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봄날의 시를 좋아하세요..... | 예스24
이상하지? 봄의 장막을 걷고 나면 흐느끼는 봄의 얼굴이, 야윈 어깨로 세상의 봄을 다 짊어진 몇 편의 시가 있다는 것이.
글: 서윤후
2026.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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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과 사람과 꽃과 나무를 한 다발로 엮어주는 봄의 풍경을 사랑한다. 기억에 어떤 향기를 남기는 웃음소리도…… 그래서 내심 봄이 두렵기도 했다. 이 화창함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나의 그림자를 밟으며 또 얼마나 이 붐비는 거리를 해찰해야 할지 막막하기도 했으니까. 봄의 찰나, 순간, 전순 그 모든 짧은 깜빡임에 이 아름다운 풍경을 욱여넣으려고 혼자서 체하고 혼자서 굶주렸다. 빈속에서 울렁거리는 몇 편의 시가 남아 다 해가던 봄에 대한 의지를 쥐여준다. 그것은 꽃다발이 아니라 꽃다발의 시간이 끝나고 쥐는 빈 나뭇가지처럼, 정처 없이 길기만 한 나의 삶과 닮아 있지만 이 자리에 향기를 떠올릴 수 있고, 잎사귀의 무궁함을 헤아릴 수 있고, 전생을 외박하는 꽃떨기의 여행을 지켜볼 수 있다.

 

봄이 시작이었던 건, 이 비어 있음을 깨닫는 순간에 있었다.

 

내가 환대하는 봄의 시는 대부분 그런 것이다. 화려하고 무성하게 지나가는 꽃의 소용돌이 너머로 고요히 자기만의 열매로 질주하고 있던 텅 빈 들판들. 몸살을 앓는 이 들판 위로 떨어져 누우면 그제야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나기도 하는 자비로운 언덕들. 이상하지? 봄의 장막을 걷고 나면 흐느끼는 봄의 얼굴이, 야윈 어깨로 세상의 봄을 다 짊어진 몇 편의 시가 있다는 것이.

 

『봄과 아수라』

미야자와 겐지 저/정수윤 역 | 읻다

 

온 힘을 다해 휘파람을 불어라

휘파람을 불어라 뒤섞이는 햇살

의지할 곳 없는 빛의 파동은 떨리고

투명한 것들이 나란히 내 뒤를 쫓는다

스치는 빛 다시 노래하듯 작은 가슴을 펴고

또 아스라이 반짝이며 웃는다

모두 맨발의 아이들이다

(중략)

삼림의 자유로운 관리인처럼

5월의 금빛 광선 아래서

휘파람 불며 발맞춰 걸어볼까

태양계의 즐거운 봄이다

다들 달리고 노래하고

껑충 뛰어오르자

 

(「고이와이 농장」의 부분, 『봄과 아수라』 85-86쪽)

 

농업을 예술로 일삼았던 미야자와 겐지가 생전 사랑한 고이와이 농장은 일본 이와테현 시즈쿠이시에 있다. 그가 자연과 교감하며 작업했던 ‘심상 스케치’의 주 무대이기도 했는데, 이 시는 파트 1부터 파트 9까지 이어지는 장시 속에서 농장 풍경을 시적으로 승화한다. 긴 분량만큼 마치 사계가 다 담긴 것처럼 광활하기도 한데, 농업의 풍만한 시간에 더 초점을 맞춰서 그런지 봄에 대한 묘사가 매우 깊다. 그러나 어딘가 희망적이면서도 “모두 맨발의 아이들”로 태어난 우리들이 휘파람을 불며 “태양계의 즐거운 봄”을 즐기는 면모가 농장 풍경과 더불어 원시적으로 그려지면서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가볼 수 없이 그의 시에서 거닐게 된 고이와이 농장은 우리 마음속 아직 수풀조차 헤쳐나가보지 못한 마음의 지도 같다. 언어도, 자연도 주인이 없어 자신의 고삐를 들고 달려나가는 이 황금빛 아수라장을 미야자와 겐지는 환상의 스케치북으로 쓴 것이나 다름없다.

 


『무증상 환자』

문혜진 저 | 난다

 

배식을 마치고

식사를 마치고

청소가 끝나고

마주앉은 그녀와 내가

마른 행주로

소독한 수저를 닦다가

어느새 축축해진 행주로

테이블을 한번 더 닦고

냅킨을 채우고

그러고도 할말이 떠오르지 않아

 

어디선가 짙은 라일락 향기가

코끝을

시선을

새하얀 행주에

흠칫

흩뿌렸다

사라지는 오후

 

(「4월의 라일락」의 부분, 『무증상 환자』 86-87쪽)

 

화자는 맹학교 배식 봉사에서 ‘알감자’ 당번을 맡았던 사람과의 어색했던 일화를 이야기한다. 병색이 짙은 그의 자식에 대한 사연을 알고도, 무슨 말을 떠올리지 못한 채로 묵묵히 맡은 바를 다한다. 그 고요 속에서 화자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셈을 했을지 모른다. 그러다 불쑥 라일락 향기가 끼어드는 이 장면의 입체성이, 내가 느끼던 봄의 고독에 육체를 부여했다. 우리 마음 “새하얀 행주” 같아서, 더러운 것을 훔치면서도 내내 표백된 것처럼 살아내야 하는 일이 삶이라서, 라일락 향기가 걸어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시집 제목이 ‘무증상 환자’인 데다가 9년 만에 펴내는 시인의 새 시집에는 말없이 고요히 죽어가는 존재들의 서성임이 번져 있다. 무미건조했던 삶에 이 시가 향기처럼 날아들 적에, 나는 삶을 하나의 증상처럼 이해하게 된다. 이 시들이 목련이 무거워지는 봄에, 살아 있다는 통증을 아프게 알려줘서 다행이란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왼손에 떨어진 달빛』

위슈화 저/ 한율 역 | 교유서가

 

깨끗한 뜰에서 너의 시를 읽어봐

세상사는 불현듯 날아 스치는 참새 같은데

세월은 투명하기만 하지

애간장을 태우는 일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

책을 부친다면 시집 대신

식물이나 농작물 책을 보낼 거야

알려주고 싶어

벼와 피가 어떻게 다른지를

 

그리고

피 한 포기의 조마조마한 봄날을

 

(「사랑해」의 부분, 『왼손에 떨어진 달빛』 18-19쪽)

 

위슈화의 첫 시집 개정판이 번역되어 한국에 첫 출간되었다. 그가 보냈을 “피 한 포기의 조마조마한 봄날을” 떠올리며, 손으로 퍼올린 맑은 개울가의 물 한 그릇을 생각했다. 햇빛 좋은 날 자신을 진피처럼 널어 말리기도 한다는 화자는, 이름 예쁜 봄날의 차를 열거하며 흠칫 봄의 아름다움에 너무 쉽게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하는 듯하다.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지만 이 시는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시다. 누군가가 아니라 어딘가일 수도 있고, 언젠가가 될 수도 있으며 이 시는 마침내 무언가라는 발신인을 획득한다. 봄날은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한다. 시집 대신 농작물 책을 부치겠다는 다짐엔, 살아가는 일과 살아내는 일이 어떻게 다른지 알려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피가 진해지는 것과 벼가 익어가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다면 봄은 정말 우리 삶에 감동이 될 수 있을까? 아픔으로 세상을 기쁘게 한다는 그의 문장이 띠지에 곱게 적혀 있다. 봄은 어떤 날의 앞면이겠지, 생각하면 혹독한 날이 오면 반드시 좋았던 어느 봄날의 뒷면이었음을 떠올리고 말 것이다.

 

『햇빛 속에 호랑이』

최정례 저 | 아침달

 

봄날 햇빛 따라갔어 나무 그림자 따라갔어 멀리서 달려온 것 아득하게 지나가는 것에게 백천만 번 절했을 꽃을 바치며 절했어

 

삼천갑자 동방삭이 살았어 짐승 가죽을 걸치고 숲속을 헤매 다는 훨씬 전에 살았어 염라대왕 동방삭을 잡으려고 삼천갑자를 헤매

 

모래처럼 잠들었어 모래처럼 깨어났어 울었어 웃었어 천 가지 구름꽃 만다라꽃 만수사꽃 흘러온 곳 언제인지 어디서부터인지 물었어

 

(「저 햇빛 삼천갑자를 흘러」의 부분, 『햇빛 속에 호랑이』 40쪽)

 

지나치는 것들을 속절없이 따라가는 화자를 뒤쫓아 이 세계의 윤곽을 그려본다. 세계의 테두리를 매만질 수 있다면 이 시처럼 따라가 보게 될 것이다. 일갑자(60년)의 삼천 배인 18만 년을 살았다는 동방삭의 시간은 겨우 이 봄날, 한 조각, 티끌 하나의 순간처럼 작게 만들지만 잠들고 깨어나고 울고 웃는 이 반복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살아간다. “언제인지 어디서부터인지 물었어” 이 근원적인 궁금증은 반대로 ‘언제까지, 어디까지인지 듣고 싶어’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삶의 무아지경을 가장 아름답게 빗대어 말할 수 있다면 봄, 시인은 그 햇빛을 열쇠처럼 쥐고 천방지축이 되어 삼천갑자의 시간 속으로 뛰어든다. 『햇빛 속에 호랑이』는 제멋대로 울부짖는 인생의 털북숭이, 난데없이 뜨거워졌다가 거무튀튀한 그림자를 한 인간에게서 꺼내어 오는 짐승, 삼천갑자의 시간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 나가는 그림자. 햇빛에 달궈진 자동차 보닛에 손을 댔다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는 봄 햇살의 송곳니를 보여주는 희귀한 봄의 군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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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증상 환자

<문혜진>

출판사 | 난다

왼손에 떨어진 달빛

<위슈화> 저/<한율> 역

출판사 | 교유서가

햇빛 속에 호랑이

<최정례>

출판사 | 아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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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후

2009년 『현대시』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나쁘게 눈부시기』와 산문집 『햇빛세입자』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쓰기 일기』 『고양이와 시』가 있다. 시에게 마음을 들키는 일을 좋아하며 책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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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와 겐지

일본의 대표적인 동화 작가이자 시인이면서 농예과학자이다. 이와테 현 하나마키 시의 독실한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일본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단가를 짓기 시작한 겐지는 열여덟 살 무렵부터 동화를 지어 형제들에게 읽어 주었다고 한다. 1921년에는 무작정 도쿄로 상경하여 동화를 창작했는데, 겐지 동화의 초고는 대부분 이 시기에 쓰여졌다. 이후 농업 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계속하였는데, 생명 존중 사상과 공생(共生)의 행복관을 담아내던 겐지의 동화들은 당시 주위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배타적이던 일본에서는 외면당한다. 결국 겐지의 동화는 끝내 빛을 보지 못하고,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늑막염으로 생을 마친다. 그러나 사후 7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일본 열도는 '겐지 붐'이라고 할 만큼 열광적인 독자군이 형성되어 있으며, 그의 작품은 일본 교과서에 오랫동안 수록되어 정서적 영감을 불어넣을 만큼 수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는 겐지의 작품이 현대 사회에 대한 환멸감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대표작으로는 『쥐돌이 쳇』, 『주문이 많은 요리점』, 『바람의 마타사부로』, 『은하 철도의 밤』, 『첼로 켜는 고슈』, 『카이로 단장』 『미야자와 겐지 전집 1,2』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