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새벽, 저자와 번역가의 손끝에서 빚어진 문장이 편집자에게 이르렀습니다. 편집자는 아직 책으로 존재하지 않는 문장들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갓 인쇄된 교정지는 따끈따끈하고, 흰 바탕 위의 글자들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빛나고 있네요. 이제 즐거운 읽기가 시작될 참이지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비문과 오자와 오역과 비약(N)을 막기 위한 사투입니다. 각종 사전들과 참조 도서들을 쉴 새 없이 뒤적이면서, 무엇이든 의심하고 궁금해하면서, 단어 하나 문장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습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 동안의 시간을 들여 마지막 문장에 이르고 나면, 문장들은 조금 더 단단해져 독자분들을 만날 채비를 마칩니다.
제인 오스틴, 실비아 플라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발터 벤야민, 헤르만 헤세, 시그리드 누네즈, 다와다 요코, 폴 윤, 그리고 테드 창까지—엘리의 손을 잡아준 작가들의 (한국어로 도착한) 문장들은 모두 이런 고요한 새벽, 치열한 읽기를 거쳐 한 권의 책이 되었습니다. 올해에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집, 비비언 고닉의 에세이, 제인 오스틴의 장편소설,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집, 호르헤 볼피의 인문 역사서, 발레리 페랭의 장편소설, 에이드리언 차이콥스키의 장편 SF를 그렇게 다시 새벽에 읽고 또 읽어 독자분들께 전해드릴 예정이에요. 서점에서, 도서관에서, 또 다양한 장소에서 엘리의 책과 마주치게 되신다면 한 번쯤 이 새벽의 시간을 떠올려주시기를.
폴 윤 저/ 서제인 역 | 엘리
삶의 가장 어두운 시절을 지나가고 있는 작은 사람들, 칼로 스윽 잘라내 드러난 삶의 상처 난 단면들이 어찌나 깊은 골짜기를 품고 있던지요. 동트기 직전,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조금은 세상이 외롭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습니다. 그리지 않고 비워둔 여백 속에 독자의 자리를 남겨준 폴 윤 작가와 그 여백의 분위기까지 살펴 옮겨준 서제인 번역가를 떠올리기 전까지는요. 온전히 혼자가 되어 소설을 읽고 혼자임을 실감하며 소설에서 빠져나왔을 때, 이 글을 쓰고 옮긴 사람들이 곁에 있어 주었거든요. 특히 「옮긴이의 말」은 저에게, 책을 함께 읽은 사람들을 이어주는 붉은 실 같은 글이었습니다.
김선형 저 | 엘리
제인 오스틴 전작을 번역하고 싶다는 김선형 번역가의 소망을 처음 들었을 때, 조바심이 났던 것을 기억합니다. 대학 때 머릿속에 꼭꼭 새겨두었던 두 분의 번역가 중 한 분이 제인 오스틴 전작을 번역하겠다고 나서다니,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하면서요. 계약서를 준비해 무작정 찾아갔을 때 놀라면서도 반가워해 주셨던 번역가의 표정을 기억합니다. 정성껏 내려주신 커피의 향기를 기억합니다. 번역가의 그때 표정과 향기는 그대로 제인 오스틴의 표정과 향기가 되어, 제인 오스틴의 200번째 생일인 2025년 12월 16일에 첫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 책은 김선형 번역가가 제인 오스틴의 첫 출간 소설들을 번역하면서 깨달은 것들, 제인 오스틴의 하루하루를 속살속살 풀어놓은 제인 오스틴 백과사전과도 같은 에세이입니다.
에이드리언 차이콥스키 저/김상훈 역 | 엘리
미국에 테드 창이 있다면 영국에는 에이드리언 차이콥스키가 있다고, 작가를 처음 소개해 주시며 흥분했던 김상훈 번역가의 목소리가 생생합니다. 일단은 세계 3대 SF문학상 수상 작가라는 위상에 솔깃했지만, 무엇보다 사람을 죽여 경찰에 체포된 로봇, 그런데 그 경찰도 이제 로봇인… 게다가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 도입부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여기에 단테, 보르헤스, 오웰, 카프카, 그리고 애거사 크리스티까지 인류의 가장 눈부신 작품들로 쌓아 올린 각각의 ‘부’는, 웃어야 할지 황망해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채로 읽기의 기쁨에 푹 빠져들게 해줍니다. 인류가 삭제된 세계에 남은 시스템과 알고리즘, 그리고 로봇들의 방랑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엘리의 2026년 첫 책을 기대해 주세요.
함께 읽는 다른 출판사의 책
발터 벤야민 저/새뮤얼 타이탄 편/김정아 역 | 현대문학
대학 때 머릿속에 꼭꼭 새겨두었던 두 분의 번역가 중 한 분의 작업으로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어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가 벤야민을 조금 더 잘 이해하면서 읽을 수 있게 되었다면, 그건 모두 김정아 번역가 덕분이라는 생각을 저 같은 비전문 일개 독자가 감히 해보며, 이 귀한 책이 한국에서 출간되었다는 사실이 기쁘고 반갑습니다. 특히 「경험과 빈곤」이 「경험지와 부족함」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이론 속의 뉘앙스와 사유를 번역한다는 것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전통적인 경험과 지혜의 전승 회로가 끊긴 시대에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이고 새롭게 열린 세계는 어떤 것인지, 그 사유를 지금 시대에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허정은
엘리 편집장. 문학, 교양, 학술 도서 편집자를 거쳤다. 그동안 W. G. 제발트, 프리드리히 키틀러, 발터 벤야민, 클리퍼드 기어츠,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 주디스 루이스 허먼, 제인 오스틴, 루이자 메이 올컷,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 헨리,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캐럴라인 냅, 폴 윤, 다와다 요코, 에이드리언 차이콥스키, 배명훈 등의 책을 편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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