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소컬(작고 소중한 컬렉션)’ 여덟 번째 이야기 | 예스24
어린 시절 어머니가 틀어주셨던 베토벤부터 작업을 하면서 노동요로 들었던 뉴진스까지 음악을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한 작가 이플리.
글: 김예지 (구글 아트앤 컬쳐 한국 코디네이터, 나난랩 대표)
2026.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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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사를 공부하고 미술품 경매회사의 신입으로 입사한 직후 컬렉팅을 시작했습니다. ‘컬렉터가 되어야지!’ 목적을 갖고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작가와 작업이 내뿜는 에너지에 매료되어 나의 세계에 들이다 보니 어느새 작고 소중한 컬렉션이 만들어졌더군요. 

 

이후 100% 재택근무를 하는 미국회사에 입사 이후 개인사업, 현 직장에서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근무를 하게 된 지 어언 5년 차.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일할 때도 밥 먹을 때도 나와 함께하는 작품들이 단조로운 일상에 부어주는 상큼하고 따스한 에너지를 새삼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미술시장에 몸담고 있다 보니, 미술품을 시장 관점으로 바라보고 설명하고 구매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실제로 구매 후 가치가 올랐을 때 다시 재판매한 작품도 많고요. 그러나 한두 푼이 아니기에 투자를 생각하며 소장하게 된 작품이라도 집에 걸어두게 된 작품들은 결국 제 일상 속에 스며들고 깊은 정이 들어버려 ‘내 새끼’가 되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희노애락을 조용히 다 바라보고 있는, 작가의 숨결이 담겨있는 작품들과 매번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번 연재에서는 나의 작고 소중한 컬렉션의 ‘내 새끼들’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제 ‘작소컬’의 시작과 현재를 사적이지만 누구나 쉽게 따라 해볼 수 있는 이야기들로 녹여 공유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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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에서 사회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한 뒤 영국 런던대 SOAS에서 동양미술사학 석사과정을 마친 김예지 씨는 서울옥션 홍콩 경매팀과 글로벌 사업팀, 세계 최대 글로벌 온라인 미술작품 거래 플랫폼 ‘아트시(ARTSY)’의 아시아 비즈니스팀 서울 담당 디렉터, 문화예술전문미디어 ‘널위한 문화예술’에서 시니어 아트 디렉터로 재직하며 전시 기획, 국내외 갤러리, 기관, 작가들과 협업을 통해 글로벌 미술 시장에 대한 전문성을 쌓았다. 현재는 구글 아트앤 컬쳐 한국 담당 코디네이터이자 아티스트 브랜드 나난랩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기억의 우물 속 반짝이는 음률, 이플리의 ‘기억의 매개’ 시리즈

 

예술은 개인의 일상과 동떨어져 있는 저 너머의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예술은 지극히 현실의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관객들의 일상 속에 짜잔! 하고 등장해서 잊고 있던 기억들과 내면 깊숙이 숨겨두었던 감정을 끌어내는 ‘매개’의 역할을 수행하곤 한다.


 매년 찾던 이대 졸업전시에서 이플리의 작업을 처음 마주한 순간. 조금은 칙칙하고 오래된 미대 건물의 벽을 가득 채운 파스텔 빛 테이프의 청량함과 에너지를 가까이 들여다보자 엄청난 디테일과 공이 들어간 자수의 섬세함과 질감에 또 한 번 기분 좋은 충격을 받았다.


이대 졸업전시에서 마주한 이플리 작가 작업 설치전경

 

작업을 보자마자 “갖고 싶다! 누군지 알고 싶다!” 연신 외치며 옆에 있던 당시 이대 조예대 재학생이자 우리 팀 인턴님께 “작가님의 연락처를 (제발) 구해주세요” 라는 미션을 드렸던 기억이 난다. 일잘러였던 인턴님은 반나절 만에 연락처를 구해오셨고 ‘테이프앓이’를 하던 나는 연락처를 받자마자 바로 연락을 드렸다. “저희 만나요!”

 

며칠 후 성사된 첫 만남.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내가 사랑하는 이대 앞 딸기 타르트의 성지 카페 페에서 작가님을 만났다. 앳된 대학생 작가님이 수줍게 인사하시며 졸업전시 철수 후 보관하고 있던 작업들을 가져오셨다며 종이가방 안에서 카세트 작품들을 하나하나 꺼내시는데…! 그렇게 좋아하는 딸기 타르트는 보이지도 않고 작가님과의 대화에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최애 딸기 타르트를 뒷전으로 만든 첫 만남 풍경. 아래 초록색 작품이 내가 소장하게 된 작품. 


“왜 카세트 테이프였어요?” “어떤 카세트는 줄이 늘어져 있고 어떤 건 아닌데 이유가 뭐예요?” “하나 작업하시는데 시간은 얼마나 걸리세요?” “노래는 어떻게 정하세요?” “노래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나요?” “이렇게 섬세하게 자수로 작업하면 거북목 안 생기세요?”

 

질문 폭탄을 쏟아내며 답변 하나하나에 집중하다 보니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갔던 기억이 난다.

 

그 자리에서 소장하게 된 나의 카세트는 여름의 녹음을 떠올리게 하는 ‘Plastic Island’. 처음으로 작업을 누군가에게 판매해 보는 것이라는 작가님의 수줍고 기쁜 한마디에 나 또한 마음이 환해지며 기나긴 여정의 시작점을 응원하고 함께할 수 있는 첫 컬렉터가 되었음에 참 기뻤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틀어주셨던 베토벤부터 작업을 하면서 노동요로 들었던 뉴진스의 음악들까지 ‘기억을 되살려줄 수 있는’ 음악을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해낸 작가. 시인은 일상 속 파편을 떠내려 보내지 않기 위해 시와 글로 쓰고 음악가는 기억의 조각을 음표 속에 담는다면 자수를 전공한 이플리 작가는 ‘카세트 테이프’라는 디지털 매체의 형태를 자수라는 매우 전통적인 기법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통해 음률을 시각화했다.

 

섬세하고도 디테일한 자수가 돋보이는 작가의 작업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음악을 선택한 후 아이패드에 밑그림을 그리고 직접 광목천을 원하는 색으로 염색하면서 시작된다. 이후 다양한 색상의 자수실을 이용하여 카세트 표지에 들어가는 수를 놓고, 윗부분의 필름에 들어갈 모양들을 자수한 후 라인을 따라 자르고 다림질한다. 이후 카세트 몸체와 표지를 부착하고 부착된 표지의 인라인과 아웃라인을 다시 한번 수놓은 후 다리미로 열을 가해 입체화 작업을 한다. 마지막으로 자수가위를 사용해 일일이 자수의 올을 정리한 뒤 올 풀림 방지액을 붙여서 작업을 마무리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의 오차도 없어야 탄생하는 작업인 만큼 실제 카세트 테이프 사이즈의 작업을 제작하는 데 짧게는 한나절 길게는 이틀을 꼬박 수를 놓아야 완성된다고 한다. 말 그대로 ‘장인 정신’이 들어간 작업이다.

 

이플리 작업 프로세스 


‘좋은 거 나만 알 수 없는 병’ 중증인 나는 이후 작가님의 작품을 다양한 곳에 연결하고 전시와 홍보를 지원하는 ‘매니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MBTI 중 I (내향형 지수)가 99%라는 작가님이 작업 이야기할 때만은 눈을 반짝이는 수다쟁이가 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평생 걸어갈 작가의 길, 이제 시작하는 첫 챕터의 문을 조심스레 열고 있는 이플리를 마음을 다해 응원한다. 그녀의 첫 컬렉터가 되게 해준 나의 작고 소중한 컬렉션 여덟 번째 이야기는 작가님이 쓴 작가노트와 함께 마무리한다.

 

음악은 내 기억을 되살려줄 수 있는 매개체이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편인지, 어릴 적 기억은 누군가 나에게 상세하게 이야기를 해주어야 겨우 생각나거나 세세한 설명에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다반사였다. 이렇게 나의 깊은 심연에 묻어둔 기억을 끌어올리는데 큰 도움을 준 것은 다름 아닌 노래였다. 어렸을 때부터 마음에 드는 곡이 있으면 그 한 곡만 질릴 때까지 무한 재생하던 나의 취향 덕분인지 몰라도 특정 시점에 들었던 노래를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들으면 그때 당시의 기억뿐만 아니라 세세한 감정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음악은 자의로 생각할 수 없는 기억까지 끄집어 내주는 자극제로서 나에게 의미가 있다.                                                             

노래로 기억해 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유치원에 다닐 적 아침마다 엄마가 카세트 플레이어로 틀어주던 클래식이었다.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라는 곡인데, 매일 아침 가장 자주 듣는 곡이어서 그런지 그 곡을 들으면 유치원생 때의 기억은 거의 전무하다 싶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상황이었으면 절대 기억하지 못할 추억들이 또렷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이 경험에서 영감을 얻어 카세트 테이프를 잊힌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매개체로 삼아 작업을 진행했다. 기억을 되살려주는 곡을 선정하고, 연상되는 이미지를 적용하여 카세트를 디자인한 뒤 필름은 당시 느꼈던 감정을 수놓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카세트의 표지에는 날짜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곡의 발매일이 아닌 내가 그 곡을 처음 혹은 의미 있게 접한 날로, 온전히 나의 기억에만 의존한 독보적인 카세트 테이프를 제작하고자 했다. 음악과 기억력 사이에 특수한 연결성을 지닌 나의 회상 방식에서 비롯한 추억을 가장 오래된 기억의 근원인 카세트에 담음으로 나의 기억은 영구히 보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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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지 (구글 아트앤 컬쳐 한국 코디네이터, 나난랩 대표)

이화여대에서 사회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한 뒤 영국 런던대 SOAS에서 동양미술사학 석사과정을 마친 김예지 씨는 서울옥션 홍콩 경매팀과 글로벌 사업팀, 세계 최대 글로벌 온라인 미술작품 거래 플랫폼 ‘아트시(ARTSY)’의 아시아 비즈니스팀 서울 담당 디렉터, 문화예술전문미디어 널위한 문화예술에서 시니어 아트 디렉터로 재직하며 전시 기획, 국내외 갤러리, 기관, 작가들과 협업을 통해 글로벌 미술 시장에 대한 전문성을 쌓았다. 현재는 구글 아트앤 컬쳐 한국 담당 코디네이터이자 아티스트 브랜드 나난랩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