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순진무구하다 못해 엄혹한 세상을 모른 척하는 나이브한 결말이 반가울 때가 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인간적인 회사 생활의 <인턴>, 여성들의 연대로 대기업의 비운을 뒤바꾼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개를 훔친 어린이의 반성과 행운스레 저렴한 집을 발견해 낸 홈리스 가족 이야기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까지. 이성과 논리의 측면으로 바라보면 마치 우연만이 이야기의 해결책인 것처럼 보이는 엔딩이지만, 이따금은 일일이 따지지 않고 그저 그것들을 기꺼이 환영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가 그렇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 스틸컷
영화가 직면한 현실의 얼굴
첫 영화가 세상에 나오고 20년 만의 귀환이다. KT 턴스툴(Tunstall)의 ‘Suddenly I see’로 마음 설레는 오프닝 시퀀스를 자랑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이하 <악프다>) 1편은 피로하고도 아름다운 뉴욕 생활을 그림처럼 펼쳐냈다. 인파로 뒤덮인 길거리, 핀 조명을 받은 듯 팬시한 옷을 입고 활보하는 앤디(앤 헤서웨이), 냉랭한 사무실 분위기와 타 팀의 구원자, 화려한 파티와 초라한 생일 케이크, 그리고 짜증나는 친구들(푸하하!)까지. 게다가 "I love my job"을 세 번씩 주술처럼 되뇌는 동료 에밀리(에밀리 블런트)를 보다 보면 이미 뉴욕에 당도하여 그 속에 귀속돼 본 느낌이다. <악프다>는 뉴욕이고 뉴욕은 <악프다>다. 하지만 20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흘러간 건 시간만이 아니다. 많은 게 빠르게 변했다. ‘런웨이’를 퇴사하고 경제지의 저널리스트로 활약 중인 앤디는 회사로부터 일방적인 문자 해고 통보를 받는다. 영화는 이러한 앤디의 사정을 친구와의 가벼운 수다로 경량화했지만 사실 <악프다2>는 현재 미국 노동시장의 어두운 단면을 딛고 있다. 저명한 단행본을 발간하고, 저널리즘의 의미를 회복시키려 부단히 애써도 그게 종이와 가깝게 일하는 사람이라면? 돈을 제대로 벌지 못한다. 디지털이 종이를 추월해버린 2026년의 장면이다.
한편 어쩌다 노동 착취 브랜드를 띄워주는 기사를 낸 꼴이 돼버린 ‘런웨이’는 공분의 물결 속에 지탄받기 시작하고, 모기업 회장은 대중의 공격을 막기 위해 (해고 통보 피해자의 아이콘이 된) 앤디를 피처 에디터 팀장으로 고용한다. 미란다(메릴 스트립) 곁으로 다시 돌아온 앤디. 하지만 ‘런웨이’도 그때의 ‘런웨이’ 가 아니다. 앤디는 종이 잡지가 직면한 현실을 이제는 중간 관리자의 입장에서 보다 공포스럽게 체감한다. 광고주의 거의 모든 요구를 따라야 하고, 화보 촬영을 위해 오지로 떠나던 패기는 이틀 간의 스튜디오 촬영으로 타협했다. 기획성 기사를 쓰지만 아무도 읽어주질 않고, 새 독자 유입은커녕 기존 독자를 유지하는 것도 아슬아슬하다. 따라서 모기업 회장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직위를 이어받은 아들 제이가 ‘런웨이’를 매각하려는 결정은 몹시 쓰라리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풍경이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 스틸컷
진짜 문제는 뭐냐면요
여기서 영화는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한다. 미란다와 앤디의 '진심'을 알아본 사샤(루시 리우)가 오직 의리와 선의, 포용과 관용으로 ‘런웨이’를 매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때 인기 많은 모델이었지만 IT 기업 회장과 이혼한 뒤 거액의 위자료를 받고 세기의 부자가 된 바로 그 동양인 여자. 심지어 ‘런웨이’의 역사와 고유성, 저널리즘을 십분 이해한다는 그는 매체의 독립성을 존중할 것으로 보인다. 종이 잡지가 도통 팔리지 않아 모두가 휘청이는 2026년에 부루마블하듯 매체를 구제해 주는 여성의 등장이란, 사실 완전한 해결책으로 받아들이기 다소 헐겁게 느껴질 수 있다. 많은 관객이 <악프다2>를 두고 표하는 주된 아쉬움이나 혹평도 이야기가 너무나 환상적으로 흘러가 한 편의 동화처럼 끝나버렸다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들은 환상적으로 변주해야 그나마 이야기로 채택될 권한을 갖는다. 만약 <악프다2>가 진짜 현실이었다면 어땠을까. 일단 '매각될 가치가 있는' 사업으로 선정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격월간지가 되었다가 계간지가 되었다가 종국엔 폐간을 맞닥뜨렸을 것이다.(이때 편집장의 글이 반짝 이목을 끌 것이다. X와 온라인 커뮤니티 곳곳에서.) 혹은 완전한 웹진으로 전환하면서 구독경제를 덧씌워 기사를 딱 반틈만 공개할지도. ‘런웨이’가 공식적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나면 그제야 과거의 독자들이 슬퍼해 줄 것이다. 잡지란 본디 폐간을 공언하기 전까지 그 어려움을 티 낼 수 없기에 원망조차 어긋난 박자로 오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악프다2>가 제시한 해결 방식은 환상이라기보다 '절박한 상상'에 가깝다. 사샤 같은 구원자가 아니고서는 현실에서 종이 잡지의 소멸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이 사실상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샤와 인터뷰를 하던 미란다와 앤디 또한 노트북이 아닌 카메라를 두고 있지 않았던가. 지면을 그리워하는 이들도 사실은 지면의 무용함을 알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사샤라는 해결책은 비교적 원대하다. 미란다와 앤디의 노고를 이해하는 여성이고, 동양인에, 이혼 경력자라니.
오히려 <악프다2>에서 탓해야 할 '환상성'은 사샤가 아니라 피터다. 아파트 모델하우스에서 만난 리모델링 시공업자. 일 문제로 한껏 예민해진 앤디와 말다툼한 후 입맞춤으로 모든 것을 화해하는 새로운 남자 친구다. 그렇다면 피터는 어떤 환상을 직시하나. 새로운 일터로 이직하여 고군분투하는 와중에도 나를 이해해주는 남자친구가 어딘가 있을 거라는 환상. 일하는 멋진 여자에겐 그에 걸맞은 헤테로 남성이 있을 거라는 환상.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고 난 뒤에 주인공 앤디가 돌아갈 안식처가 있을 거라는 환상. 하지만 그런 성정은 앤디와 잘 맞지 않는다. <악프다1>에서 앤디는 무려 『해리포터』 미출간 원고를 구하는 데 도움을 줬던 톰슨에게 "I'm not your baby!"라고 소리치며 돌아섰던 사람이다. 영화가 어떻게든 욱여넣은 로맨스는 구태의연한 환상에 불협화음을 내며 전반적인 스토리와 쉽게 병합되지 않는다. 이상하다. 2026년, 에밀리는 싱글맘이 되어 아이 둘을 키우는데 왜 앤디는 혼자이면 안 되었던 걸까. 그뿐인가. 영화 끄트머리에 그는 에밀리와 진정한 친구로 거듭나는데. 나이젤과 온기 있는 동료애를 느끼는데. 미란다와 함께 일의 재미를 말하는데. 이토록 따뜻한 장면을 비집고 피터가 한 자리를 차지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니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가 놓친 건 천진한 문제 해결방식이 아니라, 20년 전 분수대에 핸드폰을 집어 던진 당찬 여자가 진즉에 끊어버린 허탈한 연애담을 지금까지 끌고 온 데에 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이자연
대중문화 탐구인. 그중에도 영상 콘텐츠를 여성주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걸 가장 즐겨 한다. 현재 영화 매거진 『씨네21』에서 일한다. 저서로는 『어제 그거 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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