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엄 산이 처음으로 한국 작가 개인전을 선보였다. 그 주인공이 이배라는 점은 상징적이다. 자연과 공간, 예술의 관계를 오래 탐구해온 뮤지엄 산의 방향과, 숯이라는 단일한 물질로 생성과 소멸, 기다림의 시간을 이야기해온 이배의 작업이 서로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 《En attendant: 기다리며》는 2026년 4월 7일부터 12월 6일까지 이어진다. 회화·조각·설치·영상을 아우르는 39점의 작품이 본관 입구부터 야외 ‘무의 공간’까지, 미술관 전체를 하나의 호흡으로 잇는다.
《En attendant: 기다리며》 전시 포스터
이번 전시는 이배의 30여 년 숯 작업을 중심으로 펼쳐지지만, 단순히 대표작을 모아놓은 회고전과는 조금 다르다. 오히려 한 작가가 어디에서 출발했고, 무엇을 지나 지금에 도달했는지를 천천히 되짚는 전시에 가깝다. 이배가 이번 전시를 두고 “나를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라고 말한 것도 그래서 더 잘 이해된다. 관람객 역시 이 전시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시작점과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된다.
숯이라는 물질, 기다림이라는 시간
이배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숯이다. 하지만 그의 작업에서 숯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다. 나무가 가장 뜨거운 순간을 지나 형태를 잃고, 오랜 시간 식어가며 다른 물질로 바뀐 결과이기 때문이다. 전시 제목 ‘기다리며’가 가리키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이 기다림은 그저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에너지가 응축되는 시간이다. 생성과 소멸 사이를 통과하며 완성되는 이 변화의 시간이야말로 이배 작업의 핵심 사유다.
이배, Issu du Feu, 800x250x250cm, 스틸 프레임에 숯, 2026 ⓒMuseum SAN, Photo by Sangtae Kim
입구에 놓인 8미터 높이, 7톤 규모의 〈Issu du feu〉(불로부터)는 뮤지엄 산의 처마를 떠받치고 있다. 2023년 뉴욕 록펠러센터 앞에 설치한 숯 조각의 확장판이기도 하다. 개별적인 숯 조각들이 반복적으로 쌓여 하나의 기둥을 이루는 이 작업은,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잔여와 시간의 층이 모여 형성된 작품이다. 이배의 검정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불을 통과한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시간의 밀도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단순히 숯을 보여주는 자리가 아니라, 숯이 품은 시간과 에너지가 응축된 공간 전체를 체험하게 한다.
순환에서 치유로 넓어지는 이야기
이번 전시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이배의 숯이 더 이상 정체성이나 동양적 정신성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가는 강원 지역 산불 현장을 직접 찾은 경험을 떠올리며, 재앙 이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되묻는다. 이때 숯은 자연 순환의 상징이면서, 불타버린 세계 뒤에 남은 흔적이 된다. 더 나아가 다시는 같은 재앙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과 회복의 마음을 담는 매개로 확장된다.
‘농부의 아들’이라는 이배의 정체성은 이번 전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흙을 고르고 쓸어내는 몸의 움직임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런 면모는 청조갤러리 3관 〈Becoming〉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청도에서 가져온 흙으로 만든 논두렁과 논 위에서 붓질하는 영상은, 그의 작업이 캔버스를 넘어 노동의 기억과 땅의 감각까지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시 기간 동안 이 흙 위에서 식물이 자라고 사라진다는 점은, 이 공간이 자라고 사라지는 시간을 함께 드러내는 살아 있는 설치임을 말해준다.
감상에서 체험으로 이동하는 전시
이번 전시는 개별 작품보다 공간을 쓰는 방식이 더 인상적이다. 로비의 〈Brushstroke〉 연작은 자연광 속에서 시간에 따라 다르게 보이며 관람객이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White ⓒ Museum SAN, Photo by Sangtae Kim
특히 White와 Black의 대비는 이번 전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축이다. White 공간에서 이배는 무언가를 더하기보다 안도 타다오의 건축 안에 스며드는 방식을 택한다. 노출 콘크리트를 종이로 감싸고, 아직 의미가 생성되기 전의 여백 같은 공간을 만든다. 그림을 걸기보다 비워두는 선택, 그리고 벽면에 박힌 3만 5천 개의 스테이플러 심은 이 공간을 조용하지만 팽팽하게 긴장시킨다.
Black ⓒ Museum SAN, Photo by Sangtae Kim
반대로 Black 공간에서는 대형 〈불로부터〉 연작, 바닥 드로잉, 숯 덩어리, 브론즈 조각이 겹쳐지며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White가 의미가 생성되기 전의 여백이라면, Black은 숯의 시간과 기억이 켜켜이 쌓인 풍경에 가깝다. 작가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떠올리며 이 공간을 구상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바닥과 벽, 입체와 평면이 산수처럼 연결되며, 전시장은 하나의 검은 풍경화가 된다.
《En attendant: 기다리며》는 숯이라는 재료 자체보다, 그 이후에 남는 시간과 흔적에 주목하게 한다. 이배의 작업은 이번 전시에서 정체성과 순환의 문제를 넘어 회복과 기억의 층위로 넓어진다. 그래서 관람 뒤에 남는 것은 강한 이미지 한 장면이 아니라, 전시를 지나며 서서히 쌓이는 생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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