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토크] 라티 쿠말라 “인도네시아의 문화와 역사를 담은 담배 ‘크레텍’“ | 예스24
넷플릭스 <시가렛 걸> 원작 장편소설 『시가렛 걸』의 작가 라티 쿠말라와 시네&북토크
글: 신연선 사진: 김태윤
202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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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시가렛 걸>은 1960년대와 현재를 오가며 자신만의 특별한 정향 담배를 만들었던 여성 ‘정야’와 인도네시아의 시간을 아름다운 연출로 보여줍니다. 이 작품의 원작 장편소설 『시가렛 걸(Gadis Kretek)』의 한국어판이 지난 2월 출간되었는데요. 한세예스24문화재단에서 출간하는 동남아시아문학총서 시리즈의 일곱 번째 도서이기도 한 『시가렛 걸』은 인도네시아 담배 재벌 ‘크레텍 자가드 라야’ 가문의 세 아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낯선 이름 정야(Jeng Yah)를 부르는 아버지를 보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정야라는 이름에 담긴 비밀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원작의 제목이 ‘Gadis Kretek(가디스 크레텍)’이라는 점에 주목해보세요. 숙녀를 뜻하는 ‘Gadis’라는 단어를 둘러싼 인물들의 성공에의 열망과 질투, 배신의 결단이 서로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소설은 인도네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경유하며 흥미롭게 펼쳐 보입니다. 


“그 죽음의 천사는 매번 올 때마다 아버지의 기억력도 조금씩 가져갔지만, 과거 어느 특정 부분만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두려워하던 그 일이 터졌다, 판도라의 상자가... 마침내 열린 것이다. 그 상자 안엔 정야라는 이름이 들어 있었다.”(9-10쪽) 

 

소설의 출간을 기념해 한국을 방문한 『시가렛 걸』의 라티 쿠말라 작가는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굉장히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독자 여러분도 이 책을 읽으시면 공통점을 많이 발견하실 거예요. 『시가렛 걸』은 인도네시아의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가족, 로맨스, 그리고 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요조 작가의 진행으로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와의 시네&북토크가 열린 현장으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2008년부터 집필을 시작해 완성하는 데 4년이 걸렸다는 『시가렛 걸』에 관한 라티 쿠말라 작가의 이야기와 작가가 직접 참여한 넷플릭스 시리즈의 작업 과정에서 있었던 숨은 이야기까지, 알아두면 훨씬 즐거울 작품 안팎의 이야기들입니다. 

 

참, ‘크레텍’은 인도네시아의 독특한 담배죠. 정향이 천식, 기관지염 등의 증상 완화에 좋다고 알려져 인도네시아 민간에서 정향을 넣은 크레텍 담배가 생산되었는데요. 담배가 타면서 정향이 ‘크레텍 크레텍’ 하고 타는 소리를 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이를테면 의성어가 고유명사가 된 셈이고요. 한국어 표현으로 해본다면 ‘타닥 타닥’이 될 겁니다. 요조 작가는 “영화를 먼저 본 뒤 책을 보든 책을 먼저 보고 영상을 보든 공통적인 감정이 분명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것은 ‘담배 한테 피고 싶다.’(웃음) 인도네시아의 크레텍 한 대 피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어요.”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시가렛 걸』은 크레텍 고유의 향기를 몰라도 그 깊고 진한 향이 코에 남는 기분을 선사하는 작품이니까요. 

 

 

요조: 『시가렛 걸』은 작가님의 할아버지께서 운영하셨던 크레텍 공장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이야기라고 합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 가운데 인상 깊었던 기억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라티 쿠말라: 할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어요. 때문에 할아버지의 공장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없습니다. 그러나 매년 할머니 댁에 가족들이 모이면 어머니나 이모, 삼촌들이 언제나 할아버지께서 이런 공장을 운영하셨다, 담배 산업에 몸 담으셨었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덕분에 저도 모르게 관심이 생겼습니다. 작가가 되었을 때, 크레텍이 단순한 담배가 아니라는 것과 그 속에 인도네시아의 그 문화와 역사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요. 그 모든 것이 소설을 쓰는 데 많은 영감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요조: 크레텍 상품의 디자인은 규격화된 서양 담배와는 느낌이 다르죠. 굉장히 색감도 화려하고요. 사람의 얼굴이나 전통적인 그림이 들어간 상표도 있어요. 디자인이 독특하고 개성이 넘칩니다. 

라티 쿠말라: 인도네시아 담배 레이블 디자인을 ‘에티켓’이라고 부르는데요. 각 디자인마다 스토리텔링이 담겨 있습니다. 보통은 글자로만 구성되는 식의 서양 담배 디자인에 익숙하실 텐데요. 인도네시아의 담배는 디자인이 정말 다양합니다. 자료 조사를 하는 동안 여러 제품을 수집했는데요. 저 또한 저마다 디자인이 얼마나 독특한지 무척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떤 제품에는 과일 이미지가 들어가 있고, 동물 이미지가 있는 제품도 있었어요. 모든 디자인에 그 제품의 고유한 배경 서사가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때로는 창업주의 얼굴이 새겨진 제품까지 볼 수 있는 것이죠.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신들만의 담배 브랜드를 생산했기 때문일 겁니다. 

 

요조: 작가님은 거대한 크레텍 산업의 디테일을 소설에 완벽하게 구현하기 위해 방송국 직원으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무려 4년 동안 꼼꼼한 취재를 하셨다고 해요. 그 치열했던 취재 여정에 대해서도 여쭤보겠습니다. 

라티 쿠말라: 『시가렛 걸』은 2008년에 처음 쓰기 시작했어요. 당시 저는 국영 방송사의 직원이었습니다. 일이 너무 많았어요. 하지만 책을 쓰고자 하는 열정 또한 많았고요. 매달 월급날이 되면 금요일이나 월요일에 연차를 내고 자료 조사를 다녔어요. 월급날에만 돈이 있었기 때문인데요.(웃음) 취재를 위해 도시 곳곳을 돌아다녀야 했는데 자바 시 근처의 ‘쿠두스’라는 작은 마을도 그 중 하나였어요. 그곳은 정향 담배로 굉장히 유명한 도시입니다. 이처럼 인도네시아에는 각 도시마다 그곳 담배를 만드는 브랜드가 있어요. 예를 들면 110년이 넘은 전설적인 담배가 있는데요. 패키지를 보면 2, 3, 4라는 숫자가 적혀 있어요. 이 숫자 조합으로 만든 최적의 조향 담배라는 의미죠. 이 담배를 만들 때 사람들이 천식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정향 오일을 사용했다고 하는데요. 최초의 크레텍이었던 것이고요. 그래서 당시에는 담배가 약국에서 판매가 되었어요. 이러한 내용을 취재로 알게 된 거예요. 


 

라티 쿠말라 작가와의 대화는 넷플릭스 시리즈 <시가렛 걸>의 짧은 감상과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BIFF) 아시아콘텐츠어워즈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한 작품이죠. 카밀라 안디니와 이파 이스판샤 부부 감독의 몰입감을 자극하는 연출은 영상 작품의 특별한 점인데요. 작품 일부를 함께 관람한 후 이은선 저널리스트는 “원작과 비교했을 때 선택과 집중이 굉장히 빼어난 각색이”이라는 감상을 전했습니다. 

 

이은선: 라티 쿠말라 작가님도 넷플릭스 시리즈의 각본 작업에 참여하셨죠. 시리즈의 각본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각색의 포인트가 인물의 압축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가요? 

라티 쿠말라: 소설은 270쪽의 분량 정도이지만 이야기의 세계관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영화 산업에도 여러 해 있어 봤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사람들과 책을 읽는 사람들의 타겟층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래서 넷플릭스 시리즈를 제작할 때 여덟 개의 에피소드를 계획했어요. 결국 다섯 편으로 줄여야 했고요. 어떤 내용을 담고 삭제해야 할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시리즈에 책의 내용을 모두 담을 수 없어서 그 부분이 무척 까다로운 작업이었죠. 하지만 그 때문에 저는 여러분이 책을 먼저 보든 영화를 먼저 보든 상관없을 거라 생각해요. 두 작품이 다른 작품을 풍성하게 해주리라 생각합니다. 

 

이은선: ‘수라야’라는 인물은 담배 공장을 운영을 하고 있는 가문에 일꾼으로 갔다가 그 집의 딸과 사랑에 빠진 캐릭터고요. 하지만 도망쳐야 했던 사람이기도 해요. 1960년대, 50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됐던 인도네시아의 정치적인 학살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는 장치로 등장하죠. 한편, 수라야는 다시야와 그의 가문 입장에서 보면 사실상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이 인물을 바라보는 작가님의 시각이 궁금합니다. 원작과 달리 시리즈에서는 조금 더 로맨스 주인공으로서의 면모가 부각됐다고도 생각하거든요. 

라티 쿠말라: 특히 수라야라는 캐릭터를 만들 때 그랬는데요. 캐릭터를 만들 때, 저는 정말 인간다운 인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좋기만 하거나 악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고 믿으니까요. 인간에게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그처럼 여러 면을 모두 지닌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게 바로 수라야였죠. 수라야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열망과 욕망,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가기 위해서 겪어야 했던 모든 것들을 담고 있는 캐릭터인 것이죠. 저는 작가로서 캐릭터를 만들 때 독자에게 호감을 받을 만한 캐릭터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고자 합니다. 모든 행동에는 다 동기가 있고 이유가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수라야가 호감형 인물은 아니어도 수라야가 그 행동을 왜 했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이은선: 당시 인도네시아 여성들이 겪었던 사회 문화적인 억압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는데요. 남성 중심적인 사회 안에서 아주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역경을 헤쳐 나간 주인공 정야가 과거를 살아냈던 모든 인도네시아 여성들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얼굴이라는 생각이 결국에는 들더라고요. 잊혔던 목소리를 들려주고자,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가 영상과 책 모두에 담긴 핵심이 아닌가 했는데요. 작가님은 다시야의 생존 혹은 용기가 어떻게 팬을 움직이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세요? 

라티 쿠말라: 인도네시아 같은 국가들을 보면, 여성은 항상 소외된 존재였습니다. 이런 국가들에서는 특히 더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여성들이 필요하겠죠. 인도네시아는 과거 남성 위주의 사회였고요. 여자는 남자를 서포트해주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어요. 그래서 집안일을 하고 청소를 하고 심지어 남편의 잠자리를 봐주는 역할만 할 수 있었고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담배 산업에서도 그래요.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여성들은 담배를 마는 역할만 하고 있습니다. 담배 제작에 있어 중요한 부분인 조향이나 담뱃잎을 고르는 일 등은 모두 남자들이 하고 있죠. 여자들은 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지금은 과거에 비해 여성들이 더 많은 힘을 가지게 되었고요. 하고 싶은 것을 할 자유가 생겼습니다. 또한 인도네시아의 남성들 역시 여성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페미니스트가 되어서 여성 인권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제 할머니 세대에 비한다면 말이에요. 

 

이에 대해 이은선 저널리스트는 “넷플릭스 시리즈는 부부 연출가가 공동 연출한 작품이에요. 특히 카밀라 안디니의 경우는 격동의 인도네시아 역사를 배경으로 한 여성 역사 드라마를 자주 만드는 연출가죠. 굉장히 섬세한 연출을 보여주는 분이고, 그런 면에서도 최적의 적임자들이 이 작품에 함께 하셨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한편 요조 작가는 “60년대에 여성이 감내해야 했던 부당한 사회적 압박으로부터 많이 나아졌으며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는 점을 현재 시점의 ‘아룸’이라는 캐릭터의 행동으로 가늠할 수 있었어요. 책과는 다른 결말을 시리즈에서는 볼 수가 있는데요. 아룸이 엄마를 둘러싼 가족의 역사와 이 나라의 역사를 공부한 뒤에 하는 선택이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아빠를 알아보고 싶다고 얘기하고, 그 여정에 르바스가 함께 하잖아요. 아룸이 모는 오토바이의 뒷자리에 타면서 동행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또 굉장히 의미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독자와의 일문일답

 

1960년대 인도네시아 사회와 지금의 인도네시아를 비교했을 때, 작가님께서 느끼는 가장 달라진 문화나 가치관은 무엇인가요? 특히 여성의 삶이나 역할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1960년대와 비교한다면, 지금은 황금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시대를 살고 있어요. 물론 몇몇 분야에는 임금 격차가 존재하죠. 그러나 여러 산업에서 성별이 아닌 사람의 가치를 보고 평가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문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시가렛 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요. 이름에 어떤 사연이 있나요? 

정야의 이름이 ‘다시야’이고요. 그의 여동생 이름이 ‘루카야’입니다. 저희 엄마와 이모의 이름이 ‘야’로 끝나요. 그것을 기리는 의미에서 제 방식대로 차용해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여성의 이름 앞에 붙인 ‘정’은 사실 인도네시아어는 아니고 자바어인데요. 성인이 된 여성에게 존중의 의미를 담아 예의 있게 부를 때 사용해요. 때로는 여성들끼리 서로 뒷말을 할 때 사용하기도 하고요. 

 

책에서는 정야가 여신의 환생을 연상시키는, 굉장히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칭송되고요. 여성이 받는 사회적 압박 측면은 별로 드러나지 않거든요. 그런데 시리즈에서는 신화적인 요소가 빠지고 여성이 받는 억압이라는 디테일이 생겨났어요. 어떤 부분을 고려한 것인가요? 

시리즈 작업은 각본팀과 연출가가 함께 의견을 공유하면서 이루어졌어요. 각본팀에는 저를 포함해 네 명의 작가가 있었고요. 제가 전체 이야기를 총괄하면서 작업했죠. 연출가 분들도 예술적으로 훌륭했는데요. 기본적으로 저 역시 다양한 멋진 예술가 분들과 작업을 해왔고, 그들만의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가렛 걸>도 소설에 직관적으로 표현되지 않았던 부분들을 시리즈화 하면서 잘 드러냈다고 생각해요. 결과적으로는 이 시리즈에 만족합니다. 배우도 그렇습니다. 정야를 연기한 배우의 이름은 ‘디안 사스트로와르도요’인데요. 스스로 생각한 정야의 모습이 있었을 테고, 저는 그 모습을 한계 짓지 않으려고 했어요. 배우 분이 제가 그렇듯 이 작업을 사랑하기를 바랐으니까요. 

 

소설에 믿음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인물들이 자신의 꿈을 믿고, 사랑을 믿고, 신에게 미래에 대한 믿음을 구하기도 하죠. 또 수라야의 세 아들들은 회사 크레텍 자가드 라야를 신뢰하기 때문에 다른 담배인 크레텍 가디스의 가치를 알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작가님이 생각하는 믿음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믿음이란 함께 했을 때 완전히 편해질 수 있고 내가 완전히 기댈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앞에 서면 내가 한없이 취약해질 수 있는 상태가 믿음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런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면 그 아픔도 두 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자바어를 이해하는 인도네시아 독자로서 소설이 방언과 표준어를 왔다 갔다 하는 부분을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것을 번역하는 과정이 어땠는지 알고 싶습니다. 

안타깝게도 번역에 대해서는 번역가와 소통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또 제가 한국어로 읽을 수도 없어서요. 저는 다만 어떤 책이 좋은지는 결과가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바라건대 인도네시아어나 영어를 모르더라도 한국어로 번역된 것만으로도 어색함 없이 충분히 즐길 수 있었으면 해요. 

 

세 분 모두에게 드리고 싶은 질문이에요. 같은 이야기라도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장면이 다를 거라고 생각해서요. 각자 오래 남은 장면이 무엇인지 들려주세요. 

요조: 어떤 장면이라기보다 강하게 생각했던 감정이 있기는 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거든요.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더 나은 인생을 살기 위해서 노력한 것일 뿐이죠. 그런데 시대적 배경과 운명이라는 흐름 안에서 뭔가가 어긋나고 의도와 다른 결과가 나오고, 결국 본의 아니게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게 돼요. 누군가는 죽음을 맞게 되고요. 그런 이야기를 보면서 인간은 이 세계, 이 역사 안에서 강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어요. 각자에게 저마다 사정이 있고, 그래서 오해가 있다는 안타까움 말이에요. 그래서 결론이 이상할 수 있는데(웃음) 사람을 너무 미워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 것 같아요. 왜냐하면 나도, 저 사람도 이 세상 안에서 약한 존재들이니까요. 

 

이은선: 책을 읽을 때는 정야의 아버지 ‘이드루스 무리아’의 사연에 빠져들었어요. 시리즈에 비해 소설에는 인도네시아의 토속 신앙 부분이 훨씬 자세히 나오는데요. 이 남자가 성공을 위해서 하는 토속 신앙적인 행동들이 있어요. 이를테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이의 태반을 땅에 묻어두고 일주일간 지키는 풍습이나 사업 성공을 위해서 어느 산에 순례를 가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성공을 향한 간절함으로 그렇게까지 노력한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기분을 오랜만에 느꼈어요. 간절함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됐고요. 책을 보시면서 이두루스 무리아라는 이름을 발견하셨을 때 저의 이야기를 기억하시면서 보시면 어떨까 싶어요. 

 

라티 쿠말라: 책을 쓸 때나 각본을 쓸 때 공통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었어요. 이 이야기에 꼭 필요했지만 동시에 가장 쓰기 어려웠던 부분입니다. 바로 이드루스가 군대에 끌려가는 장면이었는데요. 특정 당을 믿는다고 어딘가로 끌려가는 장면은 실제 인도네시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제 친구들 중에도 이런 비극을 경험한 친구들이 실제로 있고요. 추방되어 아직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친구도 있습니다. 시리즈를 작업할 때 모두가 이것이 비극이라는 사실에 동의를 했고요. 인도네시아의 역사적 비극을 다룬 이 장면만큼은 제가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장면을 최대한 잘 살리려고 노력했고요. 여러 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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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렛 걸

<라티 쿠말라> 저/<배동선> 역

출판사 | 한세예스24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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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선

읽고 씁니다. 장편소설 『구름이 겹치면』, 에세이 『하필 책이 좋아서』(공저)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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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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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티 쿠말라

인도네시아의 소설가이자 드라마와 영화 시나리오 작가. 작품에서 전통과 현대, 개인과 사회, 여성성과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섬세하게 다루어 인도네시아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1980년 자카르타에서 태어나 스블라스마렛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방송국과 영화제작사 등에서 근무하면서 소설 집필을 병행했다. 2003년 장편소설 《타뷸라 라사》로 자카르타 예술위원회가 주최한 공모전에 입상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여러 작품을 출간하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2012년 발표한 《가디스 크레텍》(영제: 시가렛 걸)으로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정향 담배인 크레텍 산업의 역사를 생생하게 그린 이 작품은 호평을 받으며 인도네시아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영어·독일어·아랍어·말레이어·필리핀어·태국어 등 여섯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뿐 아니라 2023년 넷플릭스 드라마 〈시가렛 걸〉로 제작되어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되었고, 2024년 서울국제드라마어워즈에서 최우수 미니시리즈상을 받았다. 국제 문학계에도 이름을 알리며 2019년 런던국제도서전에 인도네시아 여성 작가 최초로 참가했고, 2024년 《가디스 크레텍》으로 태국의 권위 있는 촘마나드 여성문학상을 수상했다. 맨부커상 후보에 오른 유명 소설가 에카 쿠르니아완과 2006년 결혼하여 자카르타에 거주하고 있다.