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은의 미술과 문장] 흩날리며 공존하는 파편들 | 예스24
조해진은 승전의 명예가 아니라 그 뒤에 남는 인간의 비극을 응시하는 일을 예술의 과업으로 택했다.
글: 오정은
2026.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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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로 파종을 뜻하는 ‘디아스포라(diaspora)’는 동시대 미술 담론의 주요한 개념 중 하나로 기능한다. 그것은 로마에게 예루살렘을 빼앗기고 타국으로 흩어진 유대인을 일컫던 말에서 나아가, 정주하지 못하는 이주민의 정체성을 이르는 의미로 자리 잡았다. 중심을 잃고 떠돌며 상실의 불안을 거듭하는 감각―그렇게 번져가는 이산의 것들은 부서진 조각의 형태를 띠고 유랑의 운명을 걷는다.

 송희정, <미존재에 바치는 시: 꼬리들>, 세라믹, 혼합재료, 30x26x32cm, 2026


송희정의 <미존재에 바치는 시>는 일상의 바깥을 맴도는 디아스포라적 장면을 수집해 조각으로 길어올린 증좌다. 작가는 경기 북부의 자동차 도로 노면 위에 떨어진 비산물과 이름 없는 사고의 잔해, 타이어 조각과 비닐 등 각종 폐기물에 시선을 두고, 성분과 출처가 불분명한 파편들이 서로 엉겨붙어 마치 살아 있는 존재의 실루엣처럼 기시감을 자아내는 현상에 주목했다. 본체에서 탈락해 목적지를 잃은 그것들은 작가가 흙을 구워 만드는 주물의 틀을 대신하며, 테무(Temu) 등 글로벌 온라인 마켓플레이스에서 유통되는 대량 생산 제품과 혼합되어 보다 복합적인 형태를 이룬다. 작가는 태국의 거리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는 산 프라 품(San Phra Phum), 즉 애니미즘과 신앙이 결합된 ‘영혼의 집’ 형식을 참조해, 자리에서 밀려나 귀속되지 못한 존재들에게 거처를 부여하고 제의적인 작업을 수행한다. 이러한 행위는 가족의 가출과 집단 따돌림으로 내상 입은 성장의 길목에서 단절된 것들을 되짚는 작가만의 내적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게 송희정의 디아스포라는 이미 뜯겨져 흩어졌으나, 복원과 회복의 방향으로 몸을 재편해가는 경로 위에 부여된 이름이 된다.


송희정, <미존재에 바치는 시: 쉬쉬>, 세라믹, 혼합재료, 48x82x15cm, 2026.


문학평론가 박인성은 ‘자기 존재를 그 자체로 조각난 삶의 형태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자들’로 디아스포라의 확장된 의미를 언급한 바 있다. 그는 ‘보편화되지 않는 배제되고 억압된 삶의 양태를 고스란히 지닌 채로 우리 삶의 낮은 지점에서만 가까스로 재발견될 따름’인 디아스포라를, 조해진이 소설 「빛의 호위」를 통해 ‘인간 존재의 핵심적인 조건으로 재구축하는 무척이나 섬세하고도 위험한 작업’을 수행했다고 읽어냈다. ((박인성, 「감각의 디아스포라」, 『2014 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참고)

 

「빛의 호위」는 시대와 국경이 다른 여러 사건과 그 위에 놓인 인물들이, 잠재된 기억과 계보가 교차하는 지점이자 느슨하게 연결된 관계의 모양으로 이어지는 장면을 서술한다. 돌봄의 영역에서 비껴난 채 가난한 방에 외톨이로 은둔하던 소녀 권은과, 홀로코스트 시기 지하 창고에 숨어 살아남은 알마 마이어의 삶을 병치시킨 구성이 한 예다. 그들 사이로 전해진 타자의 온기는 희미한 연대로 작용하며 마치 산란하는 빛의 감각처럼 세계와 공명한다. 『빛과 멜로디』는 이 서사를 다시 받아 장편으로 출간된 소설이다. 중동 분쟁지역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을 기록해온 권은을 중심으로, 그녀가 동경한 영국인 사진가 게리 앤더슨, 앤더슨이 기록한 구호 활동가이자 가자지구에서 피격당해 사망한 노먼 마이어(알마 마이어의 아들), 권은이 레스보스섬 난민 캠프에서 만난 살마와, 훗날 살마의 초청으로 러시아 공습을 피해 이주하게 되는 나스차 등 각기 다른 시련을 지닌 인물들이 삶의 다른 궤적 위에서 이어지며 하나의 연쇄를 형성한다.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떠도는 파편들은 서로를 향해 기울고 맞닿으며 예기치 않은 생의 멜로디를 이룬다.

 

이재석, <설계자>, 캔버스에 아크릴, 젤 스톤, 162.2x130.3 cm, 2025. 

 

흩어지고 이탈한 존재들을 돌아보는 시도는 이재석의 작업에서도 포착된다. 그는 부품 단위로 장착되고 소비되는 군용 무기에서 착안한 회화를 그려왔다. 상해와 재난을 겨냥한 금속성 파편과 포영은 폭력이 지나간 뒤 냉각된 표면을 연상시키듯 차갑고 초현실적인 화면으로 드러난다. 군복무 중 골절사고로 발목에 보형물을 삽입한 작가는 몸 안에서 느껴지는 이물감, 즉 신체 일부가 분리되어 감각되는 낯섦을 경험했다. 분리와 해체가 가능해 보이는 낱개의 조립식 도상들, 이를테면 게임 속 아이템처럼 허공에 나열된 기호들이 화면을 구성하는 이유는 그처럼 몸에 새겨진 감각의 특이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이재석의 회화는 정지된 듯 멈춘 채 식별 기호가 지워진 막사 천막과 돛, 깊이감이 지워진 자연물 배경, 그리고 이를 가상세계로 전환시키는 다시점의 매핑(mapping)으로 채워진다. 시대와 국가를 특정할 수 없는 비시간적 풍경으로 제시된 이 화면에서 디아스포라는 외부로 흩어진 존재에 관한 감상적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인간의 유기적 신체와 자연의 통합적 원류는 이미 분해되고 풀어진 상태로 드러나며, 세계는 더 이상 단일한 질서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재석의 그림 앞에서 관람객은 환원되지 않는 요소들이 서로 어긋난 그대로 부유하며 공존하는 상태를 마주하게 된다.

 

이재석, <서사의 시작>, 캔버스에 아크릴, 193.9x112.1cm, 2025


 

그가 폭격기 조종석에서 보았던 건 단지 폭죽인 양 어둠을 물들이는 소이탄의 눈부시도록 환한 빛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날 콜린은 드레스덴이 처음 화제에 올랐을 때의 또렷하고 형형했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 극도의 혼돈과 고통 속에서 거의 절규하듯 말들을 토해냈다. 그녀의 눈에 그런 콜린은 또 다른 의미의 부상병으로 보였다. 무려 팔십 년 가까이 치료를 받을 기회마저 없었던 부상이었다.” 

 

(조해진, 빛과 멜로디)

 

『빛과 멜로디』에서 권은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 소속 공군 조종사였던 콜린의 일생을 영상화하는 일을 맡는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콜린은, 민간인 폭격에 가담한 일로 자신을 미워하던 아들 게리 앤더슨에게 끝내 전하지 못했던 말을, 생을 정리하는 시기에 이르러 권은에게 털어놓는다. 오랜 유예와 방황 속에서도 봉합되지 못하고 머금어야 했던 상흔이 비로소 타자에게 들려지는 언어로 전해진다. 조해진은 승전의 명예가 아니라 그 뒤에 남는 인간의 비극을 응시하는 일을 예술의 과업으로 택했다.  

 

이탈과 잔존, 뒤늦은 접속이 얽히고 반복되는 세계의 정경을 본다. 상처 나고 흩어진 몸들이 서로에게 기울며 귀속을 시도하는 그 모습이다. 동시대 예술을 통해 비춰지는 이 장면은 오늘날의 디아스포라를 새롭게 환기한다. 그렇게 흩날리는 파편들이 지금을 다시 사유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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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황정은>,<조해진>,<윤이형>,<최은미>,<기준영>,<손보미>,<최은영> 공저

출판사 | 문학동네

빛과 멜로디

<조해진>

출판사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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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은

미술비평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전문사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동시대 미술 현장과 작가 작업을 연구하며 글을 쓴다. 『경향신문』에 미술 칼럼을 연재했고, 『네이버 디자인』, 『월간미술』, 『서울아트가이드』 등 여러 매체에 기고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