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덕질을 하면 그 장르는 망했다. 이게 무슨 자의식 과잉인가 싶지만, 데이터를 쌓다 보니 가설이 아니라 하나의 법칙처럼 느껴진다. 망함의 기준은 다양하다. 내가 좋아한 연예인들은 갑자기 은퇴를 하거나, 소속사와의 법적 공방으로 대외 활동이 중단되거나, 심지어 본인이 범죄를 저질러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음주 운전, 마약, 성매매, 거기다 상습적인 성폭력까지……. 이렇게 쓰다 보면 내가 덕질을 한 건지 범죄 다큐를 본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성별이 문제인가 싶어서 여돌로 갈아탔더니 이번엔 학폭 논란이 터졌다. 최애는 탈퇴했고 나는 또 한 번 덕질을 접었다. 좋아하는 사람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꼴을 연달아 보게 되니, 덕질에 염증이 났다. 케이팝과 케이드라마의 번영을 위해서라도(?) 연예인 덕질은 그만두는 편이 나아 보였다.
그래서 찾은 피난처가 완결된 이야기였다. 만화와 드라마는 이미 끝난 이야기다. 더 망할 일이 없다. 시간이 지나 사람들의 기억에서 흐려질 수는 있어도, 내가 사랑한 세계는 온전히 남는다.
나의 첫 덕질은 〈베르사유의 장미〉였다.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비디오판 애니메이션. 프랑스 혁명이 배경이라 8살 모호연에게 쉬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아껴둔 용돈을 비디오 대여점에 바치며 그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로부터 3년 뒤, 〈베르사유의 장미〉가 TV에서 방영되며 대히트를 쳤다. 비밀스러운 덕질은 끝났고, 같이 이야기할 친구들은 많아졌다. 그런데 어쩐지 나만의 세계를 빼앗긴 듯한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들이 TV판 주제가를 신나게 부를 때마다 속으로 ‘그건 진짜가 아냐!’라고 외치면서 절대 따라 부르지 않았다. 〈베르사유의 장미〉에 어떻게 그렇게 촌스러운 주제가를 붙이냐며 분노했다. 게다가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오스칼×페르젠’ 커플을 미는 사람이 우리 반에 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혼자 망상을 하고 팬픽을 쓰며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15년 뒤 똑같은 커플을 지지하는 이다를 만나게 되는데…….)
내 덕질의 깊이는 팬픽을 썼는지 여부로 측정된다. H.O.T.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 팬픽을 써서 전교에 돌리고 댓글을 잔뜩 받기도 했지만 어쩐지 금방 흥미를 잃었다. 마이너한 취향 탓에 남에게 보여주는 팬픽보다 나 자신을 위한 팬픽을 더 많이 썼다. 원하는 2차 창작이 없다면 스스로 연성해야 마땅하다. (이 ‘연성’이라는 단어는 내가 좋아했던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물질의 변환과 창조를 의미한다. 덕후들 사이에서 ‘2차 창작’의 의미로 널리 쓰이고 있다.) 〈베르사유의 장미〉 팬픽으로는 오스칼이 사관학교 시절 페르젠을 만나 대결하는 애증의 스토리도 있었고, 사랑을 잃고 절망한 오스칼이 혁명의 시기에 암살자로 활약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엑스파일〉에 빠졌을 때는 멀더와 스컬리가 이세계의 존재(=나)와 만나는 내용의 소설을 썼다. 20대에는 동방신기에 미쳐 있었다. 거기서도 마이너 커플을 파느라 외로웠지만 비슷한 처지의 덕친들이 있어 버틸 만했다.
이다와 쿵짝이 잘 맞는 것도 어쩌면 우리 둘 다 덕후 기질을 타고났고 덕질로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함께 덕질을 한다는 건 취향 공유를 넘어, 남에게 쉽게 드러내지 않는 감정의 깊은 층을 함께 드나드는 일이다. 과몰입 상태로 아무 말이나 쏟아내도 참아주고, 상대도 나에게 그런 호의를 베푼다. 우리는 서로의 덕질을 돕는 공생 관계다. 좋아하는 대상이 여러 번 겹친다면 그만한 소울메이트가 또 있을까? 함께 좋아하는 콘텐츠가 늘어갈수록 우리에게는 ‘덕친’이라는 또 다른 카테고리의 추억이 쌓여간다.
다만 이입하는 감정의 종류는 판이하다. 둘 다 호러영화를 좋아하지만 나는 스릴을 거의 못 느끼고, 이다는 샤워할 때 찬송가를 불러야만 공포를 이겨낸다. 어떤 슬픈 장면에도 눈가가 바싹 말라 있는 이다와 달리,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주룩주룩 눈물을 흘린다. 이 차이는 결국, 어떤 서사에 이끌리는지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순조롭게 이어가던 ‘같덕’이 깨진 것은 내가 중드에 빠지면서다. 나는 갈수록 현실적인 불행을 다룬 콘텐츠를 못 견디게 되었는데, 미드의 인기작들은 특유의 희망 없는 좌절이 기본으로 깔려 있었다. 게다가 느닷없는 섹스신에서는 쉽게 튕겨 나왔다. 그래서 대안으로 눈을 돌린 것이 중국 무협 드라마였다. 중드는 애초에 현실과 거리가 멀다. 주인공이 어떤 고난을 겪어도 결국 사필귀정으로 마무리된다. 마계와 천계, 신선과 요괴가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든 가능하다. 로맨스도 남다르다.
“남자가 5만 년쯤 수절하면서 기다려야 진짜 순애지. 근데 여주는 남편이 바뀌어도 된다. 그것이 중드다.”
내 영업 멘트에 공감하면서도 이다는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무술이나 괴상한 CG에 끝내 적응하지 못했다.
“저 연꽃 가짜 아냐?”
“어허, 아마추어같이 왜 이래? 그쯤은 상상으로 때워봐.”
결국 이다는 “검을 타고 날아다니는 건 진짜 못 보겠다”면서 하차했다. 아니, 무기마다 이름이 있고 성격도 다르고 커졌다 작아지기도 하는데, 검을 타고 나는 게 대수인가? 물론 성공한 영업도 있다. 〈랑야방〉과 〈연희공략〉은 주기적으로 다시 본다. 다만 아무리 굳센 덕후라도 영업에 실패하면 시무룩하다. 내가 그랬듯 이다 역시 “인간의 답 없는 절망 따위 보기 싫다”는 내 고집에 여러 번 실망했다. 이다가 영업한 〈대왕세종〉과 〈슈퍼걸〉은 취향이 맞아서 보고 또 보는 작품이 되었지만, 〈더 피트〉와 〈홈랜드〉는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른다.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되면서, 특정 장르는 더 이상 영업을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다에게 판타지 중드 영업을 그만뒀고, 이다는 나에게 ‘피폐물’ 영업을 그만뒀다. 결국 서로 포기할 건 포기한 채, 우리는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그래도 새로운 작품을 볼 때면, 우리는 같은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같은 타이밍에 박수를 친다. 오랜 덕친끼리는 맥락 없이 하는 말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어느 날, 이다가 7천 원짜리 얼굴 마사지기를 들고 말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셀럽 화비냥냥이 쓰던 뷰티 디바이스잖아.”
나는 받아친다.
“아, 그거 연대장군이 선물한 거 아냐. 그걸 쓰면 안 늙는다지?”
우리는 〈후궁견환전〉 속 몸종들처럼 깔깔대다가, 결정적인 질문에서 웃음을 멈추었다.
“근데 화비가 누구한테 이걸 줬더라?”
최애 드라마라면서 이걸 모르다니. 안 되는 일이다. 그날 저녁 우리는 다시 〈후궁견환전〉을 틀었다. 이미 여러 번 본 드라마를,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설레며 보았다.
우리는 창작을 업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남이 만든 세계에 빠져든다.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박수를 보내면서 벅차오른 마음을 분출하고, 완결된 이야기 안에서 마음껏 좋아하고 분노한다. 어쩌면 이것이 덕후의 행복한 습성일 것이다. 나에게서 잠시 벗어나 전혀 다른 삶과 감정을 살아보는 것. 그리고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존재를 진심으로 사랑해 보는 것.
덕질하던 장르가 망하면 어떤가. 우리는 앞으로도 좋아하는 세계를 얼마든지 발견할 것이다. 다음 ‘같덕’은 무엇이 될지 궁금하다. 쉽게 빠져들고 벅차오르는 롤러코스터 같은 짜릿함을 내 오랜 덕친과 함께하고 싶다.
문제의 뷰티 디바이스 (〈후궁견환전〉 스틸컷)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이다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포항에서 태어나 청소년기 내내 쉬지 않고 다이어리를 썼다. 지은 책으로 『이다의 자연 관찰 일기』, 『이다의 도시관찰일기』, 『어린이 탐구 생활』이 있으며, 『내 손으로, 치앙마이』, 『내 손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 등 100퍼센트 손으로 쓰고 그린 여행 노트를 꾸준히 펴내고 있다. 그림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해보는 것이 소망이다.
모호연
평소 가까운 물건의 생애와 쓸모에 관심이 많다. 우산수리팀 ‘호우호우’ 소속으로 우산수리 마스터가 되기 위해 매주 우산을 고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반려공구』, 『반려 물건』, 『지금은 살림력을 키울 시간입니다』(공저)가 있다. 공구를 체험할 수 있는 공방을 만들어 수리 문화를 확대하는 거창한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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