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시가 읽고 싶어지는지 생각해 보았는데, 구체적인 감정이 돌올해지는 순간이 아니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돌입했을 때다.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지, 이런 상황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그 오리무중의 상태에서 시가 나를 관통하게 두면, 어떤 시는 상처를 깁을 수 있도록 세세하고 꼼꼼한 바느질을 해주고, 어떤 시는 이미 만들어진 흉터를 근사한 문신처럼 만들어주기도 한다. 어떤 시는 그냥, 옆에 있어 준다. 그러나 내가 시를 읽으면서 바라는 것은 자동차로 꽉 찬 도로를 유유히 빠져나가는 오토바이가 되는 것. 시 읽기란 시원하게 정체 구간을 내달릴 수 있는 이륜의 운명이 되어 멈출 수 없음을 즐기는 것이 아닐까 하고.
대신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속이 다 시원해요. 그런 감상을 남긴 시는 살면서 꼭 한 번 더 펼쳐보게 된다. 자신의 흉터를 손으로 만지며 한 시절을 회고하는 전쟁 영웅처럼. 싸워서 이기셨군요. 아니요. 저는 그저 살아남은 겁니다. 살아남은 자의 목소리가 누군가를 구하는 경험을 한 뒤로 시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다. 오늘 쓴 시가 만원 버스처럼 하고 싶은 말로 꽉 차고, 느리고, 무겁게 굴러가진 않는지 생각한다. 내일 쓰고 싶은 시가 여전히 헬멧에 얼굴을 가린 채로 전속력을 다하려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거는지 생각한다.
도로의 스키드 자국. 미사일이 지나간 자리. 나는 그곳에서 여전히 시를 기다린다. 한 치 앞을 모르면서 간발의 차로 말할 수 없는 날들을 관통해 온 시를.
김승희 저 | 창비
가을 나무 아래 형용사가 다 떨어져
텅 빈 하늘 흰 뼈 하나로 남을 때까지도
빵점은 분주할 것도 없이 고요하다
빵점은 치욕이나 수치라고 말하기는 뭐하고
마냥 억울하지도 않고
빵점은 빵점, 명확하다
빵점에게도 존재감이 있다고
(중략)
빵점은
사랑의 폐허는 아니고
난파선도 아니고
방귀 같은 그런 힘찬 자유의 말
시작이라고
(「빵점」의 부분, 『빵점 같은 힘찬 자유』 58-59쪽)
어릴 적 내가 홀로 흠모했던 친구들은 반 대표로 나가 이어달리기에서 1등을 하던 친구가 아니라, 체력장 오래달리기에서 가장 늦게 들어오면서도 미소를 꽉 물고 놓지 않는 친구였다. 체육 선생님이 운동 좀 하라고 등짝을 때려도 그늘에 앉아 웃는 얼굴로 피크닉 사과 맛을 열심히 마시던 친구. 뭐든지 잘하고 싶었던 나는 뭐든지 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가벼운 사람을 조용히 좋아했다. 그것은 가벼운 게 아니라, 자연스러워 보인 것이었다. 김승희 시인의 ‘빵점’이라는 맥락은 어떤 결과가 아니라 시작하게 하는 말로 작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잘하고 싶던 마음을 해제시킨다. 빵점이 만들었던 역사는 언제나 존재감을 드리우며 기억에 남아 있고, 잘하려고 애쓴 것들은 결국 서서히 잊힌다. 빵점이 너무 명확해서, 빵점이 너무나도 시원해서 그 개운한 경험이 일으킨 것들이 있었다. 시인의 이번 시집을 읽고 나는 내게 빵점을 주었다. 기회를 준 것이었다.
임재정 저 | 문예중앙
어쩌다 물 냄새에 웅크린
사구의 한 움큼 모래, 밤이면 사막 한가운데 끌려가서
물기란 다 빼앗기고 쫓겨 오죠
늘 이런 식이에요 새벽은, 죽지 않을 만큼만 말예요
(중략)
불경스럽지만, 다행이에요 이렇게라도
흔들린다는 거
(「새벽 네 시의 지느러미」의 부분, 『내가 스패너를 버리거나 스패너가 나를 분해할 경우』 18-19쪽)
상황을 전복해 말이 되지 않던 말을 일순간 진실로 만드는 시의 순간이 좋다. “불경스럽지만” 다행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렇게라도 흔들”려서 존재의 진동을 느끼며 살아 있음을 실감하는 것일 테다. 나는 이런 문장들이 극적으로 느껴진다. 믿어온 통념을 배신하고, 믿을 수 없는 것에 발을 빠트리면서 상황을 새롭게 전개하는 것, 그리하여 나의 불행을 유리한 진영에 서게 만드는 시의 둔갑술이 때론 삶의 몸짓처럼 보이기도 하다.
임재정 시인의 첫 시집은 내가 오랫동안 사랑하고 있는 시집이다. 가령 외딴곳에 버려지듯 비어 있는 창고에서 쇠창살을 보고는 이곳이 창고가 아니라 누군가 살았던 곳으로 진술하는 시도 그렇다. 시집 제목에서도 그렇지만 입장이나 경우의 교환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시집이다. 0이기도 하고 100이기도 하면서 50으로는 결코 만나지 않는 계산 속에서, 시인의 시선이 정교하게 전복된 세계를 그린다.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말이 시적인 힘을 얻는 데에는, 다양한 측면에서 진실을 응시하는 시인의 눈이 무언가를 확실히 관통했다는 뜻일 것이다.
잇시키 마코토 저 | 황금알
우리는 마음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아직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도 마음을 보는 우리의 눈은 점점 변해갔다.
교실에서 마음은 한 번도 손을 들지 않았다. 언제나 정답을 다 알면서도, 그리고 우리가 틀린 답을 태연하게 말할 때 마음은 아픈 사람처럼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음은 어느 날 등교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마음이 병이 났다고 했다. 그 뒤로도 일 년 동안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음은 불치병을 앓고 있었다고 선생님이 말했다. 태어날 때부터 줄곧 아팠단다.
“마음을 잊어라.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아라”라고 선생님은 당부하셨다.
(「마음」 부분, 『암호해독사』 28-29쪽)
이 시에는 교실에서 말도 없고, 존재감도 없는 ‘마음’이라는 학생이 등장한다. 이렇게 손쉽게 마음을 비유하다니 싶다가도, 마음을 이름처럼 계속 부르다 보니 꼭 존재하는 것처럼 드리운다. ‘마음’은 조용히 곁에 있는 것 같지만 부적응자처럼 그려지기도 하고, 아픈 사람처럼 있더니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일 년 동안 돌아오지 않고, 불치병을 앓았다고 선생님이 이야기한다. “태어날 때부터 줄곧 아팠”다고.
선생님은 이 시에서 “마음을 잊어라.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아라”라고 남겨진 아이들에게 당부한다. 나는 이런 당부가 필요했다. 때론 마음을 너무 생각해서 마음이 아프고,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욱신거리는 마음 때문에 괴로웠기 때문에. 이 시의 마지막에는 ‘마음’을 만나기 위해 병문안을 가는 아이들이 등장한다. 마음을 처음 알고, 마음과 불화하고, 마음을 보살피고 싶은 그 여정 자체가 한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간수하며 살아가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 단순한 알레고리에 흠뻑 빠져서는, 마음이 있는 괴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곧 남겨진 사람의 몫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박판식 저 | 문학동네
인생은 발걸음이 빠르다, 화요일에는 엉터리 같은
결심을 하고 금요일에는 2킬로그램쯤 살을 찌워서는
물방울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 그 결심에 구멍을 내고 있다
마음은 사물이 아니다, 그런데도 구멍이 난다
이이는 사, 삼삼은 구, 사사 십육
아무런 문제 없는 인생은 우리를 속이는 거라고 이 친구야
(중략)
무엇인가가 이 세상에서
당신과 나를 놓지 않고 있다
그 못은 대체 어떻게 생겼는가
착오라도 있었다는 듯이 눈은 내리자마자 녹아버린다
바람이 눈을 밀치고 행인과 입간판을 차례로 밀친다
떠밀린 채로 문이 열리고 다시 문은 열리고
(「나는 말한다」의 부분, 『나는 내 인생에 시원한 구멍을 내고 싶다』 37쪽)
잇시키 마코토의 시에 이어 박판식 시인의 시를 읽으며 ‘마음의 문제’를 겪는 우리를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무런 문제 없는 인생”이 우리를 속이고 있다고 말해줘서, 빵점도, 불경스러움도, 아파서 돌아오지 않는 마음도 제정신인 것만 같아진다. 이 시집은 “내 인생에 시원한 구멍을 내고 싶다”라는 일종의 소망을 간직하면서도 우울에 지지 않고 기쁨에는 양보도 가끔 하는 명랑함이 흐른다. 그것이 삶이라는 수수께끼에 나만 아는 오답처럼 새겨진다. 전전긍긍하는 이가 없어 그것은 꼭 정답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생에 구멍 하나를 낼 수 있다면 박판식 시인의 시집처럼, 마주하고, 목격하고, 드러내고, 실컷 웃으면서 지나가고 싶다. 너도 올래? 뒤돌아서 권유도 할 수 있는 여유까지도.
그래서 나는 궁금하다. “당신과 나를 놓지 않고 있”는 이 세상의 무언가가 있다면? 시인은 그것을 ‘못’이라고 박았는데 우리 모두 틀림없이 그 못에서 나온 사람들이라서…… 자기도 모르는 구멍 하나를 가지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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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점 같은 힘찬 자유
출판사 | 창비
내가 스패너를 버리거나 스패너가 나를 분해할 경우
출판사 | 중앙북스(books)
나는 내 인생에 시원한 구멍을 내고 싶다
출판사 | 문학동네
서윤후
2009년 『현대시』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나쁘게 눈부시기』와 산문집 『햇빛세입자』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쓰기 일기』 『고양이와 시』가 있다. 시에게 마음을 들키는 일을 좋아하며 책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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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우아빠
2026.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