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물영화제 반려견 동반 야외 상영(<굿보이>)
당신의 급소가 어디냐에 따라 영화를 보기 전에 미리 알아두어야 할 ‘주의 사항’(trigger)은 다르다. 어린이와 동행하는 보호자 관객은 극 중 폭력과 욕설의 빈도와 정도가 궁금할 테고, 스크린에서 피 보는 것을 어려워하는 관객은 사지 훼손이나 고문 장면이 있나 수소문할 것이다. 내 경우, 먼저 영화를 본 친구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유용한 정보는 동물 학대 장면의 유무다. 명색이 ‘직업 관객’이니 기피 장면이 있다고 안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각오는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상영작이 미개봉 신작인 영화제에서는 제목이 유일한 단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의 자문자답이 머릿속에 오간다. 제목이 <검은 개>? 그 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개들의 섬>이라니 어쩐지 슬픈 느낌이야. <파워 오브 도그>야 은유법이니 괜찮겠지.
일부 관객이 인간보다 동물이 당하는 폭력을 스크린으로 보길 더 힘겨워하는 이유가 인류애 부족은 아니다. 스크린에 투사된 동물은 인간에 비해 본능적이고 유희적이며 쉽게 다치는 존재로 관객에게 받아들여진다. 영화 속 어린이와 동물은 그들에게 일어나는 사태의 영문을 모르고 방어 수단도 갖고 있지 못하므로 그들의 운명을 지켜보는 관객의 공포와 연민을 대체로 증폭시킨다. 인도주의 단체가 제작 과정을 모니터링하지 않은 영화에서 살아 있는 동물이 연기를 할 경우 나는 불안한 나머지 몰입이 깨지기도 한다. 오래전 인터뷰로 만났던 한 동물 행동 전문가도 “개가 나오는 영화를 웬만하면 보지 못한다. 저 연기를 시키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쳤을지 보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럼 기술도 발전했겠다, 존 파브로가 감독한 디즈니의 <정글북>처럼 모든 동물 연기를 CG로 구현하면 마음 놓고 영화를 관람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 중심 영화에 소품처럼 끼워 넣은 동물 캐릭터를 CG로 그린다고 해서 작품에 해가 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을 포용하며 계획되지 않은 진실까지 담으려는 사실주의 기반 영화라면 실제 동물과 CG 동물의 존재감 차이는 무시할 수 없다. 장르 영화에도 예가 있다. 차별적 액션으로 크게 성공한 <존 윅> 시리즈는 3편에서 CG 대신 벨지안 말라노이즈 개들을 훈련시켜 액션 연기를 이끌어냈다. 인간 배우와 개의 진짜 상호작용, 액션의 질감과 물성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벨지안 말라노이즈 종 개들에게 스턴트 연기가 공격이라기보다 일종의 놀이라는 판단 아래 용인된 연출이었다.
개가 영화에 참여한 역사는 짐작보다 길다. 1895년 영화를 발명한 인간은 1908년부터 개에게 카메라를 달아 주었다고 기록돼 있다. 제1의 반려동물로서 인간과 생의 서사가 겹치는 만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많은 주류 영화는 개를 관객의 감상을 자극하는 버튼으로 게으르게 이용했다. 개는 귀엽거나 충성스럽거나 둘 중 하나이기 일쑤였고, 유기되었다가 모험의 여정을 거쳐 ‘주인’과 재회하는 스토리로 감동을 주곤 했다. 인물이 개를 대하는 태도는 퍼스널리티를 별다른 설명 없이 전달하는 쉬운 방법이기도 했고 다수의 가족 영화에서 개는 오직 인간을 위로하고 행복을 가져다주기 위해 존재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 개처럼 말을 하지 않더라도, 개의 이미지는 의인화된 대사를 소리 없이 들려주도록 편집되곤 한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세계와 역사가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고개를 들면서 영화 카메라가 동물을 담는 방식 역시 흥미진진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문학이 할 수 없고 영화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는 동물의 육체와 운동, 감각을 직접적으로 작품 텍스트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언어로 환원하기 불가능한 생의 진실과 다른 시간 감각을 체현하는 동물은 타 예술과 겹치지 않는 영화의 고유한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소재다. <환상의 마로나>는 애니메이션 특유의 형식적 자유로움을 이용해 파리의 유기견이 느끼는 세상을 그려냈다. 후각을 인지의 제1수단으로 삼는 생명체가 감지하는 세계의 풍경, 인간의 질서 안에 내던져진 작은 동물의 연약함, 관계의 시작과 끝을 바라보는 의연함을 표현했다. “영화는 공감기계”라는 명제의 대상을 비인간으로 확장한 셈이다. 그래 봤자 인간이 상상하는 동물의 감각 아니냐고 냉소할 수 있지만, ‘타자’에게 가닿으려고 최선을 경주하는 행위 자체가 예술의 본령이기도 하다. 예지 스콜리모브스키의 실사 영화 <당나귀 EO>는 대형 카메라와 빈티지 렌즈를 결합한 촬영으로 주인공 당나귀가 환경과 인간 공간을 탐색하는 시야를 재현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처럼 영화는 이 세계를 지각하고 살아가고 역사를 형성해 가는 주체가 인류만이 아님을 환기시킬 수 있다. 정착지 최초의 암소를 둘러싼 이야기로 소수자 관점의 미국 서부 개척사를 쓴 켈리 라이커트 감독의 <퍼스트 카우>는 훌륭한 예시다.

위 <환상의 마로나>, 아래 <추락의 해부> 스틸컷
21세기가 오기 훨씬 전부터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비전형적으로 재현해 온 벨라 타르 감독의 <토리노의 말>에서, 말은 인간에 앞서 종말을 감지하고 생존과 결부된 노동을 거부하는 존재다. 2024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추락의 해부>에서 추락사한 남자의 어린 아들과 동행하는 보더콜리 스눕은 의인화된 캐릭터도 상징(순수, 자연 등의)도 아니다. 스눕의 구토가 중요한 계기가 되지만 궁극적으로 이 영화에서 스눕은 확실한 범죄 사실의 증거가 아니라 진실의 불확실성을 비인간적 차원에서 떠받치는 존재다. 한편 HBO 시리즈 <체르노빌>은 피폭 현장에 버려진 반려견들을 사살하는 소련 병사와 그 행위가 남기는 무저갱을 보여줌으로써 종말론적 환경 재앙이 미치는 진정한 범위를 드러낸 바 있다. 비단 미학적 야심을 품은 영화가 아니더라도 반려동물인 개와 고양이가 화면의 무게중심을 바꾸고 카메라 동선에 재미를 더하는 예는 주의를 기울이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개는 자연과 인간의 경계적 존재로서 영화에 들어서는 순간 문지방에 걸터앉는다. 인간 중심의 인과를 뛰어넘어 공간을 연결하고, 민감한 청각과 후각으로 사운드가 환기시키는 프레임 밖 공간을 확장할 수도 있다.
아로하는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는 친구고, 영화관은 집을 제외하고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지만, 슬프게도 둘은 포개질 수 없다. 작년 9월 서울 동물영화제가 개최한 영화 <굿보이>(벤 레온버그 감독의 개가 주연했다)의 반려견 동반 야외 상영은 그 오랜 아쉬움을 달래 준 시간이었다. 개들의 관람 매너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그 자리에 없었던 당신은 믿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 아로하와 다시 볼 영화를 내 맘대로 고를 수 있다면 어떤 영화가 좋을지 상상해 본다. 무성영화부터 지금까지 개들이 나오는 숏만 모아 편집한 영원처럼 긴 필름은 어떨까.
서울 동물영화제 반려견 동반 야외 상영(<굿보이>)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김혜리
테리어 믹스 아로하 샨티 킴과 서울에서 살고 있다.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클럽>, <조용한 생활> 운영. 『묘사하는 마음』,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그림과 그림자』 등을 썼다.
![[김혜리 칼럼] 아름다움② | 예스24](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6/02/20260225-9d90b0b7.jpg)
![[김혜리 칼럼] 이웃](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12/20251224-2d695d08.jpg)
![[송섬별 칼럼] 살아 있는 채로, 기쁨.](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07/20250716-8c669f3f.jpg)
![[송섬별 칼럼] 범인은 현장에……](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07/20250702-9644fa19.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