, 더 꼿꼿하고 올바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저는 지키고 싶은 게 생겼더니 더 보수적으로 되고 있어요.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 나의 어떤 약한 부분, 만약에 누가 그걸 쥐고 나한테 협박한다면 난 들어줄 수밖에 없다 싶은 그런 부분이 생길 때 사람이 보수적으로 되는 것 같아요.
이거 완전 개에게서 시작된 이야기예요. 무늬한테서요. 내가 무늬를 지키기 위해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할 때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종류의 일들이 가능해지거나 불가능해졌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제 당장 누군가가 나를 불러내서, ‘우리 조금 더 창의적이고 불안하면서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하루를 함께 보내자’라고 말한다면, 내가 전만큼 ‘그래 그러자’ 하고 대답할 수 없는 상황들이 생겨났어요.
지키고 싶은 것을 좀 더 추상적인 가치로 확대를 해본다면, 아무래도 연민이 아닐까요. 연민이 원래도 많은 편이었어서 그동안은 이 연민을 타인에게 모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다루려고 노력해 왔단 말이에요. 지나가는 사람 그냥 불쌍해하는 거 전혀 좋은 일이 아니잖아요. 누가 지나가다가 나 불쌍해해도 기분 나쁘고. 그래서 한동안은 “함부로 가여워하지 마세요, 그 삶도 그냥 삶입니다.” 하고 말해왔는데, 이제 한 바퀴 빙 돌아와서 이렇게 말하게 된 나를 발견하는 거예요. “근데… 좀 불쌍하지 않나?”
은빈 (웃음) 실은… 역시 불쌍해…!
담 아빠의 장례식을 기점으로 제가 경계하려고 굉장히 노력했던 바로 그 전통적인 의미의 연민이, 말하자면 제가 불쌍해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졌어요. 예전에는 이입할 수 있고 걱정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겠죠. 나랑 닮았다거나 젠더의 표현 양식이 비슷하다거나 누가 멘 가방에 무슨 배지가 달렸다거나. 그런데 이제는 그냥 버스에 타면 거기 한데 흔들리고 있는 갓난아기부터 등이 굽은 노인까지 그 모두가 한꺼번에 제게 들어오는 거예요. 그 사람들의 삶을 알 것 같아서가 아니라 하나도 짐작이 안 될 정도로 다양하고 다른데, 삶의 무게는 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고 엄정하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 때문에 도저히 정신이 안 차려지는 거예요.
정말 별로인 것 같은데… 그냥 너무 자동적으로 일어나, 가여워하는 마음이. 세계는 너무 잔인하고 잔혹하고 우리에게 일어날 상실의 빈도와 강도는 타인이 조정해 줄 수가 없는 부분인데, 사람들이 다 그걸 겪으면서 어떻게 살아 있지? 그러면서부터는 연민을 나쁜 것으로 치부하거나 비판적으로만 바라보아서는 뭘 못 하겠다고, 연민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좋은 것을 찾아보아야겠다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게 누군가에게는 모욕적일까 봐 걱정이 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전에는 누가 나한테 그러면 싫을 것 같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근데 지금은 누가 날 가여워해 주면 고마울지도… 왜냐하면… 가여우니까.
이런 식으로 전과 다른 어떤 입장의 변화, 세계관의 변화 같은 것들을 느껴요. 근데 그런 변화를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데, 역시 양쪽 모두를 놓고 싶지 않은 욕심이 있다는 게 문제인 거 같아. 아주 오래된 욕심이에요.
은빈 어떨 때는 내가 이 양쪽의 욕심을 다 놓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싶을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떨 때는 역시 과욕을 부렸군, 둘 다 쥐고 놓지 않았던 바람에 이 주둥이가 좁은 병에서 도무지 주먹을 뺄 수가 없었던 거야 싶을 때도 있죠. 그걸 분간할 수 있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을까? 책에 나오는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문처럼. “우리에게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용기를 주시고, 바꿀 수 없는 것을 참을 인내심을 주시고,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할 지혜를 주소서.”(71쪽)
담 맞아요.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별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낙담과 회복
은빈 이 책의 초고가 쌓이는 것을 긴 시간에 걸쳐 지켜보아 왔다 보니 원고 간에 느껴지는 서로 다른 시간성이 있었어요. 어떤 사건이 예정되어 있음을 전혀 알지 못한 때에 쓰인 글이 있고, 진행 중일 때에 쓰인 글이 있고, 이후에 쓰인 글이 있고, 그것들이 시간순이 아니라 다른 순서대로 섞여 있고. 엮인 순서를 따라가면서 제게도 여러 감정이 지나갔던 것 같아요.
말하자면 이 책은 담이 삶으로부터 받은 레몬으로 만든 레모네이드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근데 그런 생각도 들었어. 레몬 받는다고 다 레모네이드 만드는 거 아니잖아요.
담 대부분의 레몬은 냉장고에서 그냥 상하죠.
은빈 설사 레모네이드를 계속 만들어온 사람이라 해도요. 냅다 갖다 엎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그냥 애초에 레몬을 안 주면 안 될까? 레모네이드를 꼭 만들어야 할까? 담이 장례식 때 다시는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던 게 기억나요. 은연중에 두려웠던 것 같아. 진짜 안 쓸까 봐. 그렇지만 써냈고, 무척 훌륭하게 써냈다고 생각해요.
레모네이드를 만든다는 거랑 농담하는 거랑 사실 다르지 않잖아요. 계향으로부터의 배움을 인용하자면, “농담을 한다는 건 이런 뜻이다. 슬픈 일이 있었고, 그렇지만 살아있다는 것.”(14쪽) 레몬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든다는 것도 어쨌든 살아야 할 삶이 남아 있고, 그걸 가지고 뭘 할 수 있는 힘도 아직 내게 남아 있다는 거겠죠. 근데 그렇다면 레몬즙 짤 만큼의 팔 힘은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아무리 낙담한다 해도 농담을 다시 길어 올릴 만큼의 아주 미약한 힘만큼은. 근데 그것마저 없을 것 같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담은 쓸 힘이 남아 있었어요? 만일 없었다고 느낀다면, 그 힘을 어떻게 낸 것 같아요?
담 아빠가 심각한 수위로 아프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편집자님께서는 아이고, 원고 관련해서는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해야겠다, 하고 속으로 생각하셨대요. 그런데 제가 먼저 연락드려서 저 할 수 있다고 했어요. 쓰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일단 너무 웃기고 병원이란 참 이상한 공간이니까. 근데 환자의 가족도 아니게 되고 나서는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할 수 있을까… 언젠가 써야 할 건데, 하긴 할 건데.
그렇지만 곧 되게 빠르게 생각을 고쳤어요. 지금이 아니면 못 쓰는 것들이 있고 그걸 이 책에다 반드시 녹이고 싶다고요. 지금 「모래처럼 파도처럼 눈송이처럼」 같은 글을 보면, 더 시간이 지났으면 못 썼을 것 같아. ‘기록해야 돼, 지금 열차에서의 기억이 남아 있을 때 해야 돼’ 싶었어요. 내가 어떤 역에서 내리려고 했는지, 그날 기차를 잘못 탔었다는 사실 같은 거, 그 모든 것들을 곧 잊어버릴 거라는 게 갑자기 너무 무서웠어요. 진짜 조금이라도 잃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되게 빠르게 태세 전환을 했어요.
저는 쓰는 게 한 번도 안 힘든 적이 없거든요. 쓰면서 즐거울 수 있다는 것도 되게 최근에 느껴봤어. 글쓰기는 진짜 토 나올 정도로 힘든 일이라고밖에 생각이 안 되는데, 그럼 언제 썼냐면 아이러니하게도 그것보다 더 힘든 일이 있을 때였어요. 완전 바닥을 쳤다고 생각한 다음에 그 밑으로까지 들어갔을 때는 반드시 썼어요. 글쓰기와의 관계가 그동안 쭉 어느 정도 변화해 왔지만 그 사실만큼은 제 안에서 단 한 번도 빗나가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써야 할 것은 반드시 쓰게 되어있다고 믿어왔는데, 이번에는 그 믿음이 흔들리길래, 그만큼 힘이 들길래… 썼던 것 같아요.
뭐랄까, 힘의 작용이 반대인 것 같아. 0이 되고 마이너스가 되어야지만 나오는 힘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
은빈 뭐가 있어서 쓰는 게 아니고 없어서 쓸 수 있게 되는 걸까?
담 모두가 보편적으로 그러냐 하면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그런 종류의 일들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 너무 힘들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어떤 임계치를 넘어가면 마치 강을 건너간 사람처럼 갑자기 할 수 있게 되는 무엇이.
그리고 사실 저는 모두가 결국 각자의 레모네이드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레모네이드를 뭐로 규정할까의 문제일 뿐이지, 다들 뭔가를 만들게 되어 있다. 글을 쓰는 것이든 사진을 찍는 것이든 누구한테 끝내 참아왔던 고백을 하는 것이든. 그리고 그건 누군가의 죽음이 주는 선물 같아요. 갑자기 엄청 용감해지는 거.
은빈 담은 어떤 방식으로 용감해졌어요?
담 그러니까 이게… 무적의 대화를 가능케 하는데요. 살면서 마주하는 사사로운 불안과 걱정에 잠식되어 갈 때가 있잖아요. 해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거절도 못하고 사람들한테 미안하기만 하고 그런 지지부진한 순간들. 근데 최근에는 ‘아빠가 죽었잖아’하면서 모든 일을 불도저처럼 포기하고 거절하고 반대로 추진하고 그랬어요. 청탁은 거절하고 유튜브는 갑자기 시작하고 그런 식으로. 내 안에서 우선순위가 너무 명확해져서. 사실 남한테도 여러 번 써먹었어요. 아무도 나한테 뭐라고 못하는 핑계처럼 사용했어. “왜 이게 되지 않았습니까? 왜 이걸 못 하겠습니까?” 하는 질문을 마주하는 되게 많은 순간에 아주 최근까지도 “아빠가 죽어서 하기 싫습니다.” 이런 식이었어요.(웃음) 이게 어디까지 그 기간을 사회적으로 허용해 주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식으로 이기적으로 굴고는 후환을 별로 안 두려워했어요. 마치 죽음이라는 걸 처음 발견하고 그 개념을 이해한 어린아이처럼. 그리고 그건 선물이기도 한 것 같아요. 간 사람이 주는.
은빈 「모래처럼 파도처럼 눈송이처럼」에 나오는 위반의 장면도 생각나요. 무늬를 데리고 빈소까지, 영빈의 영정사진 앞까지 밀고 들어가는 장면. 이 장면이 예소연 작가님의 「그 개와 혁명」과 가지는 접점에 대해 언젠가 얘기도 나눴었죠. 작지만 명백하고 해방적인 위반이, 내가 누구의 딸인지를 보여주는 그런 위반이 두 글에서 동일하게 등장한다는 점에서 좋았어요. 어겨봐서, 훔쳐봐서, 어깃장 놓아 봐서 참 좋았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저도 영빈이라면 담이 그렇게 해서 참 좋았겠다고 생각했어요.
담은 뭘 훔쳐본 적이 있어요? 제 말은, ‘진짜로’ 훔쳐본 거요. 근데 이렇게 말하면서도 잘 모르겠어. ‘진짜’가 뭔지 말이죠.
담 근데 그건 자기가 아는 것 같지 않아요?
은빈 맞아요.
담 진짜로 훔친 건지 아닌지. 심지어 돈을 냈다고 해도요.
은빈 맞아요.
(담과 은빈, 한동안 각자의 ‘진짜’ 도둑질에 관해 대화한다.)

보복과 할복
은빈 저는 농담을 이야기하는 이 책이 비웃음을 중요하게 다루어줘서 좋았어요. 웃음은 분명히 지저분한 것이라고(135쪽), 어떤 웃음엔 숨길 수 없이 비열하거나 야비한 데가 있다고요. 한편으로 우리가 웃거나 웃길 때 정말로 좀 때리거나 패고 싶어 하잖아요. 이 책에서도 웃으면서 뭘 자꾸 때리더라고요. “플라스틱타일을 손으로 내리치며 웃”고(189쪽),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배를 내리치며 웃”고(200쪽).
담 맞아요. 제가 진짜 웃을 때 옆 사람을 많이 때리는 편이어서 좀 미안할 때가 있는데.
은빈 그러니까 웃기는 마음엔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 분명 있어요. 그게 가벼운 딱밤 정도일 때도 있지만 솔직히 ‘니 죽이는 생각’일 때도 있잖아. 그런 복수심이 들잖아. 그리고 저는 복수심이 농담에서나 글쓰기에서나 되게 좋은 동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들어. 왜 하필 그걸로 복수하려는 걸까? 저 사람한테는 하나도 복수가 아닐지도 모르는데. 왜, 옷을 잘 입는 게 플러팅의 최대치인 사람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점점 옷만 잘 입게 될 뿐인 사람처럼.
담 내가 너 때문에 이렇게 멋있어졌어.
은빈 그러면 복수가 성립하지 않잖아요. 내가 농담으로 그 사람 죽이고 싶었는데 사실 그 사람 털끝 하나 건드리지도 못했고 내가 점점 더 웃겨지기만 한다면요. 그런데도 왜 굳이 농담의 소재로 삼고 싶고 글로 써버리고 싶을까. 말이나 글은 어쩌면 아무 힘이 없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는 식으로 아주 가뿐히 이렇게 그냥 접어버릴 수 있는 것인데,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죽고 사는 문제일까. 보복하고 싶은 마음, 근데 반드시 농담이나 글을 통해서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에 대해서 얘기해 보고 싶었어요.
담 근데 거기엔 실질적인 이유가 명확히 있는 게 아닐까요. 실제로 복수하면 안 되니까. 누구한테 말 안 하면 못 배기겠는 정도로 활활 타오르는 복수심은 실제로 위험하잖아요. 세상에 대한 복수를 하거나, 그 복수를 완결시키기 위해 자기를 죽일 테니까.
은빈 보복하거나 할복하거나.
담 그게 아무리 타인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라 하더라도 내 안에 있는 어떤 악성을 다루는 방법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잖아. 자기나 남을 진짜로 죽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다른 게 진정한 복수라고 상징계를 십분 활용해 교육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얘들아, 예술하지 않을래? 그럼 괜찮을걸? 예술은 되게 멋진 거고, 예술은 정말 끝장나게 멋있는 복수를 해.” 이런 식으로.
복수를 왜 조심해야 하냐면 그게 실제로 꽤 좋을 수도 있어서인 것 같거든요.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잖아요, 되게 오래전 사람들이 남긴. 그런데 이제 이분들한테도 고충이 있었겠죠?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서 “근데 확실히 칼이 더 강하지 않나요? 칼이 무조건 더 강한 것 같습니다.”라고 자꾸 말한다고 하면.
은빈 그게 참 맞는 말이긴 한데…
담 근데 그러면 어떻게 살아요. 누가 그렇게까지 미워서, 누구를 그렇게나 죽이고 싶고 나를 그렇게나 죽이고 싶어가지고 우리가 정말 살아남을 수 있을지 묻는다면 그렇지 않은 것 같은 거죠. 그러면 그 상태를 전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승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뭘까. 아무래도 쓰는 일인 것 같다는 결론을 다들 내리게 된 거 아닐까요.
은빈 그래서 되게 해로운 글을 쓰기도 십상인 것 같지 않아요? 내 사정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도 사정이 있다는 사실엔 적극적으로 눈을 감아버리기로 하는 결정이 쓰는 과정에서 종종 일어나니까요. 잘 쓰면 쓸수록 그렇게 했다는 사실마저 감쪽같이 감출 수 있어서 더 두려운 것 같아. 나만 아는 거잖아요? 봉합했는지 아닌지. 내가 나랑만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고 합의가 되면 그런 글이 세상에 나오는 거잖아요.
그런 걸 생각하면, 어떨 때 복수를 하라고 해줘야 하는지, 그리고 어떨 때 이제 복수 그만하라고 해줘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 정도면 충분히 했다고, 이제부터는 더 이상 좋은 복수가 아니게 되어버렸다고 언제 스스로에게 또 서로에게 말해주어야 할까.
담 그런 고민을 「조커 만드는 레시피」라는 글에서 다루게 됐어요. “가르치고 싶은 마음과 복수심은 근본적으로는 결이 같다. 둘 다 다른 진실을 알게 하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르치려는 자가 타인에 관한 진실까지 공평하게 다룬다면, 복수하는 자는 오직 자신에 관한 진실만을 알리려 한다.”(116쪽)
그러니까 쓰기로 복수를 할 때에도 어느 순간에는, 한 사람에게 나에 대한 진실을 알리려 했던 맹목적인 복수심을 여러 사람에게로 넓히는 과정이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그의 안에서 복수보다 쓰기에 대한 욕심이 더 커지면서부터는, 이걸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으로 바꾸어 닦아내는 공정을 거친다고요. 보복을 결심하게 했던 바로 그 미움을 다른 형태로 정제하게 되는 거죠.
분명 “우리 써서 복수하자, 쓰기로 세상에 복수하는 거야”하고 복수를 권유했지만, 사실은 그 약속 뒤에 올 순간을 기다리는 것인지도 몰라요. 사실은 쓰기로 돌보자든가 쓰기로 사랑하자든가 하고 제안하고 싶었다고, 그러면 너한테 좋을 것 같았다고 나중에 그에게 말해줄 수 있는 순간을.
반대로 그렇게 해서 너무 잘 쓴 글, 정말 깨끗하고 이해가 잘 되게 쓰인 글을 보면 억장이 무너지기도 해요. 저 사람, 느끼는 그대로 말했다면 이 결과에 도달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리고 제가 쓰는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누가 나한테 더 이상 미워하지 말라고 말하면 어떤 사랑을 좀 포기하라고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거든요. 왜냐하면 내가 복수하려는 대상과 나 사이에 기묘한 유대감이 생기잖아요. 나한테 삶의 목적을 준 거잖아, 저 사람이.
은빈 그 사람만이 이 맥락을 다 알고 있으니까.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저 사람밖에 없다는 게.
담 맞아요. 그런 기묘한 종류의 사랑이 복수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 같은데, 미워하지 말라고, 보복하지 말라고 하는 건 바로 그 사랑을 포기하라고 말하는 일이기도 해서 좀 어렵지 않은가. 그래서 이 모든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게 아닌가.
어쨌거나 그걸 쓰는 과정에서 자기한테도 가장 고통스러울 객관화의 과정이 있을 테고 그것이 그에게 긍정적인 것들도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지 않나 싶어요. ‘내 말이 어떻게 들리는가’로 초점을 옮기게 되면서, 내가 느낀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체하고 조립하는 과정을 거침에 따라 반드시 일어나게 되는 변화들이 있으니까. 그러지 않고 이 잘 벼려진 언어를 내내 나와 나의 편을 위해서만 운용했을 때 치르게 되는 대가도 있다고 느껴요. 비록 그게 내 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 할지라도, 내가 가진 칼을 나만을 위해서 휘둘렀을 때 치르게 되는 무엇이 있다. 그 순간 죽어버리고 마는 내 안의 무언가가 있다.
은빈 그런 점에서는 농담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까요? 거리를 두어보게 한다는 점에서.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해보고, 그러면서 다르게 느껴보게도 되고.
담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거리 감각이 좀 고장 난 사람들, 그게 자기 맘대로 안 되는 사람들을 볼 때 확 흥미를 느끼기도 해요. 너무 잘 느끼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피부가 바다만큼 넓은 것 같은 사람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아파할 수가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한편 그 옆에서 왜 나는 저 정도로 못 느끼는지 슬퍼하고 자괴감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죠. 그러니까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 그런 불일치를 의도하는 게 아니고, 그게 내 자랑인 게 아니고, 나의 수치인 거지. 그런 자신의 무감함과 비정함을 충분히 수치스러워하고 창피해해 본 사람들, 뱃속의 장기가 잘못 들어앉은 것 같은, 줌이 고장 난 카메라 같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구사하는 농담의 불일치감에 이끌려요.
은빈 딴청을 부리는 사람들만이 내주는 틈새가 있는 것 같아. 깊이 몰두하는 사람들을 깨줄 불일치가.
담 꼭 애같이 구는 얼굴, 하나도 안 느끼는 척하는 얼굴에서 슬픔을 느낄 때가 있어요. 좋다는 말이에요.

안담과 행복
은빈 저는 제가 복이 많은 것 같아요. 하지만 그건 행복한 거랑은 다른 거겠죠. 복이 많아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요새는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요. 저도 모르는 저의 행복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궁금해. 밖에서 볼 때 담에게도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복이 있는 것 같거든요. 그렇지만 그게 행복하다는 의미는 아닐 수 있죠. 어때요?
담 행복하다는 건 어느 정도 결정인 것 같아.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의외로… 의외라기보단 제가 주장하기로, 엄청 행복해요. 저는 상당히 낙관적인 사람이고 인간이 서로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걸 별로 의심하지 않는 편이에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음식을 그렇게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아주 감각적이고 말초적인 것까지 다 포함해서 인간이 인간이라서 일어나는 일들을 천박하게만 여기거나 초월하려고만 하는 사람이라면 밥을 그렇게 지을 수는 없는 게 아닐까.
그런데 내가 그늘을 몰라서, 그늘이 없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말하기 위해 필요한 화술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믿게 할 수 있을까 궁금했어요. 저기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 행복이 있다는 걸, 내게는 사랑과 행복에 대한 깊은 믿음이 있다는 걸 곧이곧대로 들리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행복을 느낄 때 왜 늘 죄스러운 기분을 함께 가지는지도 생각하게 돼. 너무너무 행복한 어떤 순간에, ‘이런 게 모두에게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곧장 들거든요. 시대의 문제일 수도 있고 기질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어쩌면 행복이 너무 좋은 거라는 걸, 그리고 너무 연약한 거라는 걸 아니까 더 많이 슬퍼하는 것 같기도 하고. 왜 여기 이 순간에는 가능한 것이 다른 순간에는 가능하지 않은지 인간으로서는 어쨌든 잘 알 수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은빈 꽤 좋지 않았다고, 불행했다고 말해도 좋을 법한 시기도 담의 삶에 있었다고 기억돼요.
담 맞아요. 그때는 저 그랬죠.
은빈 그런데 되게 오랜 시간에 걸쳐서 담의 삶이 볕이 많이 드는 곳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는 것을 지켜봐 온 것 같아요. 그게 좋았고요. 그냥 단순한 게 궁금했어요. 행복해요?
담 행복해요. 행복하고. 아무래도 무늬랑 맞닿아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러니까 내가 사람이랑 뭐가 안 되지. 왜냐하면 사람은 이 정도까지 받을 수가 없으니까. 그릇이 작으니까.
그러니까 원 없이 사랑하는 것이 저의 천성이고 그게 절 행복하게 하는 길인데, 사람하고는 그걸 하기가 참 어려운 측면이 있어요. 나만큼 만지고 만져지는 걸 좋아하는 상대를 아주 즐겁고 원초적인 레벨로 만난 게 처음이에요. 무늬는 언제나 알몸이고,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 나 말고 그런 존재를 처음 만난 거 같은 기분이 들어. 되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내가 무늬의 몸을 알고, 무늬가 내 몸을 알고, 이 사이에서 일어나는 교환 속에서 엄청나게 인정받는 기분이 들어요. 특히 또 언어를 다루어야 하다 보니까 발생하는 여러 가지 오해들, 인간적인 소통으로부터 너무 지쳐있을 때 개를 만난 거죠.
지금 무슨 이혼하고 개를 키우기 시작한 사람처럼 이야기하고 있는데… 모두에게 개 입양을 추천하면 절대 안 되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오랫동안 원해왔던 것을 삶에 들이게 되었고, 그 이후로 정말 많은 게 바뀌었어요. 단순하게 말해서, 예비된 어떤 상실에도 불구하고, 그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에 가장 주요했던 것은 개가 아닐까? 개를 사랑하기 때문이, 개와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아주 행복합니다. 그런 것을 가질 수 있어서.
은빈 채널예스에 연재된 김혜리 기자님의 ‘개와 인간의 시간’ 칼럼에도 그런 문장이 있었지요. 원고 앞에 있는 나를 아로하가 온몸으로 이렇게 재촉한다고요. “어째서 당신은 당장 아름다움과 하나가 될 수 있는데 고작 그것에 대해 부정확하게 끄적거리고 있는 거지?”
기뻐요, 담이 행복해서. 아름다움과 하나 되는 나날들을 아낌없이 축하해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하은빈
글을 쓰고 공연을 한다. 『우는 나와 우는 우는』을 썼고 『눈부시게 불완전한』을 번역했다.
표기식
사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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