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다는 속도가 빠른 사람이다. 생각하는 속도, 책 읽는 속도, 결정하는 속도, 어떤 것이든 나보다 열 배는 빠르다. 그는 일의 완성도보다 시작하고 실행했다는 사실에 더 무게를 둔다. 하기로 한 일의 적정선을 지키고, 웬만해선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일의 규모나 걸리는 시간을 하나하나 계산해 가늠하기보다 몸에 밴 감각으로 자연스럽게 알아차린다. 그는 직관이 뛰어나다.
그에 비하면 나는 뭐든지 느리고 실행이 더디다. 눈앞에 여러 선택지가 놓이면 무엇을 고를지 고민하는 데에 에너지의 반을 쓴다. 그러니 시작이 쉬울 리가 없다. A, B, C 중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B를 골라도 과연 옳은 선택을 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A와 C를 선택하지 않은 기회비용을 떠올리며 이제라도 바꿔야 하나 갈등한다. 결과에 쉽게 만족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집안일처럼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일은 매번 선택하는 어려움을 줄이기 위해 규칙을 만든다. 내가 존중하는 동거인이라도 규칙에서 벗어나면 그 상태가 무척 거슬린다.
수건에는 앞뒤가 없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원단의 양면이 동일하기 때문에 봉제선의 모양새나 장식밴드 기준으로 앞뒤를 나누는 것은 기능적으로 의미가 없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다만 나는 봉제선을 보면 소스라치는 병이 있다. 몸을 닦는 수건은 물론이고 행주나 손수건, 속옷도 봉제선을 안 보이는 쪽으로 뒤집어 널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나만의 규칙이라 이다에게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진 않았다. 종종 이다가 널어놓은 수건을 내 기준으로 뒤집어 다시 널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을 뿐이다. “봉제선이 안쪽으로 가게 널면 나중에 갤 때 그쪽 방향으로 깔끔하게 접히니까 더 편하지.” 내 방식이 옳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이다는 나의 방식을 점차 따라하기 시작했다. 봉제선의 방향만 신경 쓰는 것이 아니다. 수건은 두 칸에 걸쳐 ㄷ자로 널고, 면적이 넓은 빨래는 지그재그로 교차해서 넌다. 이렇게 하면 아래로 바람이 잘 통해서 모든 면이 균일하게 마르고 쉰내도 나지 않는다. 예전에는 함께 널기 시간이 끝나고 나면 이다 몰래 내 방식에 맞춰 다시 각을 잡아 널곤 했는데, 요즘은 이다도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넌다. 빨래를 규칙대로 정렬하는 이로움을 그도 깨달은 것일까? 혼잣말로 조근조근 세뇌한 보람이 있다.
동거인과 부딪힐 때 의견을 관철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처음에는 내가 생각하는 합리적인 이유를 열심히 설명한다. 아직 내가 옳다는 확신이 있으므로 호승심이 대단하다. 이럴 때일수록 목소리 톤은 진중하게, 발음은 또렷하게, 전반적으로 침착함을 유지해야 승률이 높다. 길에서 처음 만난 모르는 사람이라면 목소리 큰 사람이 무조건 이긴다고 믿는 K력(한국인 특유의 전투 성향)을 발휘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사이에 먼저 목소리를 높이면 ‘논리가 부족해 이성을 잃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라 패배하게 된다. 양말 논쟁의 경우처럼 상대방의 논리에 설득되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 침착한 태도를 끝까지 유지하는 사람이 이긴다. 물론 내 입장을 고수하면서. 싸움은 기세다. 양보할 수 없다면, 양보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대단한 걸로 싸우는 것 같지만, 대개 이런 식이다.
“택배상자 열 때 가운데를 칼로 자르지 말아줄래? 테이프를 한 번에 뜯을 수가 없잖아.”(호연)
“팬티 접을 때 손으로 납작하게 눌러줘. 그래야 수납장에서 안 떨어지지.”(이다)
“너 매운 거 못 먹잖아. 마라탕은 중간 단계로 시키는 게 맞아.”(호연)
“빨래는 색깔 맞춰 널지 말자. 당장 갤 거 아니면 어차피 나중에 뒤섞이잖아.”(이다)
부딪혀봤자 거기서 거기인 사소한 문제들이다. 그러나 같이 산다면 아무리 사소한 문제도 그냥 넘길 수 없다. 구성원이 단둘뿐인 사회이지만 규범은 필요하다. 함께 사는 10년 동안 우리는 분야별로 규범을 하나둘씩 만들어왔다. 그렇게 옳고 그름을 정한 다음에는 정당하게 잔소리를 할 수 있다.
가끔은 상대가 옳은 소리를 하는데도 내 말이 맞다고 우기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가장 잘 먹히는 방법? 밑도 끝도 없이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 집에는 용도별로 구별해 쓰는 미니 수건이 있는데, 얼굴을 닦는 것과 씻고 나서 엉덩이를 닦는 것으로 나뉜다. 얼굴용 수건은 흰색, 엉덩이용은 짙은 베이지색이다.(이유는 상상하지 말자.) 나는 이들을 같은 색끼리 모아서 건조대에 넌다. 처음에는 이다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걷을 때 같은 색끼리 모여 있으면 갤 때 다시 분류할 필요가 없잖아.” 하지만 아무래도 납득이 안 됐던지 이다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런데 본인이 널어놓은 수건의 위치를 내가 바꿔 널자 무척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이다는 빨리 하고 쉬는 게 효율적이라고 맞는 말을 했지만 나는 그대로 꺾일 수 없었다. 바로 지금이다. 설득하는 대신 감정에 호소하기로 했다.
“그냥 보기 좋아서 같은 방향으로 너는 건데, 안 돼? 내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
평소에 무표정을 고수하면 이럴 때 한층 더 유리하다. 조금만 불쌍한 표정을 지어도 상대는 사안을 다르게 받아들인다. 갑자기 아이를 대하는 양육자의 심정이 되어서는, ‘우리 모가 그랬구나. 그런 감정을 느꼈구나.’ 하는 누그러진 얼굴로 말을 멈춘다. 감정이 그렇다는데, 어떻게 설득하겠는가?
“네가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다는 결국 항복한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굳히기에 들어간다.
“내 감정을 인정해줘서 고마워.”
‘너는 정말 마음이 넓구나. 정말 감동이다.’ 이런 리액션이 뒤따라야 의심받지 않는다. 이렇게 얼렁뚱땅 규칙을 심고 나면 한동안 평화가 찾아온다. 아마 이다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 강박증을 어떡할꼬……. 쯧쯧. 내가 참고 살아야지.’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내 의견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동정을 받는 것쯤 대수겠는가.
양말 분쟁에서는 여전히 이다의 뜻,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널고 개면서 짝을 맞추자는 의견이 탐탁지 않지만 참고 따른다. 네가 이겼다면 이긴 것이겠지. 하지만 제한시간 내에 같은 그림을 최대한 많이 찾아내는 사천성 게임의 달인인 내가 한 쌍의 양말을 본능적으로 찾아 나란히 너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다는 일을 빨리 끝내야 마음이 편하고, 나는 질서를 만들어야 마음이 편하다. 이다는 모든 것을 패턴대로 정돈하려는 내 기질을 느낄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의견이 엇갈릴 때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며 합의점을 찾아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본인이 이겼다고 착각하면서 몰래 자기 방식을 고수하는 것도 나름의 평화 유지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같이 사는 것은 거대한 두 세계가 부딪히는 일이므로 반드시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끝내 설득되지 않는 부분을 남겨 두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남은 부분 때문에 다시 충돌하기도 하고, 우회하기도 하면서 생활을 이어간다. 서로 내가 맞다고 떠드는 동안에도 빨래는 마르고, 수건은 개어지고, 또 하루가 지나간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이다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포항에서 태어나 청소년기 내내 쉬지 않고 다이어리를 썼다. 지은 책으로 『이다의 자연 관찰 일기』, 『이다의 도시관찰일기』, 『어린이 탐구 생활』이 있으며, 『내 손으로, 치앙마이』, 『내 손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 등 100퍼센트 손으로 쓰고 그린 여행 노트를 꾸준히 펴내고 있다. 그림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해보는 것이 소망이다.
모호연
평소 가까운 물건의 생애와 쓸모에 관심이 많다. 우산수리팀 ‘호우호우’ 소속으로 우산수리 마스터가 되기 위해 매주 우산을 고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반려공구』, 『반려 물건』, 『지금은 살림력을 키울 시간입니다』(공저)가 있다. 공구를 체험할 수 있는 공방을 만들어 수리 문화를 확대하는 거창한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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